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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2

녹취문:하나님을 온몸으로 부인하는 교인_태승철 (디도서 1:1~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5.15|조회수7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을 온몸으로 부인하는 교인>의 줄거리 :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하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데 온몸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레데 교인들 중에 다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이런 사람들을 위로, 격려, 용납하는 대신에 엄하게 책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온몸으로 부인하는 교인

 

(디도서 1:1~16)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12.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13.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16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교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은 하나님을 시인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온몸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디도가 목회하던 그레데의 사람들에게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입으로 시인하는 하나님을 온몸으로 부인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 참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자면 지금 이 시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서바나 전도에 이어서 로마 동쪽 지역을 방문했을 때 기록된 서신입니다. 마치 에베소에 디모데를 남겨두었던 것처럼 그레데 섬에는 디도를 남기고 마케도니아로 향했습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디모데전서를 기록했고 직후에 디도서를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고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레데 섬은 지금의 튀르키예인 소아시아 지역과 그리스 반도의 삼각형 꼭짓점의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현재는 크레타 섬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레데 섬은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상당히 컸기에 섬 안에는 여러 성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은 일을 정리하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기 위해 디도를 남겼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장로와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장로는 복수로 되어있고 감독은 단수로 기록된 것을 보자면 각 성의 장로들을 뽑고 그들 중에서 다시 우두머리 격의 인물을 감독이라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감독과 장로를 다른 용어로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장로는 교인들을 대표하는 연장자를 가리키는 용어라 할 수 있고, 감독은 장로에 해당되는 연장자들이 하는 직무의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장로와 감독의 조건을 나열하며 선정할 것을 요구한 이유는 그레데의 사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에 있는 교인들을 심히 책망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고자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지만, 당시 그레데 사람들의 특성을 잘 드러낸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에서 일곱 명의 현인으로 불리던 사람들 중에는 그레데 출신의 에피메니데스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피메니데스가 남긴 6행시를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그레데 사람들의 성향을 언급합니다. 그 내용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느끼기에 이러한 특징이 그레데의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활성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짓말쟁이를 헬라어로 크레티조(Κρητίζω)라고 하는데 바로 ‘그레데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그레데 사람들의 평판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용례로 코린티아조마이(Κορινθιάζομαι)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린도화하다’라는 뜻으로써 성적으로 극히 문란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악한 짐승은 직역하면 광포한 맹수라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키는 사람들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이어서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고 했는데 이는 육체적 쾌락 외의 다른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현인이라 불리던 에피메니데스의 그레데 사람들의 평가를 인용하며 디도에게 이들을 엄히 꾸짖어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레데 섬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복음을 왜곡시키는 거짓 교사들 또한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주의적인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교인들로서 할례파라 불렸습니다. 할례파, 율법주의, 유대주의 성향이 위험한 이유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행위를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임을 자처하지만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거짓말쟁이이며,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며,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레데 사람들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레데 교인들은 그야말로 영적 난장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을 도저히 그대로 남겨둘 수 없다고 느꼈기에 디도를 남깁니다. 그리고 성마다 장로들을 세워서 믿음도 아니고 교인도 아니게 된 그레데 교인들을 책망하고 훈육하고 가르치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디도서가 기록된 취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영적으로 난장판이 된 그레데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가르치고자 했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핵심은 1~2절을 통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으로 정리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교인들이 영적 난장판에 빠진 이유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믿음을 제대로 갖지 못했기 때문이고,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을 갖지 못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리의 지식이란 단순한 앎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야다(ידע)가 아담과 하와가 연합하여 알게 되었음을 가리키듯이, 진리의 지식이란 이론적 앎이 아니라 진리와 연합하여 체험적으로 알게 됨을 가리킵니다. 진리와 연합하여 사는 삶이 곧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영적 난장판의 처방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진리의 지식을 갖게 하며, 영생의 소망을 갖도록 해줘야 함을 디도서를 통해 이야기해 줍니다. 장로들과 감독의 선출 또한 바로 이 일을 위한 준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엄히 책망할 수 있어야 함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책망이란 단순히 야단을 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쫓아내는 출교에 준하는 처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강경한 처분이 언급되는 이유는 교인의 마음가짐이 아닌 상태에서 교인을 자처하는 일이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교인임을 인정해 주는 동안에는 고칠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출교를 통해 교회 바깥에 내팽개쳐질 상황을 마주한다면 스스로 진리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이것은 그레데의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주변의 기독교 종교인들은 모두 책망과 출교의 대상이 됩니다. 동료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세상 살기가 힘든데 그래도 예배당에 나온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이라면 책망 받아야 될 대상에 속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위로와 격려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회자라면 오래 참음으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교인이란 바로 진리의 기준을 갖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를 책망하는 교인들에 대해 목회자는 위로하고 격려해 줄 수 있으며 오래 참음으로 양육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 없고, 진리의 지식도 없고, 영생의 소망도 없는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며 교인을 자처하는 자들은 교인일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온몸으로 부인하는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예배당에 출석하지 않게 될 상황을 각오하고서라도 심각하게 꾸짖고 엄히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책망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격려나 위로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 진리의 지식, 영생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의 아들들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통해 실현되어 갑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물에 잡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태초에 예정하신 계획은 수행되어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셨음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아가지만,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갖는 믿음의 명확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 특징이란 마음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남아서 마음 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든 신앙적 가르침은 다 거짓말입니다. 세상에 남아서 무엇인가를 도모하고자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개선하고 세상을 가지고 세상에서 이루고자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을 가진 자라면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며, 뜻하고 추진하는 주체성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기에 예수님을 통해 택하심을 받은 자들 또한 세상에 속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온 자들은 예수님 나라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 나라에 머무는 동안 진리의 지식을 알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지식이란 이론적 지식이 아닌 연합을 통해 알게 되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란 생활 현장에서 내가 연합해야 되는 대상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 있으면 진리와 연합하게 됩니다. 또한 진리란 잠시라도 나의 인격과 분리되거나 틈새가 벌어져서는 안 되는 대상입니다. 이 진리의 내용이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의 정의를 분명히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의를 잊어버리면 나와 진리 사이에 틈새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진리의 정의는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진리란 생활 현장에서 연합해야 할 삼위 하나님입니다. 중요한 것은 연합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신학적 이론이고 성경 공부에 머문다면 진리일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내가 생활 현장에서 연합해야 할 대상입니다.

