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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인수인계할 것이 있는 인생 없는 인생_태승철 (딤후 4:9~2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5.13|조회수6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수인계할 것이 있는 인생 없는 인생>의 줄거리 :

복음의 흐름이 내게서 끝나는가 나에게서도 계승되는가? 이 문제를 본문은 우리 앞에 제시하십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개인의 죽음을 넘어서 지속하는 복음의 장구한 흐름에 한 구간 통로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끝내 예수님 나라를 고수한다면 반드시 내가 받은 십자가 복음을 인수인계할 후계자를 주실 것입니다.

 

 

인수인계할 것이 있는 인생 없는 인생

 

(디모데후서 4:9~22)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앞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하였습니다. 인생 마지막 순간의 심정에 대한 토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고백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다만 본문의 내용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본문을 다른 서신의 마지막 부분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사로운 부탁과 요청을 하고 문안 인사를 하고 있다고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는 인생의 마지막 기록이었기에 유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다른 서신들의 마무리 부분과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9절을 보면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21절에서도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겨울을 언급한 이유는 지중해 기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 배가 파선을 당하거나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겨울 항해는 어려움이 많았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지연될 것을 염려하여 겨울이 오기 전에 출발하기를 부탁합니다.

이어서 10~12절을 보면 디모데도 잘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거명됩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한 것은 다른 서신처럼 사사로운 부탁이나 안부를 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10~12절까지 거명된 사람들은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은 사역자였고 동역자였습니다. 그중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에서 파선한 사람이었으나, 나머지는 사도 바울의 순교가 확실시되는 시점에서도 각처에서 열심히 말씀 전파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들의 상황을 차례대로 언급한 것은 마치 인수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복음 전파 사역은 사도 바울 인생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동역자이자 후배들은 모두 피붙이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순교를 앞둔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복음 전파 사역의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잘못 이해해서 사사로운 부탁이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동역자의 수준까지 믿음이 성숙했던 이들이 한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국경으로 접하고 있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몸이 있는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세상 나라, 몸은 세상에 있지만 마음은 십자가 관문을 지나서 예수님을 따라 부활 승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의 예수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사역이란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지나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전한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지나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따라가면 예수님 안에서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직면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에게는 심각한 박해가 임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로잡혀 순교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부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많은 생각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바로 오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스게를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두기고는 이미 에베소로 보냈고, 그리고 디모데에게는 마가를 데려올 것을 요청합니다. 마가에게 로마의 사역을 인수인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디모데를 부른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외롭거나 사사로운 심부름을 시키고자 디모데를 불렀던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복음 전파 사역의 인수인계를 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세상 나라에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 관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사역을 디모데에게 인수인계하기 위해서 디모데를 불렀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다른 동역자들과는 다르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언급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데마가 사도 바울을 떠났다는 것인지 신앙을 떠난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을 사랑하였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데마는 그저 사도 바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국경으로 접하고 있는 두 나라 중에 세상 나라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1차 투옥 때는 순교가 확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박해 또한 심각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당시의 데마를 동역자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2차 투옥되고 순교가 확실시되는 상황이 되자 데마의 태도가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몸에 붙으면 세상에서 좋고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한편 순교는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건입니다.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지나서 예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천국에서 아버지를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도저히 순교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데마가 세상을 사랑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데마는 동역자의 노릇을 했으면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인생이 더 잘 풀릴 것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세상을 완전히 떠나 예수님 나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으로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방식으로 채택했던 것입니다.

데마는 십자가를 수단 삼아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잘 살기 위한 자기만의 방식을 동원합니다. 데마에게는 그 방식이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일들이 순조롭게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순교가 확실시되는 사도 바울을 떠나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던 것과 같습니다. 순교는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 전부를 잃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서 세상을 아까워하고 좋아하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순교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사도 바울을 떠나 동역자 중에서 낙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데마와 같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데마와 달리 나머지 동역자들은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나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이들에게 인수인계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저 디모데를 아끼는 마음에서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가 걱정되었다면 마음을 예수님 나라에 머물게 하라고 더욱 조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얼굴을 보고자 했던 것은 외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아쉬워서 디모데를 보고 싶어 했다면 예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마가와 디모데를 함께 보고 싶어 했던 이유는 사역의 인수인계 때문이었습니다. 마가에게는 로마의 사역을 맡기고자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일찍이 사도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사역한 적도 있었기에 로마의 사정에 밝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마가에게 로마의 사역을 일임하고자 합니다.

