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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후서-2

녹취문: 우산 조직 교회 교인의 특징, 경건_태승철 (딤전 3:14~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4.10|조회수8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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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우산 조직 교회 교인의 특징, 경건>의 줄거리 :

교회를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 속 교인의 특징을 경건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교인 각자에게 경건함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교회와 경건함이 생길 수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을 갖춘 예배당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경건함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산을 엎어 놓은 모습으로 조직을 갖춘 교회 안에서만 교인들은 경건할 수가 있습니다.

 

우산 조직 교회 교인의 특징, 경건

 

(디모데전서 3:14~16)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교회는 조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은 우산 모양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조직에 속한 교인들의 특징은 경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산 모양의 조직 교회와 비교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면 피라미드식 조직 교회입니다. 피라미드식 조직 교회는 현재 천편일률적으로 퍼져있습니다.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피라미드식 조직에 속한 교인들의 특징은 경건이 없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자, 진리의 기둥과 터에 비유합니다. 이어서 16절을 보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는 말씀으로부터 이러한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특징으로 경건이 언급됩니다. 경건이란 앞서 강조되었던 선한 싸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내면에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울 때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가 경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건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경건의 비밀’이라 언급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할 수 있기에 이 경건의 비밀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16절을 보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도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경건이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경건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이 또한 위대합니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고 함은 경건과 그 비밀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에 비유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이렇게 비유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세상을 빠져나가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유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아버지 우편으로 가시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있음을 느끼는 의식 작용이 있고,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좋음을 추구하는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의식과 욕구 작용이 일어나는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할 대상이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서 마주하는 대상의 존재감을 우선시하고 좋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있음을 우선시하거나 승진을 좋게 여겨 욕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회사에서도 사장님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끼고, 승진보다도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을 좋게 여겨 욕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회의 정의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받아들여서 교회의 구도를 그려보자면 뒤집힌 우산 모양의 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나무로 만든 우산살에 비닐을 씌운 일회용 우산이 있었습니다. 그 제작 과정을 보면 비닐을 씌우기 전에 우산대와 우산살로 뼈대를 만들고 거꾸로 땅바닥에 펴봅니다. 그러면 우산대가 하늘을 향해있고 우산살은 땅을 향해 펼쳐진 모습이 됩니다. 바로 이 모습이 교회와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있는 우산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그리고 우산대에 붙어있는 우산살의 맨 끝부분은 이 땅에서 살아있는 우리의 몸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으로부터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산대에 우산살이 연결되듯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로 흐름을 유지하며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뒤집힌 우산의 모양을 상상하시면 좋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비유가 가리키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연결되는 길을 가리킵니다. 물론 성경에서 진리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진리란 나에게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교회와의 연관 속에서 진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말씀드린 대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연결되는 길입니다.

우산을 뒤집어놨을 때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해당하는 우산대는 진리의 기둥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교인은 각 우산살입니다. 교인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을 몸이 만나는 세상으로 보내지 않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로 보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산살이 우산대에 연결된 모양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산살이 넓게 퍼져있는 것처럼 모든 교인들은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어느 방향에 있든 우산살은 우산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교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과 연결될 때 하나님으로 이어지고 몸으로 사는 현장은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 터전이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는 교인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교인들도 몸을 통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은 몸이 놓여 있는 세상을 향하지 않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럴 때 교인의 생활 현장은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 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를 피라미드식 구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교회 조직의 개념은 결코 피라미드식 구조가 아닙니다. 이러한 편견을 머릿속에서 지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새로 시작되는 한 주간도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직장에 나가실 것이며 또 어떤 분은 가정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이라면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은 동일합니다. 직장에 있다고 마음을 직장 상사들이나 업무에 보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 있다고 마음을 자녀들이나 집안일에 보내서는 안 됩니다. 교인은 몸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은 항상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보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진리의 기둥이기에 나의 삶의 현장은 진리의 터가 됩니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설령 여행 중에 있는 사람도 교회일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도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직장과 가정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예수님께 보내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모여야 할 곳은 예배당 건물이 아닌 예수님 안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모임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조직을 이야기하자면 바로 이러한 뒤집힌 우산 구조가 연상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진리의 기둥으로 삼아서 몸이 놓여있는 모든 현장에서 우산살이 우산대에 연결되듯이 마음의 흐름을 유지하며 예수님께 닿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흘러가는 상태를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이 교인이고 이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이룸에는 나라와 인종과 문화의 차별이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계층과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교회를 이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마음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로 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교인입니다.

