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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리가 뭐냐는 질문 30초 안에 답하기>의 줄거리 :
진리는 따르기가 억지스럽고 대적하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따르거나 대적하거나 택일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진리를 따름은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30초 안에 답할 수 없는 진리를 무슨 수로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따를 수가 있을까요? 진리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어렵지 않고 쉬우며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진리가 뭐냐는 질문 30초 안에 답하기
(디모데후서 3:6~13)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활 현장에서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나와야 합니다. 머릿속에 진리의 개념이 정리될 수 없다면 실제 생활 현장에서 진리를 따라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30초 안에는 대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명확하고 짧고 분명하게 적중하는 진리의 개념이 요구됩니다.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 배경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앞서 살펴보았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글자대로 보자면 거짓 교사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나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사회에서 유행하는 사상이나 학문 혹은 예술 등에 대해 알기 위해서 유명한 교사를 초빙하여 모임을 갖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교사들은 여성들이 모인 집에 방문하여 이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르쳤고 강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풍토를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모인 집에 이런 자들이 들어가서 진리를 대적하는 말씀을 가르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듯 비진리가 진리를 대적함이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디모데에게 경계하라고 강조합니다. 비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칭송받게 되는 이유는 듣는 사람들에게 참다움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참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참이 아닌 이야기가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열광하기까지 합니다.
이어서 8절을 보면 모세를 대적했다는 얀네와 얌브레라는 두 인물이 언급됩니다. 앞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부겔로와 허모게네 등이 쌍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들은 믿음을 등진 자들이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선한 양심을 버려서 선한 싸움이 중지되는 바람에 믿음에 파선한 예로 언급되었고,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악성 종양과 같은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들로 언급되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되는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했다는 말대로 사도 바울의 시대로부터 1500년 전인 출애굽 때의 인물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유대교 전승에 모세를 대적했던 마술사들로 언급되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모세를 대적한 사건을 거짓 교사들이 진리를 대적한 사건과 동일시합니다.
이들이 가진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30초 안에 답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해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5초 만에도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진리입니다. 다만 이렇게만 이야기하자면 진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진리란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 되시며,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시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이 땅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성령님께서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따라 살 수 있어야 하고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염두에 둘 수 없다면 생활 현장에서 진리를 따라 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모세를 대적했다는 얀네와 얌브레가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대표로 거명된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얀네와 얌브레는 출애굽 하려는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마술사였습니다. 모세가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일으켰을 때 바로의 명령을 따라서 자기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또 모세가 나일강이 피로 변하게 했을 때 이들 또한 같은 일을 벌이고, 개구리가 사방에 가득하게 되는 상황까지도 흉내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술사들에게 이러한 기적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가 이로 변해서 애굽 전역에 창궐하는 상황까지는 따라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이에 9절을 보면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실패한 사건을 두고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분명히 출애굽을 방해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일을 보자면 굳이 진리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함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결국 모세가 선민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광야로 나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시도를 방해한 자들입니다. 출애굽기 7장을 보면 모세는 출애굽의 목적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 내용이 출애굽기 10장에서는 더욱 구체화 되는데,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좋아하고 섬기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러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마술사들을 시켜 모세를 대적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하나님 좋아함을 방해한다는 의미에서 얀네와 얌브레를 거짓 교사들과 같은 대적자의 대표로 거명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에서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섬기는 일은 광야에 나가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십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가치 없는 땅입니다. 지금이야 원유가 나오는 경우도 있기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만 당시의 광야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그러한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라 요청하십니다.
섬김이란 곧 좋아함입니다. 흔히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재물을 섬긴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실제로 가지기 위해 욕구하게 되고 이로부터 뜻하고 계획하고 추진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섬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한다면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싶어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해짐이 두터워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많이 가지기 위해 뜻하고 추진하는 일에 나의 주체성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섬김을 광야에서 요구하신 이유는 바로 앞서 말씀드린 광야의 특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가 모여 있는 애굽과는 달리 광야는 좋다고 여길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무인도에 갇힌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이렇게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나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된다면 변화산의 베드로의 반응처럼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다 휴지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맛볼 때 세상은 좋아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오감에 가려져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갖는 일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좋아하고 섬기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익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빗나감의 죄성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세상을 좋아하는 죄성에 찌들어 있는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진리를 따라 좋아하기 위해서는 익숙하게 좋아하는 세상 것들이 없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출애굽 하여 광야로 나갈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광야에는 인간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좋아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가나안 복지는 광야를 거친 선민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이 정해놓은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만을 좋아하여 하나님의 맛을 충분히 안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맛을 모른 채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면 그곳은 곧 지옥의 예고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맛을 잊어버리고 풍요와 다산이라는 세상의 맛을 추구하다가 멸망하고 맙니다.
