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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경건 생태계의 파괴자 ‘재산증식심리’>의 줄거리 :
과부와 장로 그리고 노예와 상전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교회의 제도나 목회 규칙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재산증식심리' '사익추구심리'에 의해서 슬며시 지배되는 상황을 경계하시는 내용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는 경건 생태계의 파괴자임을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라이벌을 재물로 꼽으셨듯이, 실제로 경건의 마지막 방해꾼은 바로 돈이라는 사실을 천명하십니다.
경건 생태계의 파괴자 ‘재산증식심리’
(디모데전서 5:1 ~ 6:10)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에베소 교회 안에서 참 과부라고 불리는 명부에 등록된 사람들과 장로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된 취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6장 3~10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내용을 통해 본문 말씀을 더욱 명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재산증식심리’는 경건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경건 생태계 파괴에 대한 염려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5장의 과부와 장로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교회 제도나 목회와 관련된 규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참 과부’와 ‘과부의 명부’가 등장합니다. 교회에서 구제의 대상으로써 명부에 올린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당시 과부란 남편을 먼저 보냈거나 버림받아 혼자 사는 여자를 통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재정적 기반, 다시 말해 수입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교회가 결성된다면 적어도 지역 내의 과부들을 위한 구제를 우선적인 문제로 삼게 될 수밖에 없다는 형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개중에는 구제헌금을 목적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교인의 행세를 하는 과부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경계해야 함을 조언합니다. 제목에서 ‘재산증식심리’를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익추구심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이러한 심리에 의해 슬며시 지배당하고 정복당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본문을 기록하였습니다.
5장 3절을 보면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교회의 과부 명부에 오른 사람들을 존대하라는 뜻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당시의 과부는 재정적 수입원이 전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제적 존재감이 없었기에 사회적으로 무시받기 일쑤인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회상을 염두에 두고 과부를 존대하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과부를 향한 교회의 재정적 뒷받침을 염두에 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4절을 보면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하였고, 16절에서는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구제헌금으로는 참 과부 명부에 오른 이들을 도와야 하기에, 친척 중에 과부가 있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여력이 된다면 교회의 헌금을 사용하기에 앞서 개별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들에는 과부를 돕는다는 교회의 구제 방침을 이용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심리상태가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과부에 이어서 장로에 대해서도 언급이 이루어지는데 이 또한 단순히 장로의 직분이나 제도의 어떠함을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18절을 보면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교인들을 돌보는 감독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장로는 감독 중에서도 연장자로서 교회를 대표하고 교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에베소 지역 전체에 흩어져 있는 교인들을 돌보는 일의 대표였습니다. 다만 이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생업과 병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교회는 이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6장 5절을 보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함’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심리상태를 가리킵니다. 정말로 경건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심리상태를 보일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경건을 가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얼핏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다운 행동과 태도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근본적인 의도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경건을 가장하는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러한 상태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재산증식심리’나 ‘사익추구심리’에 의해서 좌우되고 지배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증식심리’는 저에게 낯선 단어였습니다. 단어의 말뜻은 쉽게 이해됩니다만, 어제 신문을 보고서야 이런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모 경제 전문지에 나온 기사의 제목에 ‘매일 새벽기도 오던 집사에게 속았다. 강남교회에서 537억 사기 구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부제를 보니 ‘하나님이 고수익을 보장한다. 기도의 힘을 믿으라. 종교적 지위로 사익추구’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기사 내용은 강남의 한 교회에서 65세 된 여자 신 씨가 교회 집사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봉사 활동과 장애인 단체의 후원에도 적극 참여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인들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신뢰를 바탕으로 교인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고수익을 보장해준다는 미끼로 투자금을 모았습니다. 실제로 투자 초기에는 약속한 대로 고액의 이자를 정확하게 지급하면서 교인들의 안심을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확고해진 신뢰를 바탕으로 더 많은 재투자를 유도하여 거액을 편취합니다. 이렇게 얻은 돈으로 강남의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았고,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자녀를 해외 유학 보내고, 명품을 구입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렇게 재력을 과시하니 교인들은 더욱 이 사람을 믿게 되었고 더 많은 돈을 투자하게 되었고 무려 537억을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 조직 안에 사기꾼이 들어와서 교인들에게 사기를 쳤다는 이야기 자체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단일 예배당 조직 안에서 어떻게 한 사람에 의해 537억의 거액 사기가 나올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예배당이 얼마나 크고 그 예배당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돈이 많았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교인들이 자기 재산만으로 투자한 것도 아니고 담보와 대출을 끼고 투자를 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부자가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검찰 관계자가 신 씨를 구속하며 입장을 밝혔는데 여기서 ‘재산증식심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보자면 ‘집사 지위를 사익 추구에 이용하고,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서민들의 재산증식심리를 악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검찰은 사기 피해자들을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서민이라고 표현했지만 예배당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상대는 모두 교인입니다. 저는 사기행각 자체보다도 교인들에게 ‘재산증식심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러한 사태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6장 9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하려 하는 자들’이란 말 그대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검찰 관계자가 사용한 ‘재산증식심리’와 일치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 모인 예배당 조직 안에서 어떻게 ‘사익추구심리’와 ‘재산증식심리’가 이토록 활발하게 성행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적어도 교회를 자청한다면 ‘사익추구심리’와 ‘재산증식심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의 모임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산증식심리’가 아닌 ‘하나님증식심리’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서 믿음은 점점 더 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많이많이 가짐으로써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하나님증식심리’나 ‘천국증식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심리가 날마다 증가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재산증식심리’는 낯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산을 늘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지 않았다면 ‘재산증식심리’나 ‘사익추구심리’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서 이러한 심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좋음 이외에 이 세상에서 다른 좋음을 추구하는 것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교회에 모이는 것이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교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문제입니다. ‘재산증식심리’나 ‘사익추구심리’는 교인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로마 교황청에 있는 교황이라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금도 교황청 지하실에는 온 세상에서 탈취한 보물들로 가득합니다. 개신교의 목사님들도 ‘재산증식심리’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경고합니다. 