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마음으로 가지기 몸으로 가지기>의 줄거리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은 영원한 삶을 굳게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미루지 말고 오늘 여기서 영생을 굳게 붙잡으라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한 싸움은 믿음의 경기에서 우승하도록 애쓰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경기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많이 가지기 경쟁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하나님 가지는 법을 알아야 믿음의 경기에서 이기고 영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으로 가지기 몸으로 가지기
(디모데전서 6:11~21)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영생은 육체가 죽은 다음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지금부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살려면 하나님 가지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가짐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가지는 법과 몸으로 가지는 법입니다. 마음으로 가지는 법을 우리는 흔히 소망, 희망, 바람, 소원 등으로 표현합니다. 몸으로 가지는 법은 육체의 차원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건강, 형통, 승진, 합격, 인기, 명품 같은 것들은 사람들이 소망하고 희망하며 마음으로 가지는 대상입니다. 젊은이들 같으면 멋진 이성 친구도 그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 몸으로 가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소망하고 희망함으로써 마음에 가지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가지게 되는 대상 중에서 몸으로까지 가지게 되는 대상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못 가지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마음으로 가지기를 비교적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야 무엇인들 못 갖겠는가?’라고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이 ‘이 사람아, 주제를 알아야지. 뭐 그렇게 허황된 말을 하느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소원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아니, 나는 바라지도 못해?’라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대화는 우리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으로 가지기는 그렇게 쉽게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서 희망의 형태로 가지는 일을 몸으로 가지는 일과 똑같은 무게로 취급하십니다. 몸으로 가지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가지는 일도 가진 것으로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7~28절에서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육체로 갖지 않으면 갖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만 가져도 육체로 가진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을 가지기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몸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빛이시고 영이십니다. 15절을 보면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가 이르면 우리 육체의 차원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께서 실제로 볼 수 있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은 곧 가지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이 복되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좋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유일하신 주권자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이시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16절을 보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곧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모든 것들은 그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에는 없어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셨듯이 하나님이 없애시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기에 죽음과 무관하십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빛이시고 영이심이 강조됩니다. 이는 곧 지금 육체의 몸으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없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기약의 때가 이르러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육체의 몸을 벗어나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을 몸으로 가지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문제는 지금 육체의 몸으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 가지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으로 가지는 것뿐입니다. 마음으로 가지기가 소망이고 희망이고 바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또한 오직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은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소망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관심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7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지기에 대비시킬 수 있는 대표적 예로 재물이 언급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마음으로 가졌을 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에게도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에는 재물을 실제로 가진 부자도 재물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기에,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재물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몸으로는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마음으로는 재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재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가지게 된 모든 것들을 마음으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떠올려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한 과정에서 사라를 두 번이나 버립니다. 아내에게 소망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똑똑해서 자기 일을 잘해나가는 자녀를 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모도 몸으로 가진 자녀를 마음으로까지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녀에게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가짐은 채워짐에 대한 기대와 연관이 있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들 중의 대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라이벌로 재물을 꼽으십니다. 그만큼 돈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가지고 싶어 하는 이 세상의 대표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의 마지막에서 사도 바울은 재물을 언급함을 통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며 소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망의 문제를 통해서 선한 싸움과 경건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세상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한편 다시 17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정함이 없다 함은 헛되고 순간적이며 영원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전서 1장 24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가치들은 없어질 것에 불과하기에 마음으로 가질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대표로 재물을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우리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육체의 몸으로는 가질 수 없는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져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마음으로 가져야 할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기를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마음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가치들은 몸으로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진다면 재림의 때에 신령한 몸으로 하나님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가진 마음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해 나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소망하여 가지고 싶어 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만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함 없게 주시는 분이심을 느낄 수 있고, 이 세상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몸으로 가지는 것은 재림 때가 이르러 신령한 몸으로 바뀐 뒤에야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질 수 있고 그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전제를 통해 디모데에게 전하는 당부가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 1장 18~19절을 보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서 선한 양심으로 싸우는 선한 싸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선한 양심이란 마음의 청결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접하는 세상 것들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싸울 수 있어야 하며, 이 싸움이 없으면 믿음은 세상에 정복되어 파선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선한 싸움은 원문을 보면 앞서 언급된 선한 싸움과는 뜻이 다릅니다. 