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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만사를 하나님 손끝에서 받아 살자>의 줄거리 :
내 생활 현장에서 주어지는 모든 만사를, 관계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사물이든 어떤 문제든, 하여간 하나님의 손끝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감사하며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직접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주체가 되어서 마음으로 손대고 움켜쥐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가운데 실제로는 철저히 등지는 배교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만사를 하나님 손끝에서 받아 살자
(디모데전서 4:1~5)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의 손끝으로부터 받아 살지 않고 내가 직접 움켜쥐고 살게 되면 그 결과는 너무나 끔찍합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마귀와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배교 현상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만사를 하나님 손끝에서 받아 살자>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볼펜이나 장갑처럼 가볍게 선물로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이 물건을 내가 직접 구입하여 사용하는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물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맘에 드느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지인으로부터 정성스럽게 포장된 물건을 받았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관점에서 보게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정성들여 준비했음을 느끼며 물건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의 감사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어떤 일을 직접 움켜쥘 때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정성을 거쳐서 주어지는 선물이라면 내용이 어떠하든지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삶에 주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이와 같습니다. 좋거나 싫거나, 성공이나 실패나, 많거나 적거나, 합격이거나 불합격이거나,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먼저 붙잡으면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우회하는 일이 없기에 하나님의 손끝으로부터 받게 되는 선물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삶에 주어지는 일들을 마음으로 직접 움켜쥐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어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생겨나고 그 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성과 의미와 계획이 버려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성공을 받든 실패를 받든, 많이 받든 적게 받든, 합격을 받든 불합격을 받든, 승진을 받든 탈락을 받든, 건강을 받든 병을 받든 다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붙잡고, 하나님의 사랑 되심을 붙잡고 나면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나온 말씀이 바로 4절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소 무섭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통하여 후일에 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사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자기 확신 속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미혹하는 영’이란 마귀를 가리키고 귀신이란 마귀의 졸개들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자기 확신 속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마귀의 지시를 받고 있는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이유가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에 대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의식 상태에 대해 양심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하나님보다 사장님의 존재감을 더 무겁게 느끼고, 가정에서 하나님보다 배우자와 자녀들의 존재감을 더 무겁게 느낍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어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거 큰일 났구나! 내가 왜 이럴까?’하고 돌이키고자 십자가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화인을 맞은 자들은 스스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기에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또한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상에서 좋음을 욕구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저런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크고 작은 바람들을 계속 가지면서도 마음에 하나님이 없어서 흡입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깨우치지 못합니다. 마음의 흡입력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적용하기에 마음이 한없이 더러워지고 있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미세먼지 하나가 날아다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조금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서 일어납니다. 3절에서는 이러한 배교자들의 다양한 형태의 한 예로 혼인을 금함과 특정한 음식물에 대한 거부가 언급됩니다.
혼인을 금하는 일은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들은 육체를 더럽고 저열한 것으로 여겨서 육체와 관련된 일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결혼을 금했습니다. 한편 특정한 음식에 대한 금기는 레위기 11장~15장에 나오는 정결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11장을 보면 부정한 음식물에 대한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율법을 삶 전반에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17절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법이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명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율법을 고집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혼인을 금하는 영지주의자들이나 특정 음식물을 금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성향을 보이던 사람들은 결국 믿음을 떠난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배교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언급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주어지는 일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는 문제에서 배교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주어지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물건에 대한 관계, 상황에 대한 관계, 문제 등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되면 배교자가 됩니다.