여기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은 선민이 하나님만을 좋아하기 위하여 애굽 땅을 빠져나가는 것을 방해했고 이것이 곧 진리를 대적한 것입니다. 진리란 하나님이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모세는 선민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광야로 이끄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모세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모세는 선민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어 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인간 세상 바깥으로 끌고 나가시고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또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몸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 외에는 다른 환경을 접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좋아하여 섬기도록 세상 바깥으로 이끄십니다. 출애굽이 아닌 출세상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적자들도 진리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님의 이름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선민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면 자기들이 우두머리로 존재하는 종교나 예배당 조직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적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명패를 예배당 안에 붙여놓고 이 예배당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이 광야로 나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세상 안에 종교를 만들어놓고 그 종교의 천장 위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붙여놓고 위를 보라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갈 필요도 없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진리에 대적하는 자들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대적자들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세상 친화성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 친화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특징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 것들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려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 친화적인 자신을 애지중지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은 반갑습니다. 이러한 거짓말은 열화와 같은 칭송과 환영을 받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이란 선민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좋음으로 직면함으로써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출세상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상태에서만 성령님을 통하여 이 땅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경건의 삶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박해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 친화적인 자기를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경건은 자신들의 삶이 잘못되고 오류투성이의 비진리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적자들은 참다운 교인들의 모습을 보기 싫어하여 박해합니다.
한편 이러한 박해 중에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박해를 받을 이유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에 은혜가 충만해서 가족들이 건강하고 형통하고 하는 일도 잘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바라는 일들을 다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가르치고, 굳이 세상을 빠져나가서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바라는 억지를 부릴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세상을 좋아하는 자신을 애지중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시대에 여성들의 모임에 거짓 교사들이 초청되어 이렇게 가르쳤고 여성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열성적으로 호응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진리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시대를 살기에 박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박해를 자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박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친화적인 나 자신은 애지중지해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십자가로 가서 죽어야 하는 존재합니다.
내 속에는 세상 것을 바라는 본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서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세상을 좋아하는 나를 세상 바깥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박해를 자처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세상이 볼 때는 아니꼽게 여깁니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박해하느냐며 비웃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박해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죽이는 박해를 자처하지 않는다면 세상도 나를 박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 속했기에 세상이 나를 박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박해한다면 내가 박해를 자처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친화성을 박해하기에 세상도 나를 박해하게 됩니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세상 친화적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억지스럽습니다. 한편 진리를 대적하는 삶은 세상 친화성을 따라 그대로 흐르는 일이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세상 친화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따르거나 진리를 대적할 뿐입니다. 진리를 대적하는 일은 너무나 쉽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일들에 대해 생기는 바람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억지스럽습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세상 친화성을 거역하고 스스로를 박해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스스로를 박해함으로써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에 속한 마음을 세상 바깥으로 끌고 나갈 수 없다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라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진리를 만날 수 없으면 유일하신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인격 안으로 수용할 수 없고, 이 땅에서 성령이라는 진리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살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30초 안에 답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있음이시고 유일하신 좋음이시며 유일하신 주권자 되시며,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시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이 땅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성령님께서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따르는 삶에는 박해가 따릅니다. 박해가 없는 세상에서도 끊임없이 박해를 자처할 수 있습니다. 세상 친화성을 띤 죄적 본성은 애지중지할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 대해 애착을 갖는 대신 스스로를 십자가로 몰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박해를 통해서 진리를 따르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광야로 나가려는 모세를 대적하는 것이 진리를 대적함이었던 것처럼 세상을 완전히 빠져나가려는 나를 대적함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며 하나님 대신 세상 것들을 바랄 때 진리를 대적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30초 안에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진리의 개념을 기억하시며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 진리를 따라서만 우리의 삶이 진행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보물인 진리를 따라서만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속성과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과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마음속에 품고 간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