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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신공호흡 받으며 몸으로 성경 쓰자_태승철 (딤후 3:14~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5.06|조회수6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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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공호흡 받으며 몸으로 성경 쓰자>의 줄거리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문자대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호흡하심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에게 하나님이 인위적으로 호흡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신공호흡이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람의 지, 정, 의에 당신의 지, 정, 의를 불어 넣으심을 뜻합니다. 우리도 신공호흡 받아 생활 현장에서 몸으로 성경을 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공호흡 받으며 몸으로 성경 쓰자

 

(디모데후서 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제목에서 ‘몸으로 성경을 쓰자’는 말은 성경을 읽은 만큼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성경을 써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경 속에 담겨있는 내용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고 성경책을 들고만 다니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삶에서 몸으로 성경을 써나갈 수 없다면 성경책도 이 세상에 있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삶의 현장이 종이라면 우리는 몸을 움직이며 성경을 써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책을 주신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조언을 요약하자면 ‘네가 성경을 안다면 삶에서 성경을 써나갈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에서 ‘신공호흡’이라는 말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 숨을 쉬는 자가호흡을 합니다. 그런데 의식을 잃거나 사고를 당해서 자가호흡이 불가능해지면 인위적으로 허파에 산소를 불어넣는 인공호흡을 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신공호흡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뜻에서 만들어 본 말입니다.

요새 인공지능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인간지능이 있고 인공지능이 있습니다. 인간지능은 인간이 지적 능력을 갖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더 이상 영화 속의 일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탑재되어 있는 크루즈 컨트롤도 인공지능의 한 영역입니다. 마치 사람처럼 스스로 속도를 유지하며 주행하다가 앞에 차량이나 장애물을 발견하면 적당한 거리에서 제동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거리가 생기면 따로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아도 주행을 시작합니다.

한편 자동차에 인공지능이 탑재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몸에 신이신 하나님의 지능이 탑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의 지능이 탑재되기 위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의 지적 능력입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능력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위적으로 허파에 산소를 주입하는 인공호흡과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기능을 허파에 비유한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산소를 주입하듯이 당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불어넣어 주시기에 신공호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서 영적으로 큰 성숙을 이루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를 동행시킵니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14절에서 언급된 디모데가 배운 것이란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이었고 곧 십자가로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또 확신한 일에 거함이란 디모데가 실제로 십자가 하나로만 살면서 사도 바울에게 배운 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삼았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하나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얀네와 얌브레라는 마술사가 모세를 대적했던 사건을 언급하며 진리를 대적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주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배우고 십자가 하나로 사는 삶이란 진리를 대적함과는 반대로 진리를 지켜나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의 효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듯이 십자가는 우리를 출세상 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가야 했던 이유는 인간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좋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으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삼은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하여 그 하나님을 많이 가지기를 소원하면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은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 하나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하나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만을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 하나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인격은 의식 작용, 욕구 작용, 주체성의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요소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 십자가로 사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혔다가 순교할 상황이었습니다. 디모데의 입장에서는 의지할 멘토를 잃게 되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제 스스로 모든 사람의 멘토가 되라는 뜻입니다. 디모데가 십자가 하나만을 붙잡는다면 사도 바울이 없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십자가 하나로 사위일체를 이루는 삶을 이미 살았기에 이제는 확고하게 마음을 붙이고 흔들리지 말라는 조언을 해줍니다.