다시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라는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붙잡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주어지는 일이 없음을 굳게 믿게 됩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잘된 일이거나 못된 일일 수 있습니다. 건강하든 못하든, 승진을 했든 못했든,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하게 믿을 때 이 모든 일들이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끝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놓칠 때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놓치면 내게 주어지는 일들에 스스로 주체가 됩니다. 나와 관련된 일을 마음으로 움켜쥐고 스스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잘못된 일처럼 보일지라도 나를 사랑하시고 알고 계시며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주어지는 일이기에 반드시 선한 일입니다. 물론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나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먼저 붙잡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하게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내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일어나게 하신 분은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을 정도의 사랑과 절대적 주권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몸에 암이 걸리든지, 장사가 안 되든지, 자녀들이 말썽을 부린다든지 하는 현상들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자 되심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 없다면 내 마음이 직접 그 일들을 붙잡고 ‘이건 잘된 것이다, 이건 못된 것이다’라고 판단하며 주권자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선물을 준 사람 앞에서 불평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과 의도와 정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까짓 게 뭐냐?’라며 불평을 한다면 선물을 준 사람과의 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탄의 가시라 별명을 붙일 만큼 지독한 지병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지병을 간질로 추측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이 간질을 고치기 위해 기도하였으나 결국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허락된 일이었기에 선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화인을 맞은 자들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에서 놓쳐버렸기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있음에 대해 조금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경각심도 갖지 않습니다. 몸의 상황에 주어진 일들을 마음으로 덥석 붙잡고 판단과 생각과 모든 말과 행동을 주체로서 해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를 영지주의자들의 결혼 금지나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특정 음식물 금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대하고, 사건을 만나고, 독특한 상황들을 마주합니다. 삶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를 주권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아버지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은 언제나 이러한 변수들에 대해 스스로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끝으로부터 받는 선물이라 생각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움켜쥐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선물로 받을 때와 직접 구입할 때의 느낌이 다른 것처럼 삶에 대해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린 패륜적인 악행의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0장 20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형들을 마주한 자리에서 고백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팔아먹은 일은 분명한 악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형들의 악행조차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늘 하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꿈으로 받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입장에서는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아넘긴 악행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많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중동 지방에 무시무시한 기근을 일으키기에 앞서 애굽에 풍년을 주셨는데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으로 하여금 곡식을 모아들이게 하셨고, 그 곡식으로 기근으로 죽어가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조차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계획과 섭리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요셉을 쓰십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고 형들이 자신을 팔았다는 악행에 집착하여 불평과 원망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떨까요?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 때도 불평과 원망을 하고 기회가 되면 형들에게 복수하리라는 앙심을 품었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은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내 생활 현장에 있게 하신 모든 것이 선하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태도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 악행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원수가 나를 미워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는 잘못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그 이유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선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 쫄딱 망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졌더라도 원수가 나를 향해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셨듯이, 모든 원수들의 비난과 악행 또한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눈에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일들조차도 선한 결과를 우리에게 주고 계심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감사란 내게 주어진 일에 앞서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붙잡을 때 나올 수 있습니다. 선물이 보잘것없어도 선물을 준 사람의 정성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삶에 주어진 그 어떤 것들이라도 나를 사랑하심이 분명한 아버지 주권의 손끝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결국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기도란 그 말씀의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과 직접 만남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받습니다. 그렇게 만난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게 되면 내게 주어지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장사가 안되는 상황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가장 좋은 방면으로 구분된 최고의 상태입니다. 장사가 안되는 상황을 직접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거룩함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선물이 아니라 내가 구입하는 상황과도 같기에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고 감사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하늘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자 지금 장사가 안되는 상황보다도 하나님의 있음이 더 먼저 느껴집니다. 장사가 잘되기를 소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럴 때 장사가 안되는 상황임에도 거룩해집니다. 최고로 좋은 상황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음에서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 깨달아 집니다.
거룩함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가장 좋은 방향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장사가 너무 안됐습니다. 그런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사귐을 이어갑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첫 번째로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첫 번째로 욕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합니다. 그러자 장사가 안되는 이 상황도 지금 내게 벌어질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로 좋은 일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신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붙잡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흡입할 수 있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상황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흡입하면 지금의 상태가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과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온 손님 중에서 한 사람도 더 올 필요도 없고, 한 사람도 덜 올 필요도 없는 최고의 상태임을 느끼며 지금 주어진 상황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금을 최고로 좋은 거룩함의 상태로 인정할 때 요셉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판 사건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사가 안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지금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로 거룩한 일이다.’라는 믿음과 확신이 생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함께 거하실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를 잃고 양심이 화인 맞아서 하나님의 주권을 놓친다면 거룩함은 임할 수 없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현장을 마음으로 직접 손대고 움켜쥐려 한다면 당장 불안이 덮쳐옵니다. 내가 움켜쥘 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에 거룩함은 사라지고 더러움이 묻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타개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나의 주체성이 극대화되기 시작합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끌어들여서 내 주체성을 위해 이용하려는 태도가 생겨납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과 예수님이 역사해주셔서 좋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마귀와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배교라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마귀와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지, 내 양심이 화인 맞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게 주어지는 상황에 감사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의 내용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기억할 때, 그 연쇄 과정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을 인정하는 기도를 통해 지금을 하나님이 주신 최선이라 생각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사를 할 수 없다면 주어진 상황을 직접 붙잡고 주체가 되어 판단하고 이런저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온 일이 영지주의자들의 결혼 금지나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특정한 음식 금지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삶에서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배교하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직면하여 하나님을 먼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가졌을 때 내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어떻게 보이든 하나님의 손끝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모든 일은 최고로 좋은 거룩함이 됩니다. 주시는 일마다 최고로 좋은 일임을 믿고 감사할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원대한 뜻을 위하여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여정이 이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굳게 붙잡고, 나 때문에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사랑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손끝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하시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 최고로 좋은 거룩함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한순간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엇이 주어질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끊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