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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다 정해진 달려갈 길도 가기 힘든 이유_태승철(딤후 4:6~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5.11|조회수9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 정해진 달려갈 길도 가기 힘든 이유>의 줄거리 :

평생 달려갈 인생길이 정해지지 않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달려갈 길의 내용과 시간적인 끝이 다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운명론과는 다르게 이 달려갈 길의 내용은 각자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본래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인생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달려갈 인생길의 내용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싸움으로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다 정해진 달려갈 길도 가기 힘든 이유

 

(디모데후서 4:6~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임박한 죽음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전제란 구약시대에 드리던 번제에서 사용되던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번제를 드릴 때는 희생제물을 올려놓고 그 위에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부은 후 불을 붙였습니다. 따라서 전제와 같이 부어진다는 것은 피가 땅에 부어질 죽음이 결정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한편 이어지는 7절을 보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는데 ‘달려갈 길’이라는 표현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길에 비유합니다. 좀 더 복음적인 의미에서 이야기해 보자면 십자가는 기준입니다. 세상 나라와 예수님 나라가 십자가를 국경 삼아 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달려갈 길’이란 세상 나라 안에서 몸이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생길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인생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후에 크게 바뀌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인생에 있어서 ‘달려갈 길’의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달려갈 길’이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달려가면서 채워야 할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달려갈 길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용’과 ‘끝’은 본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주제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지었고 아담 안에 들어있던 모든 인간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마지막 사람의 인생길을 다 정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생길을 정해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본래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 인생길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내용으로 채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만 여기서 정해진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정해진 길조차도 제대로 가지 못합니다. 정해진 인생길의 내용을 채우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7절을 보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정해진 인생길의 내용을 채우는 법이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달려갈 길을 채우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내용을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인생의 내용들은 저절로 채워져 나가게 됩니다. 오늘 선한 싸움을 싸우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정하신 일들로 내 인생을 채워나가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지었음으로 인격이 더러워지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려고 계획하셨던 모든 인간들의 인격도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이 오염되고 죄악 된 본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함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은 하나님만을 대면하고 하나님만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기에 하나님 대신 좋아하는 대상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며 우리의 근성이자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함은 우리 인격의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여겨 하늘로 올라가기를 날마다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속의 죄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것들을 향하고 좋아합니다. 이로부터 선한 싸움이란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앞서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나라와 예수님 나라가 나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세상 나라에서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마음은 십자가 관문을 지나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며 좋아하게 됩니다.

흔히 선한 싸움을 박해하는 세상과의 싸움이라 오해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내 속에 있는 죄성과의 싸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박해한다면 우리는 박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여 박해를 피할 수는 있을지언정 박해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마귀에 의해서 내 속에 형성된 죄성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싸워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생길의 내용을 채우고자 한다면 스스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시도는 필요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사는 동안 마음은 끊임없이 십자가 관문을 넘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는 고백적인 마음가짐을 가질 때 몸으로 사는 인생길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나가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있음을 느낄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좋음을 욕구할 수 있는 대상도 하나님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의 대상으로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입니다. 내 속의 죄성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 있음을 느끼게 하고 좋음을 욕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의 본성과의 싸움을 통해 마음이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관문을 지나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면 세상 나라에 남아있는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이 태초에 정해놓으신 내용으로 차곡차곡 채워져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달려갈 길’의 내용들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언급한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의 관계입니다.

 

한편 선한 싸움을 통해 내용을 채워가는 인생길에는 끝이 있습니다. 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육체가 죽는 시간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끝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것에는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달려갈 길의 끝을 연장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빨리 죽고 싶어도 자살을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끝 이전에 죽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자살을 금기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살은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아는 목사님과 대화중에 서로 깜짝 놀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서울 강남에서 목회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목회 현장을 정리하시고 저처럼 강릉에 와서 방송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의 상황을 바꾸려고 할 때는 지금이 싫거나 다른 상황을 좋게 여겨서 바꾸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상황에서만 자리를 옮기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싫거나 다른 상황을 좋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가 많기에 우선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감사를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궁금했던 것을 하나 여쭤보았습니다. 이제까지 서울 강남에서 몇십 년을 사셨는데 목사님은 그렇다 치고 사모님께서 시골에 오시는 걸 좋아하겠냐고 여쭸더니 사모님께서도 괜찮게 생각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강릉에 가서 살아도 괜찮은 이유가 아산 병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께서 저에게 건강검진을 잘 받고 계시느냐고 물으시기에 저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감기 기운이나 있으면 동네 가정의학과 병원에 가지만 건강검진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목사님께서 제 말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닙니다. 제가 어떤 장로님 내외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건강검진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모님께서 건강검진을 받으셨는데 초기 유방암을 발견하셔서 제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로님께서는 건강검진에서 아무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저에게 어느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내외는 건강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너무 놀라시기에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내시경 경험도 없냐고 물으시기에 한 30~40년 전에 독일에 있을 때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강제로 한 경험이 있다고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달려갈 길’이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암이나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학적 사인은 암일 수도 있고 교통사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죽음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으로 달려갈 인생길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암이나 사고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달려갈 길을 끝내시기 위해 동원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죽는 근본적인 이유는 암이나 사고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로님의 부인께서 건강검진을 받지 않아서 유방암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나이보다 빨리 죽는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하나님의 주권이 암은 어쩔 수 없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90세로 정해놓으셨다면 암이 있는 채로 90세까지 사셨을 것입니다. 40세에 암에 걸렸어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끝이 80세라면 40년 동안 몸에 암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해당합니다. 건강검진 결과가 완벽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끝보다 오래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정하신 끝이 2년 뒤라면 지금 아무리 건강해도 2년 뒤에는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과소평가합니다. 쓰레기 치우듯이 치워버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운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끝에서 1초도 연장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끝에서 1초도 모자라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달려갈 길의 끝을 정해놓으셨고 붙들고 계시기에, 육체의 상황이나 주변의 환경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그 끝을 넘어갈 수 없고 아무리 병약해도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건강검진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주인이심을 믿는 사람으로서 건강검진을 할 수도 있고 큰 종합병원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 어떠냐는 것입니다. 내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 건강검진이 꼭 필요하다 생각한다면 선한 싸움을 포기한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건강검진이나 종합병원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내일 죽더라도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검진을 받아서 아무리 건강하게 나와도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내일이라면 내일 죽을 것입니다. 반대로 건강검진이 아무리 안 좋게 나와도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10년 뒤라면 10년 뒤까지는 누구도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다 죽을지라도 근본적 사인은 원자폭탄 때문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의 달려갈 길의 끝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더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더 살게 하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때문에라도 폭탄을 터지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싸움도 싸우지 않고 믿음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먼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 때문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의 동일시입니다.