운동선수가 우승을 향해 달려가듯이 경쟁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많이 가지기에서 우승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빛이시고 영이시라 하였고 그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주체성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다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마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우승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선한 싸움입니다. 하나님 가지기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가지기 시합에서 일등 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마음으로 많이 가지기 위해 애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어서 ‘영생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은 죽은 뒤에 사는 아니라 지금부터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한 삶을 살지 못하면 죽은 뒤에 구원도 없습니다. 영생의 반대말은 영원히 멸망 가운데 사는 영멸입니다. 생명과 멸망의 차이는 살아있는 기쁨과 만족에 있습니다. 영멸은 어떠한 기쁨이나 만족이 채워짐 없이 영원토록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생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가 주어졌고, 영생을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니 이 기회를 꼭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영생은 우리의 힘으로 좇고 추구하여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어진 영생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의 기회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며 유일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 영원한 기쁨과 만족으로 채워지는 영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5절을 보면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이 모두 언급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소망의 대상으로 붙잡게 됩니다. 이 붙잡음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은 마음으로 가지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무엇을 갖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멸이 갈라집니다. 마음으로 돈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자녀의 형통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든 자녀의 형통이든 결국 내 몸이 죽으면 다 없어질 이 세상에 국한된 일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이 다 없어질 것들이기에 그것을 마음에 가지고자 한다면 영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 몸조차도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세상의 가치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마음에서 그 없어질 것들 중에서 무엇인가를 바라고 소원하고 있다면 마음으로 가지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없어질 것으로 마음의 가지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격도 영멸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에 마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마주하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늘 의식하면서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세상 것을 가지고자 할 수 없으므로 영멸을 벗어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함을 통하여 세상 것을 소망할 수 없게 됨으로써 영멸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것을 전혀 마음에 갖지 못하더라도 아쉬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이 소망의 대상이 되시면 마음으로 하나님 가지기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진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 순간부터 영생은 시작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을 가지고 오늘부터 영생을 사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에 19절까지 선한 싸움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들을 언급합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자면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면 생명을 취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그러한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가지기를 할 때 내게 주어진 재물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은 마음으로 가질 대상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의 재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재물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이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내게 주어지지 않은 재물에 대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지금 내게 주어진 재물에 대한 죽임이기도 합니다.
주어지지 않은 재물에 대한 죽음은 마음으로 가지기의 중단이고, 주어진 재물에 대한 죽음은 모두 다 하나님 뜻의 재료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진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미 영생을 사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진 만큼, 내게 주어진 재물에 대해서 너그러워집니다. 마음으로 돈을 소망하지 않기에 마음은 돈과 분리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매인만큼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보화 되시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갖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만큼 하늘에 쌓이게 됩니다. 이것이 터를 쌓는다는 표현에 담긴 뜻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가지기를 해도 하늘로 올라가는 마음의 양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운동선수가 우승을 향해 달려가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누가 더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느냐는 경주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골조를 만든 후에 콘크리트를 붓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콘크리트가 흘러가서 점점 더 차오르며 건물터가 만들어집니다. 내 마음은 콘크리트를 붓는 레미콘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지려고 마음을 하늘에 부으면 부을수록 내 마음의 터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졌음은 증명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를 점검하고 싶다면 재물을 위시하여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내 마음이 얼마나 너그러워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 것을 꼭 붙잡고 있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가치들과 거리를 두면서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론으로는 압니다. 하나님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 것을 붙잡는 마음이 강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붙잡는 마음의 손아귀 힘이 강하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만 보더라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다른 이성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린다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만 가져도 이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은 점점 없어지게 됩니다. 몸부터 시작해서 재물에 이르기까지 관심이 없어진 세상 것들은 하나님 뜻의 재료가 됩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가지고 몸으로 가집니다. 우리가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영생을 사는 길은 육체로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는 육체로 가지고 있는 것들조차도 마음으로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마음도 죽게 됩니다. 내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가지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가질 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물에 이르기까지 마음에서 멀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사용됩니다.
지금 육체의 몸으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육체로 하나님 갖기는 예수님의 재림 때 신령한 몸을 입으며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지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오늘도 영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세상 것을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랍니다. 오직 마음은 하나님 가지기에 다 쓰여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아버지 뜻의 재료로 쓰임과 동시에 영생을 시작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영생으로 산 자에게만 육체가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오늘도 영생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가지기 위하여 세상 것을 가지려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가지기가 중단 없이 진행됨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터가 생길 정도로 쌓이게 하여 주시고, 그럼으로써 오늘을 영생의 첫날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