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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소망의 풍성함이 영혼의 닻이다>의 줄거리 :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하나님 소망으로 천국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소망의 풍성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소망에 가뭄을 겪는 다면 이는 분명히 소망의 누수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라 땅을 향하여 소망의 풍성함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의 풍성함을 이루려면 반드시 피난처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 소망의 풍성함이 영혼의 닻이다
(히브리서 6:9~20)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본문 11절에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갖는 소망의 풍성함은 공짜입니다. 돈을 풍성하게 가지려면 투자가 필요합니다. 쉽게 말해 돈을 넣어야 돈을 법니다. 그런데 아무런 투자 없이도 될 수 있는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 소망 부자, 하나님 소망 부자입니다.
다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 소망의 부자가 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투자 없이도 될 수 있는 소망의 부자가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서 소망의 부자가 되지 못하는 바보들이 있습니다. 소망은 곧 바람입니다. 바라는 일에 대해서 부자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소망의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소망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주제를 반복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믿는 사람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경우를 염려하고 경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성격이 다른 본문들보다 확실하게 드러나며 ‘어떻게 해야 구원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한 번 하늘의 빛을 받은 뒤에 떨어져 나가서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는 행위 즉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행동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과정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행동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짜 믿음에서는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행동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도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고자 하였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또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났을 것이고 믿음과 구원에서 떨어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동할 수 있고, 그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인격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름과 존재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바로 미국의 대통령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떠올리고 입으로 부르더라도 내 마음에서는 어떠한 울림도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부르는 이름과 백악관에 있는 미국 대통령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나와 무관한 사람이기에 아무런 느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름은 꼭 사람에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3년 만에 10억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이라면 10억이라는 이름이 바로 의식 속에 새겨지고 마음에 울림이 생깁니다. 지금의 상태는 10억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돈과는 거리가 있는 상태이지만 마음에서 돈이 간절하기에 10억과의 거리를 없애고 싶어 하는 바람이 생겨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지만 그중에는 내 마음에 울림을 가져다주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데 애인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임을 알면서도 이름만 듣고도 가슴이 설렙니다. 반면 어떤 이름들은 내 마음에 어떠한 울림도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에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고등학생들에게 서울대라는 이름은 울림이 있습니다. 서울대 학생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 거리를 좁히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애인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는 이유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사람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름과 존재의 관계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행동은 이웃 사랑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는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 때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바람이 생기게 됩니다. 쉽게 말해 실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10억을 붙잡은 사람은 실제 10억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10억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돈을 아낀다든지 투자를 한다든지 하는 행동이 나타날 것입니다. 마음에서 서울대를 붙잡은 학생들은 실제 서울대 학생이 되고자 거리를 좁히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유명한 학원에 등록한다든지 하는 행동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은 사람은 어떨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밀착하는 상황으로 가기 위하여 하게 되는 말과 행동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은 이 세상에 있는 대상들의 이름을 붙잡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에 있는 대상의 이름을 붙잡고 그것을 향하는 중에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죄의 저주 속에서 나오는 악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어떤 이름을 마음이 붙잡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와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모조리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실재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하여 하는 말과 행동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름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소망과 연결시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소망의 풍성함을 갖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사람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소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음이란 하나님의 실재하심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분이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고등학생들이 서울대라는 이름을 붙잡고 실제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서울대가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이 10억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실제로 10억을 손에 쥐는 상황으로 가기 위하여 애쓰는 이유는 10억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음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유일하게 좋은 하나님께 마음이 가닿기 위하여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로 하나님께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소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름과 존재의 관계를 소망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10억이라는 이름을 붙잡은 사람은 실제로 10억을 손에 쥐기를 소망합니다. 서울대라는 이름을 붙잡은 학생들은 실제로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이렇듯 붙잡게 되는 이름은 언제나 그 존재가 좋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은 것이고 하나님을 좋다고 믿은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좋음을 믿는다면 당연히 실제로 하나님께 가닿고 싶다는 소망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을 얻음으로써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 마음 채움과 관계해서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10억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은 10억으로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돈에 대한 믿음입니다. 서울대를 좋다고 여기는 학생은 서울대로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서울대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지면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10억이든 서울대든 하나님이든 이름만 가졌을 뿐입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는 갖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바로 소망이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의 풍성함’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곧 ‘소망의 풍성함’이 없으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는 24시간 발동합니다. 그 욕구가 어떤 대상을 특정하고 그 대상을 향해가는 상태가 소망입니다. 소망의 풍성함은 하나님께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대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도 있을 수 있고, 10억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소망의 풍성함은 곧 행동의 간절함으로 나타납니다. 10억에 대한 소망이 풍성한 사람이 실제로 10억을 벌게 될 가능성이 크고, 서울대에 대한 소망이 풍성한 학생이 실제로 서울대를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소망이 풍성한 사람이 하나님을 더 가지게 됩니다.
