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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한 싸움’ 동아리의 선배 후배 관계>의 줄거리 :
지금과 같은 예배당이 없이 한 도시 안에서 몇몇 가정을 중심으로 모임을 하던 교회 상황에서 수행하게 될 감독과 집사 직분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감독과 집사는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매일 그리고 평생을 생활 현장에서 치러야 하는 선한 싸움꾼들입니다. 열거한 자격 항목들은 모두 내면적으로 선한 싸움이 잘될 때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들입니다. 결국 감독과 집사는 선한 싸움의 성공적인 선배들로서 선한 싸움의 후배들을 이끌어야 할 자들입니다.
'선한 싸움' 동아리의 선배 후배 관계
(디모데전서 3:1~13)
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본문에서는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위한 자격요건이 언급됩니다. 그 내용 자체는 비슷하기에 감독 직분에 대한 자격요건만을 읽어보았습니다. 제목에서 <‘선한 싸움’ 동아리의 선배 후배 관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동아리는 교회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감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만 본문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비유로 삼아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단체나 그룹 안에는 반드시 선배와 후배가 있기 마련입니다. 선후배 관계가 성립하는 모든 곳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 주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회사에서도 부장 과장 대리 계장 같은 다양한 직급이 있지만 결국은 선후배 관계를 직분으로 정의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단체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성립합니다.
이런 상황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지속하여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요건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항목을 열거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감독과 집사의 직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조직 내의 직분은 아니었습니다. 이들 직분의 궁극적 의미는 선후배 관계를 비유로 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독과 집사는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잘해 나가는 선배라고 할 수 있고, 이들의 역할이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해나가는 후배들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직분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예배당 조직을 염두에 두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우리가 경험하는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독교는 313년에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었습니다. 국교가 되었다는 것은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의 직분에 대한 언급은 이러한 중세의 상황과도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직분에 대한 언급을 접할 때 선입견을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에 교인들의 모임이란 가정 모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를 생각해보면 그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몇몇 가정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독과 집사 직분을 받은 자들은 에베소 도시 전체를 향해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보자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정과 직장 등 매일의 생활 현장 외에는 별도의 장소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생활이란 생활 현장에서의 선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 모습과는 구분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세상 사람들과 아무 차별이나 구별 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단지 예배당 안에서 국한되는 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직분이란 예배당 조직의 유지와 운영과 확장된 관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로 여깁니다. 장로, 집사, 권사 같은 직분을 받아 충성 봉사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신앙생활은 전혀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에게 신앙생활이란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한 싸움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조직화함에 따라 신앙생활은 점차 예배당 조직을 위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감독과 집사라는 직분의 역할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믿음직스럽다, 의심할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감독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프스코프스(ἐπισκοπῆς)는 돌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독은 곧 교인들을 돌보는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교인들을 돌봄이란 디모데전서의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목회자인 디모데가 교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선한 싸움꾼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싸움을 위해서는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이심을 알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고 바라게 되는 것을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는 하나님만 들어오셔야 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의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한다면 마음은 더러워지고 만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직장에 나가 일하더라도 우선적으로 느껴야 할 존재감의 대상은 사장님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시기에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껴야 한다. 사장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는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일을 잘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하나님이 유일한 주체로서 주관하고 계시는 앞에서 나의 주체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감히 나의 주체성을 발동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그리고 선한 싸움이란 이러한 선한 양심에 위배되는 상황이 내 인격에서 나타날 때마다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며 청결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한 싸움을 해나감을 통해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보는 어떤 대상보다도 명확하게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돌아가는 생활 현장 속에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선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양심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늘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감독이란 바로 교인들이 선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돕는 자였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감독은 직분이나 지위를 좋아함이 아니라 선한 일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직분이란 지금처럼 총회장이나 장로가 되겠다고 돈을 써가며 선거운동을 해서 얻는 풍토가 아니었습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감독의 직분이었습니다.
선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제일 좋아하시는 일이란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해나가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을 이해하는 사람 중에서 다른 교인들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어떻게 하든지 돕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쁨이 점점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감독의 직분을 원하는 자들은 이처럼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형교회의 장로가 되면 명함에 기록까지 합니다.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잘 알려진 큰 교회의 장로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감독이란 교회의 대표와도 같았습니다. 따라서 감독이 된다는 것은 교회에 가해지는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되는 영순위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먼저 죽어야 되고 가장 먼저 박해를 받는 자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리를 사모함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그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선 자들이 감독의 직분을 맡았던 것입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감독의 자격이 열거됩니다. 2절에서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시작하여 이와 관련된 내용이 이어지는데 4절을 보면 자녀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녀들의 교육을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 불리는 종에게 맡겼습니다. 집안의 종 가운데서 지력이 탁월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합당한 인물을 가정교사로 삼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러한 항목들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비단 감독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항목들은 결국 생활 현장에서 끊임없이 선한 싸움을 잘 싸워나갈 때 나타나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인격 내부에서 자신의 죄성과 엄청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죄성은 끊임없이 세상 것을 좋음으로 느껴 욕구하게 됩니다. 또 세상에서 보이는 것들의 존재감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먼저 느끼게 합니다. 또 세상에서 내가 주체가 되도록 유혹합니다. 이러한 죄성을 가지고 생활 현장에서 끊임없이 선한 싸움을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싸움을 잘 싸워나갈 때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가 2~7절에서 언급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시는 감독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나타나야 할 일입니다.