교회가 수입원이 전혀 없는 과부들의 생계를 돕고자 구제헌금을 하는데, 과부들 중에 구제헌금을 받고자 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5장 11절을 보면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라고 하면서 그 이유가 언급되는데,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반대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생계에 여유가 생겼다는 이유에서 게으르고 놀러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과부의 구제헌금 문제와 함께 생계비를 받는 장로의 문제도 언급됩니다. 경건을 가장하고 경건을 이익추구의 방편으로 확보하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6장 3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바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증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할 때 부활하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신 과정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도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겨있는 내용이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나타나는 일이 경건입니다. 경건이란 우리의 마음이 지상에 있던 몸을 떠나 주님을 따라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 안으로 들어간 우리의 마음이 좋음을 느끼고, 욕구하고, 소망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소망하여 가짐으로써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이 경건의 기초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경건에 대한 교훈’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소망 가운데 가진 심리상태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생활 현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가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경건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교인임을 자청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서 그리스도 말씀과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선한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가진 자로써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가지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그러한 상태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을 하지 못하기에 이러한 모습도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이 배제된 믿음은 이론의 단계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론의 단계에 머무른 사람은 스스로 생각의 중심에 섭니다. 이는 곧 내가 그만큼 교만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진 자로써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신앙을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론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일이 내 생각이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에 대해서 변론하고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상태에서 소망의 문제는 더욱 도드라집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공백이 있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은 본래 하나님을 유일한 채움으로 소망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채워지고자 합니다. 하나님도 소망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도 소망하지 않는 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돈을 소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 현장에서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고, 또한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면서 해야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경건의 기준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생활 현장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는 십자가 생활화와 경건에 주력하는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대부분 소망하는 대상은 바로 돈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십자가 생활화와 경건함에 주력하지 않는 한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론에 그치게 되고 설교도 듣고 넘어가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속의 소망이 되실 수 있는 상태에서 돈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 모이고 있는 예배당 조직 안에서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장로나 권사나 집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실제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한 싸움이 중단되고 하나님 소망이 끝나버리면 아무리 새벽기도나 철야기도에 출석하고, 아무리 예배에 경건을 가장할지라도, 아무리 성대가가 우렁차게 찬양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교회라는 예배당 조직 전체를 지배하는 기운은 ‘재산증식심리’와 ‘사익추구심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러한 사태에 대해 경계해야 함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9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남의 한 예배당의 교인들이 537억 원이라는 사기행각에 말려들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9절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장로님의 경우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분이 교육부에서 활동하셨는데 이 예배당에는 목사님의 정책에 의한 특이한 풍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육부에서 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대해 할당된 예산 이외에도 장로와 집사와 교사들이 따로 비용을 각출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님께서는 이 목사님의 정책을 따라 예배당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가 되었고 교회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목사님이 은퇴 후에 사용할 사무실과 시설 등을 요청하였는데 그 비용이 수십억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평생 목사라는 이름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은 사익 추구의 과정이었고 ‘재산증식심리’에 장악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목회였습니다.
‘재산증식심리’는 비단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장로들의 범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5장 19~20절을 보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어서 24~25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자 되려는 마음, 재정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하나님만을 가져야 하는 경건을 파괴하는 치명적 원인입니다.
경건의 생태계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선한 싸움을 해나갑니다. 선한 싸움을 할 때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은 내 마음을 하늘로 끌고 갑니다. 이러한 상황을 도식화하면 땅에는 십자가가 있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있는 구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내 마음은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내 몸은 하나님만을 소망함으로써 가능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교인들에게서 이루어져 가야 경건의 생태계입니다.
제일 위에 있는 지도자들로부터 가장 힘없는 과부에 이르기까지 ‘재산증식심리’와 ‘사익추구심리’에 지배된 상태에서 경건의 생태계는 깨지고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이름과 능력을 이용하는 변태 집단으로 전락합니다. 이러한 ‘재산증식심리’나 ‘사익추구심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보편적 경향입니다. 그렇기에 누가 누구를 비난할 처지도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해나가는 자들 전체입니다. 재산증식심리가 발동될 때마다 선한 양심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나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증식심리가 유지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선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점점 더 확고하고 크게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와 교인의 사명이자 업무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난이 아닌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서신에는 끊임없이 옳음과 그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같은 빈도로 등장합니다. 그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옳음으로 옮겨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웠다면 한 예배당 안에서 537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사기행각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기를 저지른 집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님이 날마다 강단에서 경건의 유익을 강조하고, 하나님 소망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하나님증식심리에 몰두하도록 교인들을 가르쳤다면 이러한 일은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기꾼이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배당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은 이와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부자가 되게 하시리라는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렇기에 사기꾼 집사의 기도가 재산을 증식시킨다는 설득이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진짜 사기꾼은 사기꾼 집사가 활개 칠 분위기와 영적 생태계를 조성해준 목사라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만들어놓은 영적 생태계 안에서 사기꾼들이 경건을 가장해서 새벽기도에 출석하고 봉사와 충성에도 열심을 기울입니다. 동시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이러한 모습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분위기의 예배당 조직은 경건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악령에 의해 지배되는 곳일 뿐입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누구를 향해 비난의 돌을 던질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발등의 불을 끄기도 바쁜 형편의 죄인들입니다. ‘재산증식심리’와 ‘사익추구심리’로부터 온전히 십자가를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