이로부터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 나라에 대해 죽은 자라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을 보면 ‘심판의 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어떤 점을 눈여겨보시는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몸이 살아있는 세상 나라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죽은 자의 의식은 인내로 지켜질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 것들은 자꾸만 나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십자가 관문을 지나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감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시 세상 나라로 끌려 나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여기서 인내가 요구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나라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인내로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살펴보며 ‘천국 합격 기준은 믿음1, 인내, 믿음2’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믿음1이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고, 믿음2는 예수님 나라에 머무는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확신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음을 고백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 대신 가정을 지키려고 합니다. 건강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고, 자존심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붙잡혀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이상으로 더 잘 지켜질 수는 없습니다. 내 목숨을 내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발상 자체가 벌써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잃었다는 증거이며 선한 싸움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서 믿음을 지키면 달려갈 길을 가는 중에 천국 현실감을 과제로 삼게 됩니다.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과 천국을 포함하는 예수님 나라에서 머물며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고자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 나라에서 사는 몸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달려갈 길의 내용은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워서 믿음을 지켰고 마음은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몸을 통해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달려갈 길과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달려갈 길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는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지나 예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만을 보물로 여긴다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서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하게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보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달려갈 길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내용들로 채워질 수도 없고, 인생을 제멋대로 뜻하고 계획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결코 뜻하고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지지도 않는 죄악 된 삶을 평생 살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끝을 맞이한다면 그야말로 헛바퀴를 돈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지키려 할 필요 없습니다. 심지어 나를 지키고 변호하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오직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갔는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고 그 자아의식을 인내로써 지켜내고 있는지를 신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정하신 달려갈 길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해나가십니다.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께서 나의 몸을 장갑 삼으셔서 다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운명론이 아닙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 나라에 머물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관계에서 오늘 이루어져야 할 내용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붙들 수 없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부부관계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정해져 있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가의 여부는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부부관계에서, 부모자식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은 이루어질 수 없고, 정하신 내용들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만 지키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내용들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끝은 지구가 두 쪽이 나도 변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사느냐 짧게 사느냐에 대한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병원에 다니거나 건강검진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을 주시해서 내가 병을 두려워하거나, 몸을 보존하고자 하는 식으로 몸을 붙잡고 있다면 그러한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관하고 계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기 몸을 병원에 맡기고 의사 손에 맡긴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검진을 하지 않는 제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자면 건강검진을 안 받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것이 더 이상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이라면 건강에 앞서 선한 싸움을 싸워서 믿음을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목사님이나 장로님일지라도 하나님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원을 이용하게 하시려면 길을 가다 쓰러지게 하셔서라도 병원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몸을 보존하고 지키는 방법으로 병원을 동원하는 전혀 믿음 없는 사람들과 같은 발상과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 입에서 ‘어떻게 건강검진을 안 받고 살아가느냐?’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학 병원이 있기에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광야에서도 하나님만 계시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비난하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사는 것이지 건강검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검진 안 받으면 못 살고, 큰 병원 없으면 못 산다는 이야기는 큰일 날 소리입니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생각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몸 때문에 마음이 세상 나라에 붙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몸을 보존하기 위해 건강검진과 큰 병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상식이라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예수님 시절에는 어떻게 믿음을 지켰을까요? 세상에 교통사고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고, 암 때문에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세상에서 보이는 이유로 죽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달려갈 길의 끝을 그 시간으로 정하신 것이고 그 끝을 이루시는 방법을 교통사고로 동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달려갈 길과 끝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지금 제 몸속에 암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나님이 정하신 끝이 이르기 전에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끝이 이를 때까지 암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중에 30대 후반에 극심한 당뇨가 시작되었는데 8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주변에 건강을 자부하던 다른 분들은 다들 먼저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달려갈 길을 심각하게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달려갈 길에서 채워야 될 내용과 달려갈 길의 끝을 정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내용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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