진리와의 연합은 일인칭, 이인칭, 삼인칭의 영역에서 모두 일어납니다. 일인칭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해서만 산 자라는 자아의식이기도 합니다. 이인칭 영역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상대자로 삼게 됩니다. 내 상대자는 배우자도 아니고 자녀도 아니며 부모도 아니고 직장동료도 아닙니다. 사람 이외의 일이나 문제도 나의 상대자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에게 있어서 당신이십니다. 그럴 때 몸의 삶은 삼인칭 영역이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 혹은 그녀가 사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고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주체성이자 손이 되셔서 내 몸을 장갑으로 끼시고 살아가시기에, 내 몸으로 살지만 성령님이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와의 연합을 이룬 삶이 아니라면 교인을 자처할지라도 거짓말쟁이, 광포한 짐승,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의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는 오직 육체의 오감에서 기쁨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는 곧 교인을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오감을 통해 포착되는 일에 열심을 부리고 근면하고 부지런할지라도 교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의 상태입니다. 일평생을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밤 열두 시까지 일하는 삶을 살았다면 주변에서는 부지런한 사람이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일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입니다. 진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움직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지 않고 오직 육체의 오감을 통해 붙잡을 수 있는 세상적인 만족만을 위해 일했다면 육체의 쾌락을 위한 삶이고 영적으로 게으름뱅이의 상태입니다. 그렇게 유익을 위하는 자들 중에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바로 그레데 교인들의 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로부터 영생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레데가 영적인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유는 영생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는 영원하지 않은 것은 바라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건강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가지고 진리와 연합한 사람은 절대로 건강을 바라지 않습니다. 건강은 하나님 주권에 위임할 일입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도 영원하지 않기에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영원한 일이 아니기에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영생의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생에 대한 소망이 중단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이 구절의 맥락이 영생에 대한 소망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 온전히 믿음을 지킨 교인들은 마케도니아 지방의 빌립보 교인들과 데살로니가 교인들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이들에게 구원을 이루라 요청합니다. 이는 곧 영생에 대한 소망을 이루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 영생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천국이라는 영원한 삶의 처소가 소망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처럼 소망을 받았다면 이제 받은 소망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받은 소망을 내 소망으로 가지라는 뜻입니다. 소망의 성취는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출근할 때 갖는 소망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직장에 있다고 해서 승진을 소망한다면 그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승진을 소망하면서 직장에서 일을 한다면 그것은 온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직장은 영적인 난장판이 되어버립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형통을 소망할 때 가정은 영적인 난장판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이어감으로써 영생의 소망을 갖고 유지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전하는 이 순간에도 살아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이 천국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 천국을 끊임없이 의식 속에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천국이 사라진다면 영생의 소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바라는 일을 의식 속에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천국을 소망한다면 의식에서 놓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란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차선책입니다. 천국에 가겠다고 내가 나를 죽일 수는 없기에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불가피한 차선책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이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직접 체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있는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온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교인을 자처할지라도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그레데의 교인들처럼 영적 난장판이 형성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천국의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천국에서 마감됩니다. 천국에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나를 내려다보시는 예수님과 교통하고 싶고 연합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천국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렇게 천국을 소망하는 자가 의식에서 천국을 놓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생의 소망을 가졌다면 마음에서 천국에 대한 바람을 소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교인이 천국을 죽은 다음에나 갈 곳으로 여깁니다. 그러는 동안 의식 속에서 천국에 대한 바람은 고사 상태가 됩니다. 마음에서 영생의 소망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 천국 자리에 온통 세상 것에 대한 소망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은 무당이 칼춤을 추듯이 영적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다 잘라버립니다. 혹은 세상일을 위해 하나님을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바로 이러한 모습을 지적하며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세상 것을 소망함으로 더러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더러워집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다면 예수님이 계신 천국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 세상 것들을 마주할 때는 세상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더러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마음이 하나님 대신 세상 것을 소망하면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도 더러워지게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관계하는 모든 일이 더러워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영적인 난장판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디도를 남겨둡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를 하는 디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편지를 보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과 디도와 장로들과 감독이 공통으로 가져야 할 세 가지 요소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은 확고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영적인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교인들에 대해서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스스로 확인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인 난장판을 벌이며 입으로만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님, 나의 성령님을 부르면서 온몸으로 부인하며 살았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마음먹게 하셨으니,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며 책망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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