지난 시간에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뒤집힌 우산을 연상시키는 교회의 조직 구조는 복잡한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조직은 항상 유기적입니다. 우산대에서 떨어진 우산살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듯이, 교인은 항상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감독과 집사의 역할 또한 분리되거나 개별적일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마음을 보내는 과정 중간에 감독과 집사의 역할이 따로 존재하거나 끼어들 수 없습니다. 간단함으로 따지자면 아메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의 예배당 조직을 보면 피라미드형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회장이 있고, 장로님들이 당회원으로 존재하며, 다시 그 밑으로는 다양한 부서들이 있습니다. 또 각 부서에는 안수집사들이 있고 그 밑으로 다시 집사들이 있습니다. 평교인들은 대교구로 나눠지고 다시 그 안에 수없이 많은 구역들로 나눠져 소속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예배당 조직이 이와 대동소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피라미드식 조직에서는 교회 본연의 단순한 연결성이 깨어지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과 교인 사이에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피라미드식 구조에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직접 연결되는 대신 조직이 끼어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인 경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경건이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며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실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경건의 특징과 연관이 있습니다. 살아계신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시고, 나에 대해 알고 계시며, 나에 대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에는 언제나 지금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를 보시며 당신에게 응답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야만 지금 나를 보고 계시고, 나에 대해 알고 계시고, 나에 대한 뜻을 갖고 계신 아버지를 부르고 찾을 수 있으며, 연결되어 대화하며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있음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배우자가 앞에 있다고 해서 배우자의 존재감을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대상이 사장님이어도 마찬가지이고 대통령이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이나 다리오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앞에 있는 빌라도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느끼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이 경건입니다. 또한 경건은 좋음을 욕구함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눈앞에서 직접 본다면 좋다고 하는 어떤 가치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지고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만을 욕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이처럼 경건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지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마음을 보내는 교인과 교회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뒤집힌 우산 모양의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아메바처럼 원초적이고 지극히 단순한 조직입니다.

그리고 교인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돈 문제가 있더라도 마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돈 문제를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집니다. 돈 문제와 상관없이 제일 큰 존재감의 하나님과 대화하고, 돈 문제와 상관없이 제일 큰 좋음이신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을 가진 자로서 돈 문제를 대하기에 이에 대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경건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가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사건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습니다. 오직 영만 깨끗하고 중요하기에 육체는 부인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육체의 모습은 가짜로 보이는 모습이라는 뜻의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겨냥하여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육신으로 나타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강조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심은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어서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 또한 우리와 동일하게 공백의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다르게 마음 안으로 하나님을 항상 모셔 들이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이 땅과 하늘의 연결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육체를 입고 계셨으나 마음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상태가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에 대해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하늘에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땅에 계셨지만, 영인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상태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고 예수님 안에서는 이 땅이 마치 천국의 앞마당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체험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천국의 앞마당이 됩니다.

이어서 ‘만국에서 전파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기에 땅에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땅을 천국의 앞마당처럼 여기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 상태가 만국에서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나라와 민족과 인종과 문화가 상관없습니다. 이 마음은 육신과 육신으로 만나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보내기만 하면 예수님을 믿은바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곧 마음을 드림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크레도(credo)는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심장을 드린다는 표현을 어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영광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나의 마음도 하늘로 따라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경건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로 오셨고 그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맞닿아서 일체가 되어 계셨습니다. 이렇게 천국과 연결이 되어 계셨던 예수님이 사신 이 땅은 천사들이 살고 있는 천국의 앞마당처럼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계셨던 예수님은 만국에서 전파되었습니다. 나라나 문화나 인종 같은 것들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고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그 마음을 받아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성이신 하나님을 직면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마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듯이 앞에 모신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피라미드식의 예배당 조직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경건의 비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과정에 마음을 드리고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곧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일대일로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예배당 조직이 피라미드식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 연결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산 모양과 닮았습니다. 우산살들은 우산대와 개별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산대가 놓여야 될 위치에 피라미드식 예배당 조직이 놓여있다면 교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 홀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종교의 하나님을 부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형통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면 종교의 하나님이고 예수님도 종교의 예수님입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경건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여행을 하든 마음은 몸이 놓인 현장을 떠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예수님에 의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인이며 그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교회의 개념을 디모데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감독과 집사의 역할 또한 우산대와 우산살의 연결과 같은 원초적 조직에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조직의 임원으로 존재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모든 교인은 우산대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연결되는 우산살이어야 합니다. 감독과 집사는 이러한 연결과 마음 흐름의 유지를 돕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교회의 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마음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눈앞에 보고 있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경건함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함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경건함은 너무나 편한 일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자,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를 허락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 교회에 속한 자들로서 오늘도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우선하여 느끼고 욕구하고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경건함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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