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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분 사회와 계층 사회 속 예수님 믿기>의 줄거리 :
빌레몬서의 내용은 파격 그 자체입니다. 로마 시대 당시 도망친 노예는 잡아 죽이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도망쳤던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용서할 뿐만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이고 더 나가 복음을 위한 사역자로 인정하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요청입니다. 개인에게 일어난 문제이지만 당시 신분 사회와 계층 사회의 질서 자체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혁명적인 제안입니다. 어떤 형태의 사회든 복음은 이런 혁명적 성격을 띠고 전해집니다.
신분 사회와 계층 사회 속 예수님 믿기
(빌레몬서 1:1~25)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의 1차 투옥 시기인 62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61년부터 63년까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의 스페인인 서바나 지역과 튀르키예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도 활동과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64년 이후에 시작된 본격적인 박해로 인해 2차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1차 투옥 시기인 61~63년 사이에 기록된 서신을 순서대로 말하자면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입니다. 흔히 이 네 서신을 옥중서신이라 부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빌레몬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전도할 때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자기 집을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빌레몬은 믿음도 있고 평판도 좋았으며 경제적 여유도 있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본문에는 빌레몬 이외에도 오네시모라는 인물이 거명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안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재산을 훔쳐 도망친 범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쳐 와서 사는 도중에 로마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의 신분이었던 사도 바울을 알게 됩니다. 당시는 아직 박해가 심각하지 않았기에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비교적 여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어떤 경위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사건은 빌레몬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이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오네시모는 로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할 때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진 골로새에 있던 빌레몬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추측됩니다. 2차 전도여행 때로 보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까지 마치고 또 다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로마에 있던 오네시모를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얼마나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충실했는지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동역자라고까지 이야기했고, 로마 전도를 위한 사역자이자 심복으로써 곁에 두고자 했습니다.
다만 당시의 로마법에는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다 붙잡히면 사형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사도 바울에게 자신이 골로새에서 노예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오네시모의 주인이 사도 바울이 잘 알고 있던 빌레몬이라는 사실도 드러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빌레몬은 지역 내에서 믿음도 있고 평판도 좋았으며 경제적 여유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빌레몬이 교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선한 일이 나타남으로써 사람들이 빌레몬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향할 계기를 얻게 되었다는 언급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 회복을 바라며 빌레몬서를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며 복음의 사역자로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사람임을 밝히며 빌레몬에게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여길 것을 요청합니다. 더 나아가서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여겨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다만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요청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강압에 못 이겨 요청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복음을 받아들인 자로서 이러한 요청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기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오네시모가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사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성숙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오네시모를 노예로 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과 하늘나라를 위하여 사역자로 쓰고자 합니다. 이에 빌레몬도 자발적으로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 2절을 보면 오네시모 외에도 압비아와 아킵보라는 인물들이 언급되는데,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빌레몬서의 내용은 무척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이 파격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나타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빌레몬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혁명적인 파격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신분 의식이나 계층 의식은 완전히 타파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하는 내용은 요즘 상황에 비유해도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재벌가의 자제가 가난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입니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의 집에서 30년 동안 가사도우미를 하신 분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분이 가사도우미를 하며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으며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재벌가의 딸이 우연히 좋아하게 된 사람이 바로 가사도우미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 못 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고 집안에 엄포를 놓습니다. 