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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 현실감과 세상 현실감 사이>의 줄거리 :
이제 사도 바울 생애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서, 특별히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유언의 내용은 두 나라, 즉 그리스도 예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십자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세상을 곧 떠나야 하는 때에 사도 바울은 극대화 된 천국 현실감 속에서 디모데에게 유언합니다. 천국 현실감을 가진 사람이 세상 현실감 속에서 사는 자들을 어떻게 관계할지를 알게 하십니다.
천국 현실감과 세상 현실감 사이
(디모데후서 4:1~5)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디모데가 상대하는 교인들에게 천국 현실감과 세상 현실감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말씀드린 대로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 생애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볼 6절을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사도 바울의 순교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은 1~5절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디모데가 관계할 교인들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유언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가 임박한 상황에서 별세에 대한 강렬한 확신과 극대화된 천국 현실감을 보여줍니다.
먼저 1~5절의 내용이 된 배경에 대해 살펴봅니다. 어떤 의식 상태에서 이런 말씀이 나왔는가를 봄으로써 말씀에 담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분명히 존재했으나 그동안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예수님의 나라가 드러나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이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보좌 우편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실 천국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오른편이나 왼편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보좌 우편이라고 언급되는 예수님의 자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그 어떤 대상도 끼어들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우리의 마음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특징은 돈 문제가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돈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이 돈 문제와 직면하기 마련입니다. 마음으로 돈 문제를 직면한 다음에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이 먼저 의식되고 나서 돈 문제를 보면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일임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돈 문제가 해결되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좋아할 수 있습니다. 돈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끌려져 갈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을 ‘하나님 앞’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이라는 상황을 통해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실 때 바로 이렇게 우리가 몸으로 사는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직면하며 살았는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마음에서 의식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곧 심판받을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납니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 때 보시는 것은 마음이 무엇을 직면하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직면했는지 혹은 돈 문제가 생겼음에도 아버지 하나님을 직면했는지를 보십니다.
훗날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설 때 예수님께서는 돈 문제가 있었던 오늘을 회상하시며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했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 돈 문제를 보았다면 돈 문제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기쁨과 채움은 문제와 관계없이 하나님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끌려 갈 것임을 생각하며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 채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을 소망하며 마음에서 문제를 물리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A+ 성적을 주실 것입니다.
한편 1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나라는 예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거의 같은 표현입니다만 사도 바울이 굳이 예수님 나라를 언급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나라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재림 때는 예수님 나라가 모든 인류에게 정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재림 때 살아있는 자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부활해서 예수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듯이 예수님 나라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의 나라’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야 하는 관문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경계로 몸이 있는 세상에 마음이 머문다면 세상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한편 몸은 세상에 남아있더라도 마음이 십자가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으로 들어갔다면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나라에 속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직면할 수 없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세상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마치 국경과도 같습니다. 마음은 몸이 있는 세상에 머무는 세상 나라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영역에 머무는 예수님 나라가 십자가를 국경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해주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의 내용은 바로 이 두 나라에 대한 의식에 의해 규정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를 넘어갈 때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천국까지 포함하는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어서 2절을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흔히 언제나 전도를 하라는 말씀으로 오해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행동을 합니다. 때를 얻지 못한다면 말씀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파하라’와 ‘힘쓰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표현을 합쳐서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기에 오해가 발생합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전도에 힘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합니다만 사실 틀린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라는 부분을 원문대로 풀어보자면 ‘좋은 때든지, 아닌 때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때’는 수직의 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전파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를 보고 계셨듯이 우리도 보고 계십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말씀을 전하시려는 뜻이 있다면 하늘에서부터 그 뜻이 내려와서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에 의해 결정된 일이 아니라면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것은 인위적인 일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디모데전서 6장 5절에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이로스의 때를 얻지 못하는 자들은 전도를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도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마주하는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다면 전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때를 못 얻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어서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카이로스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항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뜻이 임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언제 임해서 입을 열어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기에 마음은 항상 대기하고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준비란 1절에서 언급된 ‘하나님 앞’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유지할 때 우리의 마음은 카이로스의 때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늘 아버지를 보고 계셨습니다.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권자 되시는 아버지만을 의식하는 일에 힘쓰셨던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을 전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말과 행동조차도 아버지의 뜻이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따라 이루어지게 됩니다.
