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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무지한 자기 확신이 깨진 선한 싸움꾼_태승철(딤전 1:12~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4.03|조회수7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지한 자기 확신이 깨진 선한 싸움>의 줄거리 :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시면서 당신 자신을 예로 들어 교훈을 주십니다. 목회자는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조력자입니다. 이때 목회자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지금 천국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단절된 상태에서 형성된 사람들의 자기 확신이 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단 이것이 깨져 천국과 연결이 이루어지면 선한 싸움을 하게 하는 것이지요.

 

무지한 자기 확신이 깨진 선한 싸움꾼

 

(디모데전서 1:12~20)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요청합니다. 무지한 자기 확신이 깨진 사람만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지하기 때문에 가졌던 자기 확신이 깨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 이후에 구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했다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모든 교인들을 선한 싸움꾼으로 만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모범적인 예로 자기 자신을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지한 자기 확신의 화신과도 같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처럼 무지하면서 자기 확신이 강했던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나의 자기 확신은 깨어졌고 이제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서 일어난 일이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에게서 무지함으로 일어난 자기 확신을 깨어지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목회자의 해야 할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디모데가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바랐고, 또한 디모데가 만나는 모든 교인들을 선한 싸움꾼이 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바랐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자기 확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제시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능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자기 확신이란 나의 능력, 나의 가치, 더 근본적으로는 나의 생각에 대해서 확신을 갖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 확신이란 능력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내가 별다른 능력이 없을지라도 ‘나는 참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조차 자기 확신의 모습입니다. 나의 능력, 가치, 생각에 대해 특정한 신념을 갖는 것이 자기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무지한 일입니다.

 

15절을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천국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소식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말씀이며, 믿어 의심치 말고 받아들여야 할 최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수없이 많은 말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입니다. 뉴스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소식이 나오고,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 종교가 혹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책을 써내고 자신의 말을 전합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과 격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말들 중에 최고의 말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에 계셨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여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일을 돕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가 어떤 점에 유의하여 예수님께 조력해야 하는가에 대해 자신을 예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15절 하반절을 보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양한 맥락에서 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인이란 바로 자기 확신의 화신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렇게 박해하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사랑이라 믿었고, 하나님께 최선의 기쁨을 드리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무지한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자기 확신이 깨진 뒤로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능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능하게 하셔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외에도 사도 바울은 곳곳에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자기를 묘사할 때 자기 확신이 가득 차 있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에서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만큼 자기 확신에 차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이러한 자기 확신이 완전히 깨어졌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직분을 해나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13~14절을 보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는 예수님께서 능하게 하심을 모른 채 스스로에게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신을 충성되게 평가하시기 전에 스스로를 충성되고 열심이 있는 자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확신에 갇힌 상태에서 했던 일이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확신 아래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박해했고 그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자기 확신은 깨어졌고 비로소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 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일을 떠올리며 1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임하신 사건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최고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무지한 자기 확신은 외부로부터 파입(破入)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사도 바울의 자기 확신의 껍질을 예수님께서 외부로부터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말하는 죄인이란 바로 예수님을 모르고 무지한 자기 확신에 갇혀있던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별의별 열심을 다하여도 하나님과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천국과의 단절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기 확신의 껍질 안에 똘똘 뭉쳐서 갇혀있는 상태가 바로 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자신이 이러한 죄인의 상태였음을 고백하며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의 마음은 자기 확신으로 가득했습니다. 나의 생각이 100% 맞고, 완벽하게 옳다는 확신이 존재했습니다. 사울은 그러한 자기 확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될 수도 없기에 이러한 자기 확신은 완전히 무지하고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제로 연결됨이 없이 스스로를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인의 특성이자 죄인들의 특성입니다. 자기 확신 안에 갇혀서 내가 하는 생각, 나 자신에 대한 능력의 평가를 만들고, 신념의 체계를 구축하며, 나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만 그러한 일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느끼는 자기 확신에 갇혀있는 무지한 상태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실존하는 천국의 있음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갖게 되는 무지한 자기 확신의 울타리는 죄인의 특성입니다.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 진영으로 공을 몰고 가서 골대 안으로 넣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저 공 점유율을 높이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감독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감독은 골대에 골을 넣는다는 생각을 배제한 채로 작전을 짭니다. 공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작전을 짜고 선수들의 능력을 평가합니다. 결국 작전대로 공을 오래 가지고는 있지만 골 결정력이 없기에 결과적으로는 패배합니다. 죄인의 사고방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천국과 단절된 상태에서 나의 능력을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자기만의 신념체계를 붙잡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골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중앙에서 공 점유율만을 늘리고자 작전을 짜는 감독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하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제일 먼저 느끼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골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짜야 하듯이 내 의식 안에서 하나님을 제일 우선적인 존재감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축구장에 비유하자면 천국은 골대입니다. 축구 선수가 골을 넣기 위해 경기를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가기 위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단절된 사람은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골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경기에 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회사에 나가서 사장님을 마주할 때도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장님의 존재감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감입니다. 좋게 여겨야 할 일은 사장님에게 좋게 보여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좋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나 신념체계나 가치관과 생각은 무지함에 근거한 오류일 수밖에 없고 죄인의 특성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부부간에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염두에 둘 수 없다면 무지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 능력을 평가하는 모든 시도는 실제 능력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무지함이 바로 죄인의 특성임에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채 무지함에 근거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 또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죄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확신이라는 껍질에 갇혀있는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기 확신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자들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외부의 십자가 예수님을 전함으로써 자기 확신에 차있는 사람을 죽은 자로 확인시켜줍니다. 이렇게 자기 확신의 껍질이 깨질 때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의식과 욕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닿게 됩니다. 이것이 골인을 이룬 상황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추구하는 욕구는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닿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골이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이 상태에서 비로소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로 자기 본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힘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맡기실 만큼 자신을 충성된 사람으로 여기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충성을 바친 만큼 예수님께서 충성되게 여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명에 대해서 충성된 자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축구 골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를 늘 의식하여 골을 넣는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승리의 삶을 허락하십니다.