제목에서 ‘하늘 소망, 땅 소망의 부자와 거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 소망이 풍성한 부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소망이 가난뱅이입니까? 하나님 소망이 풍성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마음에서 욕구하는 소망의 힘이 누수 현상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려고 해도 우리의 마음에서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한 크고 작은 바람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소망이 세상을 향하게 되는 소망의 누수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대해 짧은 순간이나마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라고 소망을 갖게 되는 일들이 반복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함이 풍성해질 수 없습니다. 소망이 누수 된 만큼 하나님을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지게 됩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는 24시간 발동하기에 세상에 대한 작은 소망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풍성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풍성해지지 않으면 내 말과 행동도 하나님을 소망할 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국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선민들에게 유일한 있음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시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24시간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 싶어 하는 욕구는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풍성해지고 하나님 소망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소망의 부자가 되는 것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기술을 발휘해야 하는 일도 아닙니다. 소망할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소망의 부자가 되고 재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말과 행동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만을 가지고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하나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때의 만족을 100으로 친다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으로 인해 생기는 만족은 70~80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깡그리 없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만족한 상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소망만으로도 이러한 만족이 가능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는 것들이란 소망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바라는 것은 실재를 얻은 것과 거의 같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대하듯이 아직 그렇게 직접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만족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소망을 갖지 않음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것들을 향해 생기는 사소한 소망을 끊임없이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합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은 10억을 풍성하게 소망할 것입니다. 돈에 대한 소망의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돈에 대한 소망의 부자가 되었더라도 실제로 10억을 손에 쥐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서울대라는 이름을 붙잡고 소망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서울대를 손에 쥐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은 모두 서울대를 꿈꾸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입학하는 학생의 숫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소망의 재벌이 되어도 소망의 풍성함이 실재와 연결되기가 어렵습니다. 소망이 아예 없는 경우보다는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그 소망이 실재와 연결되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소망의 재벌이 되어봐야 물거품의 재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절대로 물거품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를 맹세와 약속의 관계로 예를 들며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다면 실제로 가진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날마다 생기고, 마음에서 나오는 흡입력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하나님 소망의 재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재벌 상태는 절대로 물거품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에 소망이 풍성하면 풍성할수록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풍성하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망하게 됩니다. 세상 친화적인 죄성에 의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세상 것을 향하여 바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고, 저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삶의 모습이 왜 이 모양인지 불만입니다. 끊임없이 바라는 동안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할 소망이 누수 현상이 일어나고, 누수 된 소망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 소망의 가뭄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의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소망이 가뭄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학대학 총장이고 교수라고 해도 그 속에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 소망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부자이고 재벌이 아니라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입니다. 신학대학 총장일지라도 마음이 하나님을 소망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대학을 잘 운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기부금을 유치할 수 있을까?’라는 소망으로 차 있다면 하나님 소망이 기근인 상태입니다. 신학대학 총장을 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소망은 하나님이 맹세하셨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일에는 거품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면서도 실망하는 사람은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소망들은 모조리 거품입니다. 증권전문가가 어떤 종목을 권유할지라도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돈의 흐름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기 때문에 증권전문가가 아무리 성공을 약속해도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그 약속을 한 증권전문가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기 때문에 지켜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녀를 지켜주겠다는 맹세를 해봐야 암에 걸려서 죽는다면 그 맹세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나보다 큰 존재가 있는 상태에서의 맹세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맹세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너에게 주겠다.’라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풍성함은 물거품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소망을 가지는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을 가지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본문 18~19절을 보면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풍성하게 가져야 하는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기에 하나님을 가질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10억에 대한 소망으로, 서울대에 대한 소망으로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소망하면 내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소망의 힘, 욕구하는 힘, 바라는 힘이 샘물처럼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풍성하면 풍성할수록 세상 것들은 점점 쓰레기와 배설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로 변해가게 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소망하려는 죄성을 염두에 두고 피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피난처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을 수 없다면 우리의 죄성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소망할 것이고 하나님 소망에 대한 누수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붙잡았더니 예수님이 내가 소망하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내 마음을 끌고 가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10억을 소망하는 사람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할 것입니다. 금융전문가에게 물어보고, 증권전문가에게 물어보고자 할 것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을 따라 10억을 벌 수 있는 길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이 없이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엉뚱한 일에 이용하려 합니다. 병 낫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부자 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형통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이 없기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풍성함을 가지고 예수님을 붙잡을 때 우리 마음은 직통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휘장 안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휘장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끌고 하나님 앞으로 가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곧 죄악 된 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이 길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풍성함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소망의 재벌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소망의 재벌이 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부족감에 시달리는 이유는 세상 것이 좋은데 내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훌륭한 배우자가 좋아 보이는데 내게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돈이 좋아 보이는데 내게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류대학이 좋아 보이는데 내게는 없습니다. 없는 것뿐이기에 삶 자체가 패배자의 삶이고 우울한 삶이고 낙오자의 삶입니다. 세상 것을 좋다고 믿고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소망하는 동안에는 하나님도 소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소망은 돈 드는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 소망에 대한 재벌이 되고 볼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소망하느라 하나님을 소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소망의 재벌이 되면 내게 없는 세상의 가치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지구를 다 가진 사람보다 더 부자가 됩니다. 진정한 부자는 지구 전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지구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가진 진짜 부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붙잡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소망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소망의 풍성함을 이룬 하나님 소망의 재벌들이 된다면 지구에서 좋다고 하는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여겨지는 진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짧은 삶 동안 진짜 부자로 살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긍휼히 여기사 권면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소망의 풍성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내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해 흘러가는 소망의 재벌 되기 위하여 어느 곳에서든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길을 만드신 주님을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