다만 이러한 선한 싸움의 결과가 생활 현장에서 나타나는 과정에 선배가 있고 후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선택된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믿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10년 동안 선한 싸움을 해온 선배와 3년간 선한 싸움을 해온 후배에게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8~13절을 보면 감독의 자격요건에 이어서 집사의 자격요건이 나옵니다. 이러한 모든 항목들은 감독과 집사에게만 국한되는 요건이 아닙니다.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해나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만 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모든 단계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회사의 신입사원이 일을 배워감에 따라 승진을 하듯이, 선한 싸움에도 선후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앞서가는 선배들이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생활 현장에서 2~7절에 언급된 다양한 표시로 나타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선한 싸움의 과정에 들어선 후배들이 자기처럼 되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6장 29절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감독에 합당한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감독을 맡은 자들이 모두 신앙의 최고점에 이른 자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다른 교인들에 비해 앞선 면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예배당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임명을 합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감독의 의미에 기준을 두자면 누구나 감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한 싸움을 하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와 같은 상황일지라도 큰 도토리가 있고 작은 도토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큰 도토리에 해당하는 사람이 작은 도토리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적어도 자기만큼 신앙의 진전을 이루기를 바라고,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는 확신을 갖는다면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고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감독의 역할이란 결코 명함에 기록하는 직함이 아니었습니다. 역할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선한 싸움을 하고자 마음먹은 사람들의 동아리 안에서 선배와 같은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선배 역할을 하던 사람이 생활 현장에서 침체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후배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이번에는 선배를 위한 감독과 집사가 되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침체의 늪에서 꺼내 올려서 선한 싸움의 궤도로 다시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8절 이하에서는 집사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다른 서신에서 집사와 관련된 구절들을 보면 그 성격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로마서 16장 1절을 보면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라는 여성을 교회의 일꾼 다시 말해 집사로 언급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 자신도 스스로를 집사로 칭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3장 5절을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은 아볼로나 자신을 모두 사역자라 칭합니다. 여기서 사역자란 사도를 가리키는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가 아니라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3장 6절을 보면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자신을 가리켜 일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일꾼으로 번역된 것도 집사를 뜻하는 디아코노스입니다.
사도 바울은 직분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나 집사나 마찬가지로 선한 싸움을 해가는 과정을 돕는 자들의 역할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요구한 일들은 선한 싸움을 해나갈 때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인들이 승리하는 선한 싸움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다만 이러한 선한 싸움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선후배가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럴 때 선한 싸움을 잘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선배로서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보편적으로 타인의 유익을 구한다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한 싸움을 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도움을 가리킵니다. 선한 싸움이라는 상황에서 나타나야 할 사랑을 감독이나 집사라는 직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직분이란 결코 지금과 같은 조직체의 임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맨 위에 당회장이 있고 그 밑으로 장로들이 있고, 다시 그 밑으로는 안수집사가 있고 서리집사가 있고 구역장과 권사가 있는 조직을 염두에 둔 직분이 아니었습니다. 감독과 집사는 선배로서 후배를 돌보는 사랑의 직분입니다. 비록 자신이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후배 교인들에 비해 앞선 면이 있다면 그 부분만큼이라도 이끌기 위해 사랑의 마음으로 돌보는 자들이 감독이고 집사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처음으로 일곱 집사를 뽑았을 때도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집사를 뽑은 이유는 사도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구제를 맡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행전에서 집사가 구제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사들 또한 사도들이 행하는 말씀 사역과 복음 전파 사역을 해나갔고, 오히려 사도보다 먼저 순교자가 나타나기까지 합니다. 집사라는 직분이 구제라는 일에 국한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싸움을 함으로써 나타나는 표시들이 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선한 싸움의 증거를 나타내는 자들이라면 선배의 입장에서 의무적으로 후배들을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독이나 집사라는 직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집사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디모데에 대해서도 에베소 교회에서 감독과 집사를 뽑아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집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직분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조직의 임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보다 앞선 선한 싸움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감독이자 집사의 역할을 수행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집사로 칭했던 것과 같습니다.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는 의무적인 사역을 뜻합니다. 모든 선한 싸움의 선배들이 집사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라는 직분에 대한 설명 또한 그 사역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 사역의 내용이란 이 세상을 박차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생활 현장에서 선한 싸움을 하도록 돕는 자입니다. 집사는 선배로서 후배를 위해 사역하는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감독은 그 사역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집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앞서 있다면 선배로서 후배를 도울 수 있습니다. 후배도 선배가 침체의 늪에 빠졌음을 보았다면 선배의 역할을 함으로써 감독이고 집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직분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화석처럼 굳어진 조직을 위해서 직분을 받고, 예배당의 유지와 확장을 위하여 요구되는 일들을 열심히 수행하는 것은 감독이나 집사 본연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머릿속에 그런 감독이나 집사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직분이란 선한 싸움꾼들이 모인 동아리 안에서 선배들은 후배들을 적어도 자기가 도달한 자리까지 이끌기 위하여 의무적으로 사랑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감독과 집사의 직분으로 한 것입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듣는 여러분들 중에 한두 사람이라도 선한 싸움꾼의 동아리에 속한 자들이 주변에 있다면 내가 선배일 수도 있고 그가 선배일 수도 있습니다. 단 두 사람이 만나더라도 아름답고 바람직한 선후배의 관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하신 형제들을 주변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형제가 나보다 선배이면 배우게 하시고, 후배라면 이끌게 하여 주심으로써 아름다운 선후배 관계가 어디에서든지 확인되고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