 

무지한 자기 확신의 껍질은 스스로 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부터 깨고 들어오는 은혜의 역사로만 자기 확신의 껍질은 깨집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자신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원받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칭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확신의 껍질이 두껍고 강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산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외에 하나님과 실제로 연결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있으며, 모세와 다윗과 사무엘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령을 통해서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 안에 마음을 두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승천하신 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를 골대로 삼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골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내 인격 전체인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무지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지만 그러한 모든 자기 확신은 오류투성이인 죄인의 특징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밖으로부터 전해짐으로써 자기 확신의 껍질은 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확신의 껍질이 깨진 자들이 해나가야 할 일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5절을 떠올려봅니다. 사도 바울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선한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 부분은 바로 청결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는 동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상들을 마음에 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육체로 마주하는 대상이나 상황이 하나님의 있음보다 더 우선적인 존재감으로 느껴진다면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있음이 우선적이고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으로 의식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대상들이 육체를 통해서 마음으로 파고들어 오기에 싸워야 될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마음의 바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질 때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본래 내 마음을 채울 수 있고 만족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욕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것을 바라게 되었다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아서 부족과 결핍을 느끼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바람을 다른 대상에게 적용할 때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더러움이 생기지 않도록 싸울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의식과 욕구에 대한 선한 싸움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15절을 보면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예언이란 앞으로 사역을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유지하기 위해 십자가를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고 욕구하게 되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확인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인정하는 자들만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있음을 존재감의 대상으로 느끼고, 하나님 이외의 좋음을 욕구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려 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심을 알면서 돈이 좀 더 있기를 바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알면서 건강을 더 좋아할 수 있는가?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다면 세상에 대한 바람은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함을 알면서도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바라기를 유지해나간다면 양심이 없는 일이다.’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심을 통해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한편 선한 양심이 없는 경우에 일어나는 일이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이 있어야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을 유지해야만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되시고 유일한 좋음 되시고 유일한 주체 되심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마음의 청결함을 유지해야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이 보여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함을 유지해야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이 보여서 하나님만을 바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함을 유지해야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이 보여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나의 삶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이 없기에 더러움을 용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신데 다른 것들의 있음을 우선하여 느낍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신데 온갖 것들을 좋다고 바랍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주체성이신데도 내가 나서서 생각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면 선한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항상 기쁨도 없고, 쉬지 않는 기도도 없으며, 범사에 감사도 없습니다. 지옥으로 돌아가서 불행과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 살게 됩니다. 믿음의 파선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이 있어야만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통해서 마음의 청결을 유지해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믿음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양심에 기반을 둔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없다면 마음의 청결은 유지될 수 없고 하나님도 볼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해 십자가를 붙잡지 않는다면 믿음은 파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성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의식할 수도 없으며, 소망할 수도 없으며, 주체성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청결함을 망치는 원인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긴 상태에서 나타나는 자기 확신입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은 골대를 고려하지 않는 잘못된 작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러한 자기 확신을 깨뜨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확신이 깨질 때 죄인의 구원받음은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있음과 천국의 있음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면 마음의 욕구는 하나님께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욕구는 하나님께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싸워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양심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더러워지려는 내 마음의 상태를 바라보며 십자가 붙잡고 싸워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에서 하나님을 볼 때 믿음은 유지되어 나갑니다.

무지한 자기 확신의 껍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어져나가야 합니다. 오직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유지하면서 멋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벽을 쌓는 자기 확신의 껍질이 주님의 십자가를 매순간 기억함을 통하여 깨어져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상태에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함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믿음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해주시고 이 모든 일을 위하여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이 유지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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