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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2

녹취문: (S) 멋짐의 전제 조건, 말려들지 않기_태승철 (딛 3:3~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5.22|조회수3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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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멋짐의 전제 조건, 말려들지 않기>의 줄거리 :

그레데 섬의 사역자 디도에게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선한 일에 힘쓰게 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이 보실 때 멋진 일입니다. 멋진 일로 채워진 멋진 삶을 사는 멋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말려들지 않아야 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보이고 들리는 등 오감을 통해 접하는 세상 것들에 마음이 말려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바로 자기 객관화입니다.

 

 

멋짐의 전제 조건, 말려들지 않기

 

(디도서 3:3~15)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레데 섬의 사역자 디도에게 보내는 마지막 당부입니다. 이 당부에는 특별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절을 보면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라는 표현이 등장하였습니다. 한편 오늘 살펴본 8절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또 우리가 읽지 않은 14절에서도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라는 번역 또한 ‘선한 일’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는 선한 일에 힘쓰게 하라는 당부가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한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18장 18절을 보면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이 특이합니다. 1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으로부터 선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뜻과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동기나 이유에서 나온 말과 행동이든 선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자에게서 선함의 열매는 맺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선한 일의 이해를 바탕으로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함이란 영어로는 Good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여기에서 좋았다는 표현 또한 Good입니다. 선한 일은 그저 보고서에 기록할 때 사용하는 무미건조하고 객관적인 분위기의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야! 멋지다!’라고 감탄하시듯 주관적인 반응이 담겨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기에 아주 좋은 대상을 멋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야! 멋지다!’라고 감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해야 하는 선한 일의 성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승철이 멋지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선한 일을 힘쓰라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보고 계심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너, 참 멋지다!’라고 감탄하실 수 있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멋지다고 하실 때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앞서 선한 일이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뜻과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나무 한 그루가 하나님이 보실 때 멋진 이유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과 생각이 고스란히 전달된 모양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게 되는 과정은 사뭇 다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이루려 할 때는 소나무와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소나무와는 다르게 인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가지 과정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나의 뜻과 생각을 부인함으로써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나타날 수 있고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한편 바로 이렇게 인격적으로 나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게서 나타나는 선한 일을 감탄하실 만큼 좋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고 받아들여져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실 때는 소나무를 보실 때 나오는 감탄보다 몇 배나 더 강한 감탄을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기대하며 선한 일을 힘쓰게 하라 당부합니다. 사역자가 해야 하는 일은 교인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보고 계시는 중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 참 멋지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욥기 1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야! 욥 멋지다!’라고 감탄하시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자에게 원하는 것은 무릇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실 때 ‘너, 참 멋지다!’라고 감탄하실 수 있는 자들이 되도록 도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반성하게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멋지다고 하실만한 일이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악한 일만 나올 수밖에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3절에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선한 일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의 오감이 있습니다. 눈이 보기에 좋은 것, 귀로 듣기에 좋은 것, 코로 냄새 맡기에 좋은 것, 입으로 먹기에 좋은 것, 손으로 만지기에 좋은 것을 따라 좋음을 추구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할 수 없게 합니다. 오감을 통해서 좋은 것을 추구함이 문제인 이유는 주체성 때문입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말려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의식과 욕구가 세상에 말려들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전해질 수 없고 선한 일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야! 멋지다!’라고 하시는 대신 ‘야! 악하고 더럽구나!’라고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타락했다지만 어떻게 저렇게 괴물같이 될 수 있는가!’라고 완전히 반대 방향의 감탄을 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음이 육체의 오감으로 대하는 세상에 말려들기 때문입니다.