한편 이로부터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을 이루어서 사위일체를 이루어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에는 수없이 많은 책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책 중에 오직 성경에만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어 생활 현장에서 밥 먹고, 일하고, 부부가 마주하며, 자녀와 관계하고, 모든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경을 언급하며 디모데가 혼자가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16절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보면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인공호흡을 하시듯이 호흡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신께서 하신 신공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지적 능력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스스로 숨을 쉴 수 없는 사람들의 허파에 인공적으로 숨을 불어넣어서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허파 삼아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들어왔기에 신공지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나갈 수 있는 지능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신공호흡을 통한 신공지능을 탑재한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신공호흡이 불어넣어진 대표적 사건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만나신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1~22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야말로 신공호흡을 하시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도 몸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정이나 일터에서 살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 생각하고 감정을 움직이고 의지를 발동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총체이십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가호흡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마음을 하늘로 보낸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허파와 같이 작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기능에 하나님의 호흡이 불어넣어져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자가호흡, 감정의 자가호흡, 의지의 자가호흡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의 신공호흡, 감정의 신공호흡, 의지의 신공호흡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경 또한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옴으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쓰였습니다.

 

 

성경은 신공호흡을 통하여 신공지능을 탑재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입니다. 따라서 그 내용 또한 신공호흡을 통하여 신공지능을 탑재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소유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이며 택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하신 사람들은 그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상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준비시키는 일을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신공호흡으로 신공지능을 받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온전하게 하며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춤이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호흡을 불어넣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예를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성경을 통해 이미 그러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다면 나 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들의 삶은 몸으로 쓰는 성경이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어떻게 내 삶이 성경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성경의 정의를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어 주셔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다면 우리의 삶 또한 성경이 됩니다. 내 몸으로 성경을 쓰게 된다니 실로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자가호흡을 하는 사람에 의해 쓰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감정을 느끼고 스스로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결코 성경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신공호흡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기록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 기록하였고, 그 내용도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 산 사람들에 대한 것이며,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 또한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의 1년 365일은 마치 성경의 장, 절과 같습니다. 생각의 허파, 감정의 허파, 의지의 허파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불어넣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라는 생활 현장이라는 페이지에 내 몸으로 성경을 써나가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경은 양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양피지나 갈대를 엮어서 만든 파피루스에 기록했습니다.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우리는 책으로 만들어진 성경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이제 삶의 페이지에 성경을 써나가라 조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알려져야 될 책으로는 기록된 성경이면 충분합니다. 나의 삶이란 다른 사람에게 공개될 필요가 없는 나만의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공개될 필요가 없을 뿐이지 우리 몸으로 써나가는 성경은 책으로 기록된 성경과 그 내용이 다를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 또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 생활 현장이라는 지면에 쓰는 성경을 가까이 있는 이웃이 읽는 성경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이웃의 삶이라는 성경을 내가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생활 현장에서 몸으로 쓴 성경을 이웃이 읽고, 이웃이 생활 현장에서 몸으로 쓴 성경을 내가 읽는 것이 성도의 교제로 나타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공호흡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내 몸을 가지고 성경을 써 내려가야 됩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생활 현장이라는 지면에 성경을 써 내려가는 붓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신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만 성경은 올바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자아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성령님과 어떻게 일체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 속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령님과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고 성경을 읽는 목적도 잃게 됩니다.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과 하나 됨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령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배워서 사위일체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에서 성경을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 또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같은 사도행전의 형태로 안 것은 아니지만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접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곧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를 당할 때와 같은 상황을 살고자 했음을 가리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삶이 곧 성경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그대로 옮기는 일을 필사라고 합니다. 이 일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보다 백배 천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었으면 읽은 만큼 생활 현장이라는 지면에 내 몸을 붓으로 삼아 성경을 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만을 상대하는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호흡으로 성령이 불어넣어지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성경이 됩니다.

자동차에 인공지능이 탑재된 것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세상을 빠져나감을 지속하는 사람에게는 신공지능이 탑재됩니다. 신공지능이 탑재된 몸으로 살면 그 사람의 삶은 성경을 써 내려가는 것이 됩니다. 연필이나 펜으로 성경을 필사하지 말고 몸을 붓으로 삼아 삶의 현장이라는 지면에 성경을 필사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2023년 5월 5일이라는 지면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한 죽음을 유지해 나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호흡으로 신공호흡을 하며 신공지능을 통해 오늘이라는 지면에 몸이라는 붓으로 성경을 쓰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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