이제 재벌가 회장님과 사모님은 30년간 부린 가사도우미를 사돈으로 두게 생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제가 재벌 총수라도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벌 회장님과 사모님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러한 일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하다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빌레몬에게 요청되는 상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빌레몬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도망친 오네시모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엄청난 테스트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가름 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주인이 노예를 부리는 일은 죄의식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 외에도 다른 충실한 노예들이 다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필이면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친 노예를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에서 형제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복음의 사역자로 여겨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레몬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여길 수 없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니 더욱 난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빌레몬의 처지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식구들이 가사도우미를 쫓아내고 아들을 구박하면 못된 사람들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욕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 입장이 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벌 총수의 입장이 되면 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주시려는 은혜가 재벌 총수의 재산이나 사회적 위치 같은 것들은 휴지로 느껴질 정도로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주시려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마음이 붙잡고 있는 재벌 총수의 자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은혜는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 것은 결국 노예의 주인이라는 신분을 버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이것은 강압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서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신분 따위는 휴지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육체의 몸과 마음이 합쳐진 상태로 사는 세상 나라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 관문을 통과하여 세상 나라를 벗어나 예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때 마음이 육체와 붙어있던 상태가 죽고 마음만 십자가 관문을 통해 빠져나가게 됩니다. 내 몸에서 떨어진 마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몸으로 입은 마음에서는 보좌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의식이 생겨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와 마음이 붙어있는 상태의 죽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일어나는 장소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붙어있는 상태가 죽는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의 신분 의식과 계층 의식이 모두 깨어져 나감을 의미합니다. 신분 의식이나 계층 의식은 고깃덩어리인 육체에 얹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육체를 십자가에서 벗어버리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되면, 내 육체에 얹혀 있던 신분 의식과 계층 의식 또한 타파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남자나 여자라는 가장 기본적인 신분 의식조차도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신분사회를 옛날 일로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오품 이상의 귀족 계층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지방의 향리를 비롯한 중류층이 있었으며, 양민들이 있었고, 천민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후반기로 들어오면서 신분 상승과 계층 상승이 시대적 흐름을 이루게 되면서, 천민 중에서 돈을 주고 양반의 신분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만 이러한 신분 상승과 계층이동의 욕구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의 꿈이 신분 상승이고 계층이동입니다. 2011~2021년의 자료를 보면 지난 10년간 한국의 중산층 비중이 60%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계층이동에 대한 기대는 줄었고, 자녀들의 계층 간 이동에 대한 기대감 또한 10% 이상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다만 10% 줄어든 것은 부모가 생각하는 자녀들의 계층이동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 현상, 출산 기피 현상이 시대의 흐름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결혼이 신분 상승이나 계층이동의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배우자를 통해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여겨지기에 결혼에 소극적이 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정해진 계층과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자녀를 낳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제도를 통해 신분과 계층이 정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재력과 학벌과 인맥 등의 인간 세상이 정한 가치를 기준으로 보이지 않게 신분과 계층이 정해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도 노예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낮은 계층의 젊은이들은 아이 또한 낮은 계층에서 살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계층이동의 기대가 없기 때문에 자녀도 낳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낮은 계층인 것도 억울한데 내 자식까지 낮은 계층인 꼴은 못 보겠다는 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나 하나 편하게 살고, 오감이나 충족시키면서 살다가 인생 마감하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편만해지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몸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신분 의식에 우리 마음이 매인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세상 나라에서의 신분 상승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신분 상승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신분과 계층이동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 나라의 신분 사회와 계층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분 상승, 진정한 계층 상승은 영원한 신분 상승, 영원한 계층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보다 빌레몬이 살던 시대는 신분과 계층에 대해 더욱 닫혀있었습니다. 도망친 노예는 잡아다 죽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도망친 노예를 사도 바울과 같은 사역자로 대해야 하는 요청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파격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이 세상 나라의 풍습과 관습과 제도와 규칙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내 마음이 파격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지가 진심으로 예수를 믿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내 마음 안에서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확인될 수 없기에 사도 바울은 앞서 선한 일이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의 기준을 언급했습니다. 