한편 13절을 보면 특이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있던 에베소는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의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언급한 드로아는 같은 항구도시지만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야 하는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자면 디모데는 가죽 종이에 쓴 책을 준비하고, 북쪽의 드로아로 가서 사도 바울의 겉옷을 찾고, 그곳에서 에게해를 항해하여 그리스 반도 남쪽의 로마로 가야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합니다. 겨울 전에 오라는 단서를 보고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추웠기에 겉옷을 요구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사도 바울의 생각을 문자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본문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 곁에는 누가가 있었고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도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겨울에 겉옷 하나 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디모데에게 드로아에 남겨둔 자기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 후계자의 증표로 겉옷을 던져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사역을 인수인계할 사람이라는 증표로 겉옷을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떠올리며 디모데에게 겉옷을 가져오라 요청합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남겨두었던 겉옷은 1차, 2차, 3차에 걸친 전도여행에서 입고 다녔던 옷입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이후에 1차로 투옥되었고 그 이후에 풀려났을 때 서바나를 방문한 후에 소아시아 지역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 에베소에 디모데를 남겨두고 가는 중에 드로아의 가보라는 사람의 집에 겉옷을 남겨둡니다. 겉옷을 남긴 이유는 드로아의 기후를 비롯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 전파자로서 입었던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한 이유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인수인계할 때와 같은 의식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14절에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어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겉옷을 물려받는다는 사건에는 사역을 인수인계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죽 종이에 쓴 책 또한 별 의미 없이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인수인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2장 1절, 3절을 보면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하였습니다. 인수인계를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올 것을 부탁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마가와 누가와 같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수고할 계승자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성경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이 기록된 책이 바로 본문에서 언급되는 가죽 종이에 쓴 책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가죽에 기록된 책은 흔치 않았기에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무슨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금세 알았을 것입니다.

 

한편 16절을 보면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동역자 중에서도 겉으로 보기에 섭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역자가 세상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 나라로 끌어들이는 사역을 진심으로 감당하는 사람이라면 섭섭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섭섭해한다면 오히려 내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주께서 이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역자들도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동이 나와의 관계에서 섭섭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에게서 허물을 찾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곁에 사람들이 없는 상황을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주께서 곁에 계시며 힘을 주시고 자신을 건져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동역자들을 붙잡고 이끄실 때 그가 내게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섭섭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 전에 14절에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를 언급합니다. 알렉산더는 앞서 후메내오와 함께 믿음에서 파선한 자였습니다. 15절에는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 말이란 세상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예수님 나라로 이끄는 십자가 복음이자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세상 나라에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십자가를 폐쇄시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언급은 앞서 살펴보았던 다윗이 솔로몬에게 인수인계를 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을 통일하지 못했던 시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북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인 아브넬과 아마샤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평화가 조성되고 있는 시대에 사람을 죽이는 일에 반대했지만 요압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여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러한 요압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 처리할 것을 지시합니다. 한편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라 지시하고,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도망할 때 다윗을 모욕했던 베냐민 사람 시므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마땅한 처리를 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사도 바울이 알렉산더에 대한 처리를 디모데에게 맡긴 것과 같은 맥락이 이어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복음의 이어짐을 가르쳐줍니다. 십자가 한 편에 있던 강도는 죽자마자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도 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죽자마자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됩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한 편에 있던 강도나 병상 세례를 받고 죽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은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살려 두고 계십니다. 이렇게 살려 두심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세상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역사에 가담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세상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로 들어오는 길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내가 마주하는 사람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하라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관문을 거쳐 예수님 나라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이라면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 관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두신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뒤에 대통령을 할 수도 있고 재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고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지금 죽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제일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올라가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살려 두시는 이유는 십자가 한 편의 강도나 병상 세례를 받는 사람들처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복음이 내게서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복음의 유구한 흐름 속의 한 구간을 맡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동역자들은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이 흘러간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십자가 관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자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흐름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십자가 관문에 대해 전해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예수님 나라에 머물며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십자가 관문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이 이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좁은 문을 전달하는 릴레이가 내게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두고 계신 이유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인수인계는 이어져가야 합니다.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몸으로 세상 나라를 살 때 반드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과 마주하게 됩니다. 내게서 십자가 관문의 복음을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 관문을 전해줄 인수인계자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이유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사는 세상 나라의 삶은 아버지의 주권에 맡기면 됩니다. 아버지가 인도하시는 대로 진행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 본업은 인수인계의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갈 기회를 찾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부활 승천 우편까지 따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일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나라를 사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마음을 주시고 환경을 주시고 때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복음을 전하며 살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다 내가 죽을 때는 나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나 마가나 누가나 두기고는 세상 나라에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십자가를 전하는 인수인계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두 제자와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님이나 빌립 집사님 등을 통해서 퍼져나간 사람들이 또 자기의 인수인계자를 세웁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복음의 족보는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전주 이씨가 이성계가 세운 조선시대를 거치며 유구히 흘러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유구히 흘러가는 복음전파의 흐름 속에서 지금 하나님이 나를 살려두고 계신 이유는 그 흐름 속의 한 구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에서 예수님 나라로 들어가는 십자가 관문의 전파가 내게서 그 흐름이 끝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유언과도 같은 디모데후서를 마감하면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마가와 누가를 비롯한 자식 같은 후배 동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인수인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디모데를 부르고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을 마감할 때 우리에게서 십자가 관문을 전해 들은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 관문을 전파하도록 온전히 인수인계를 받을 사람을 찾는 것이 우리의 본업입니다. 인생의 본업을 인수인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관문만을 전파하기 위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본업을 인수인계할 후계자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복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게서 그 전파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온전히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 마음을 가지고 세상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전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나의 본업을 인수인계할 사람이 아버지의 계획 속에 있는 줄로 아오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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