힘쓰라는 것은 바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만을 직면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때나 전도를 해서 예배당에 많은 사람을 데려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전도 상을 받을지라도 사욕을 따라 전도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전함의 근본 취지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국경으로 두 나라가 마주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가 사람들을 만날 때의 관점이 십자가를 통해 구분됩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같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 중에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들에게 말씀이 전해지고,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예수님 나라로 마음이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 말씀을 전하는 근본 취지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을 살고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는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노숙자라도 하나님의 아들로 택함을 받았다면 그 마음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같이 대단한 직함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몸이 있는 세상에 마음이 머물고 있다면 세상 나라에 속한 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심판 때 휴지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소모품처럼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어떻게 사람을 소모품에 비유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결코 인격을 무시하는 의도에서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는 아산 병원이나 삼성 병원 같은 굴지의 병원들이 있습니다. 병원장이 병원을 잘 운영해서 사람들을 치료하며 인정받았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십자가를 국경으로 접해있는 예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병원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치료받았지만 정작 병원장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사용된 소모품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세상 나라에서 잘나가도 마음이 십자가 넘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근본 취지는 바로 이렇게 소모품처럼 쓰일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TV에서 뉴스를 볼 때도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십자가를 넘어서 예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느냐, 십자가를 넘어오지 못하고 세상 나라에 머무르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를 넘어서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이 되겠지만, 십자가를 넘어오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주권의 소모품으로 쓰이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조언합니다. 어려운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비슷한 의미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인들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라’는 이야기를 강조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강조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침에서 ‘범사에 오래 참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오래 참음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의 죄성이 그만큼 끈질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성이란 바로 세상 친화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세상과 친해지고자 합니다. 이 빗나감의 본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세상 친화성이고 죄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말씀을 전해 들으면 십자가를 국경처럼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세상 친화성 때문에 마음은 자꾸만 몸이 있는 세상을 향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십자가를 넘어가야 한다는 양심이 발동해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인들은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십자가를 국경으로 하고 있는 세상 나라와 예수님 나라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물론 믿음이 성숙할수록 오고감은 줄어들고, 예수님 나라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 베드로 같은 경우는 마음이 예수님 나라에 완전히 정착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정착 또한 거저 유지되는 일은 아닙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듯이 지속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은 예수님 나라에 정착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 성숙함에 따라 이 일이 보다 잘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일은 지속성이 필요합니다. 결코 단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광야에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광야에서 갈증을 느낄 때마다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따지며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러한 모습에 모세가 분노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분노를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여기시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디모데에게 오래 참음을 강조합니다. 교인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십자가를 국경으로 접하고 있는 세상 나라와 예수님 나라 사이에서 오갈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어떤 문제에서 시험에 들든지 범사에 참으며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는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대한 현실감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십자가 국경을 넘어 예수님 나라에 가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천국 현실감은 몸이 있는 세상의 현실감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끌려가면 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하게 하는 지정의에는 하나님께서 인공호흡을 하듯이 호흡을 불어넣어 주심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신공호흡이라는 표현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신공호흡을 통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더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져 나가는 현장일 뿐입니다.
이전에 세상은 배우들의 촬영 현장과 같다는 비유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배우들은 현실처럼 연기하지만, 그것이 현실은 아닙니다. 촬영장에서 배우는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하나님의 신공호흡을 받아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발동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곳입니다.
십자가 국경에서 오가던 교인들의 마음은 경책과 경계와 권면을 받으며 점점 더 십자가를 넘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예수님 나라에 대한 현실감은 커지고 세상 나라에 대한 현실감은 작아집니다. 이와 동시에 평강과 자유는 확대되고 더 튼튼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디모데가 교인들을 이렇게 만들어 가기를 바라며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는 조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인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4절을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게 십자가 국경을 넘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 하나님을 직면하라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사욕을 갖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서 마음의 채움을 얻으려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장소이지 마음의 채움을 구할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은 바늘구멍 하나만큼의 빈틈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득 찬 곳이듯, 나의 몸이나 지정의의 능력 또한 하나님의 주권의 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몸이 있는 세상에 마음이 남아있고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은 본래 십자가 국경을 넘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무리 가르쳐줘도 세상에서 몸으로 직면하는 것들에 대해 마음이 반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사욕이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모든 바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등진 사욕이며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십자가 국경을 통해 예수님 나라로 넘어가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사욕을 부리는 모습을 ‘귀가 가려워서’라고 표현합니다. 사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기에 듣고 싶은 말이 생깁니다. 쉽게 말해 돈 벌고 싶은 사람은 돈 버는 방법을 듣고 싶어 하고, 승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승진하는 방법을 듣고 싶어 합니다. 혹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격려하고, 권고하고, 장담해 주는 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사욕을 이룰 수 있다고 희망을 주는 스승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스승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세상을 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십자가 국경을 지나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입니다. 문제는 이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사욕을 가짐으로써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찾아다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승의 사상을 배우려 하지 않고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찾아다닙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자들의 스승이 되겠다고 나서지 말고 직무를 다하라 조언합니다.
세상에서 인기 있는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귀가 가려운 사람들의 귀를 긁어주는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인기가 있든 없든 십자가 국경을 넘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디모데에게 전한 내용이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의 현실감으로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너머의 예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만들어 낸 예수님 나라 안에 천국도 들어있습니다. 이 천국을 여러분의 가정이나 몸보다도 더 강한 현실감의 대상으로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 몸보다도 더 우선적이고 뚜렷한 현실로 느낄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저 멀리 있는 나라를 현실로 느끼지 못하듯이 천국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내 몸으로 느끼는 세상을 비현실적으로 느낄 정도로 천국에 대한 현실감을 크게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현실감의 내용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국 현실감을 통하여 세상을 사는 동안에 오직 십자가 관문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삶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