본문에서 빌레몬이 당면하게 된 요청은 이러한 파격적인 내용의 선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벌 총수가 30년간 부리던 가사도우미의 아들을 기꺼이 사위로 맞아들이는 것 이상의 파격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세상 나라의 모든 사람은 육체에 얹힌 신분에 매여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으면 나의 신분은 부모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부모라는 신분이 나의 진정한 신분일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신분을 우선시하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신분 의식은 결국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관문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해 마음에서 몸을 잘라버리고 예수님의 몸을 입는 일입니다. 이때 주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 의식입니다. 몸이 남아있어서 자녀와의 관계는 유지되지만, 나의 마음은 부모라는 신분 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자녀를 대하는 몸은 성령님이 쓰시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론으로 용납된다면 실제로 믿음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몸 때문에 생기는 모든 신분 의식을 타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서 살펴본 서신을 통해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새로운 몸으로 입음으로써 나타나는 일인칭 안에서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일인칭 안에서의 변화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누구냐?’에 대한 내용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는 곧 신분 의식과 계층 의식을 비롯한 몸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없애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는다는 이론을 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남자라는 자아의식의 내용,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의 내용, 여자라는 자아의식의 내용, 엄마라는 자아의식의 내용, 직장에서는 직원이라는 자아의식의 내용을 비롯한 ‘나는 누구냐?’에 대한 모든 자아의식이 예수님의 몸을 입는 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볼 때도 적용됩니다. 만약에 대통령을 만나면 대통령을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이라는 몸에 얹힌 신분에 마음이 매인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몸의 신분을 근거로 타인을 보았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신분이 그 사람 자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 안에서 잘못된 일입니다. 몸에 얹힌 신분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이 만든 신분에 마음이 묶여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예전에 보았던 기사가 떠오릅니다. 서울에 가면 고급 주택단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지 안에 공중목욕탕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고급 주택의 주인인 여성이 목욕탕에 갔다가 그 주택단지를 출근하는 가사도우미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맘에 안 들었는지 목욕탕에 크게 항의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가사도우미가 고급 주택단지의 주인들과 같은 목욕탕을 쓸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낮은 계층의 사람과는 같은 물로 몸을 씻는 일조차 할 수 없다는 발상에서 나온 항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의 신분 의식이 그대로 표출된 사건이고, 그만큼 대한민국이 신분사회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사회가 여전히 신분사회이고 계층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파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육체에 얹힌 세상적인 신분이 높을수록 예수 믿기가 힘듭니다. 오늘 본문을 예로 들자면 오네시모보다 빌레몬이 예수 믿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믿을 때 얻을 것은 있어도 잃을 것이 없었지만, 빌레몬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세상적으로 잃을 가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마음이 몸을 떠남과 동시에 몸에 얹힌 모든 것을 버림입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님이 입으시게 되고, 내 마음은 세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집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계층 의식이나 신분 의식에 갇혀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심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이렇듯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몸은 성령님에 의해 선한 일을 해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신분과 지위 아래에서 이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육체에 얹힌 신분을 그 사람이라 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마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으나 육체에 얹힌 신분 자체에 매여 있는 상태이다.’라고 보게 됩니다. 벌써 이렇게만 사람을 대할 수 있어도 낮은 신분의 사람을 보든 높은 신분의 사람을 보든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마음이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 나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신분 사회와 계층 사회 속에서 몸에 어떤 신분이나 계층이 주어지든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내 몸이 노예의 신분에 처해있더라도 내 마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노예 신분에 있는 내 몸을 성령이 입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결국 애굽을 구하는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요셉처럼 총리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몸 또한 요셉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에게는 빌레몬서가 전하는 파격적 메시지가 일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분 의식과 계층 의식이 내 안에서 완전히 허물어지고 깨지고 사라지는 자유함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함의 상태 속에서 세상적으로 어떤 신분이 주어지든지 성령님께서 내 몸을 이용해서 그 자리에서 하늘의 뜻을 펼쳐 가시는 하늘나라의 샘물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몸이 가난한 계층에 속했든 부유한 계층에 속했든 우리 마음은 십자가 관문을 통해 예수님의 몸을 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된 신분 의식을 갖게 하시며,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붙잡으셔서 놓인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만을 이루어 가는 멋진 사람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