본문 4~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접하는 세상에 말려들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고 더럽다는 감탄밖에 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역사하심을 통하여 마음이 세상에 말려드는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본문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자면 구원이란 이 세상에 말려듦으로부터 빠져나옴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 하나님이 멋지다고 하실 수 없는 상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4절을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핵심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유일한 상대자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내어주시는 것보다 더 큰 자비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5절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자비와 사랑으로 스스로를 내어주셔도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말려들어서 더럽고 추악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깨끗하게 씻기고 다시 태어나서 세상의 말려듦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6~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다시 태어날 때 성령이 임하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세상보다 더 우선적인 상대자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몸이 성령님의 장갑이 되어서 선한 일을 해나가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외출 나오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써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몸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좋게 여기시며 ‘야! 멋지다!’라고 감탄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8절을 보면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가르쳐주며 굳세게 말하라 요청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여러 것’이란 쉽게 말해 이제까지 강조해 온 영적인 사실들을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시며 빛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내게 상대자로 내어주셨다는 사실, 그 하나님과 상대하고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오셔서 내 몸을 장갑 삼아 살아가신다는 사실들을 굳세게 말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제공된 이러한 영적인 사실들을 굳세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실들이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레데 섬의 교인들만 보더라도 유대 율법주의적인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레데 사람들 특유의 성향이 합쳐져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제공된 영적 사실들을 의식함은 중단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출신의 에피메니데스라는 인물이 남긴 6행시를 인용하며 1장 12절에서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레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세상일들에 대해서만 마음이 반응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세상 것들의 자극이 오감을 통해 마음에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감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영적인 사실들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 주님의 십자가 사건, 성령님의 임재, 이 모든 일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일들에 마음이 모조리 말려들어 간 상태에서는 이러한 영적인 사실들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기준은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만을 있다고 의식하는 중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을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오감은 넓은 관문입니다. 이 넓은 관문을 통해 세상 것들이 끝없이 홍수처럼 밀려들면서 마음을 말려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영적 사실들을 굳세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누군가는 영적 사실들에 대해 굳세게 말해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있음이고 분명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가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고, 하나님께 갔을 때 선한 일이 나타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사실들에 대해서 굳세게 말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들을 보존해 갈 수 없다면, 보이고 들리는 세상 것들에 마음이 말려드는 사람들의 의식은 세상에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지독하게 악하고 더럽고 괴물 같다는 감탄사 밖에는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8장 24~25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제시하는 대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입니다. 보이는 것들에게 의식을 빼앗기면 마음도 보이는 것들에게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계하는 믿음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통치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를 쓰고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 만져지는 것들에 내 마음이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말려들면 3절에서 언급된 온갖 추악함이 내 안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지독하게 더럽고 악하다. 지독하게 나를 배반하는구나. 지독하게 흉물스럽구나.’라고 감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은혜로 주신 모든 영적인 사실들을 생활 현장에서 의식 안에 보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들을 의식 안에 보존할 수 없다면 마음은 보이는 세상에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일은 선한 일이 아닌 악하고 추하고 괴물 같은 일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디도를 향해 선한 일을 힘쓰게 하고 선한 일이 나타나게 하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빙산은 십분의 일만 겉으로 나와 있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바다에 잠겨있습니다. 선한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십분의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십분의 일을 드러내게 하는 십분의 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8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장에서는 ‘신중하라’는 표현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본문의 ‘조심하여’라는 표현은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무엇에 신중하고 조심하라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너, 참 멋지다!’라고 감탄하시는 선한 일을 위해서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모든 생활 현장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풀면 어느 틈엔가 세상에 말려들고 맙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도, 좋음을 욕구하는 바람도, 주체성도 보이고 들리는 세상일에 말려들지 않도록 모든 생활 현장에서 신중하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일단 말려들면 선한 일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제공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무슨 일을 할 때 ‘내가’라는 말을 합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은 내 몸을 포함합니다. 내 몸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혹은 ‘나’라는 말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자아의식에 내 몸이 포함되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을 포함해서 나로 여기기 때문에 몸으로 만나는 것들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믿음이 요구됩니다. 내 몸을 포함해서 자연스럽게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의식이 깨지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내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상황을 깨뜨려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살아있는 몸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포함하여 ‘나’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의식은 세상에 말려들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두 손과 두 발에는 못 박히시고, 허리에는 창을 찔리시고, 온몸이 채찍에 맞아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라고 고백합니다. 그럴 때 ‘나’라는 자아의식에서 내 몸을 자동적으로 포함하는 일은 중단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의식이 이 세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몸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몸으로 대하는 환경과 조건에 대해 말려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려들면 선한 일은 끝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멋지다고 하실 수 있는 상황은 끝나버립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내 몸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신 뜻과 생각이 있습니다. 그 뜻이 내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이 내게서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보실 때 ‘너, 참 멋지다!’라고 감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활 현장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자아의식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라고 말함을 통해서 정해져야 합니다. 이것을 반복해서 시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꾸 해봐야 바뀔 수 있습니다. 이론으로만 듣고 ‘다 맞는 말이다.’라고 수긍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깨달은 사실을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로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고 고백하면서 배우자를 마주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고 고백하면서 밥도 먹고 전철도 탑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보면서 나의 자아의식을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다면 ‘나’라는 말에는 반드시 내 몸이 포함될 수밖에 없고 세상에 말려들게 됩니다. 말려듦의 문제는 바로 ‘나’라는 자아의식에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의 몸이 포함된 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은 몸이야말로 ‘나’입니다. 내 마음이 죽으신 예수님을 입어야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이 내가 될 수 있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나, 부활한 나, 승천한 나, 보좌 우편에 있는 나의 자아의식은 오직 예수님을 계속 바라볼 때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식을 가질 때 드디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만 이 땅에 있는 몸에 성령님이 오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외출 나오신 분이십니다. 그 성령님에 의해서 선한 일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야! 멋지다!’라고 감탄하실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내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뜻하고 생각하신 일들이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감탄사를 유발시키는 것이 우리 인생의 성공입니다. 오늘 하루의 성공은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야! 멋지다!’라는 감탄사를 유발시키느냐에 인생의 성패가 달렸습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방에서 거실로 나가면 식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조차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하며 식구들을 마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몸을 포함한 자아의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몸을 포함한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외출 나오신 성령님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살아계심은 분명한 영적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일상생활 속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날마다 써먹을 수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야! 멋지다!’라는 감탄사를 끌어낼 수 없는 실패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 모두가 다 멋진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멋진 삶을 위한 모든 조건을 준비하시고 제공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적인 은총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반복하여 줄기차게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멋지게 여기시며 감탄하시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렁이 같은 우리에게서 멋짐을 기대하시는 그 사랑에 부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어떤 생활 현장에 처하든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은총으로 제공해 주시는 모든 영적 사실들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에 말려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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