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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속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법>의 줄거리 :
세상 안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려는 노력과 싸움 대신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극히 높다는 것은 초월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세상의 고지를 점령하려 하지 않고 초월합니다. 너무 높아서 자기 능력을 초월하는 대상을 사람들은 소망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세상 모든 고지를 아래로 두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법
(히브리서 7:1~28)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우리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부로부터 밀려나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시 세상의 변방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막은 전혀 다릅니다. 또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낙오자가 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을 초월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밀려났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당장은 세상에 대해 체념하고 살더라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나 세상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초월한 사람들은 아무리 기회가 주어져도 세상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예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말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요구가 들어 있습니다. 7장 전체의 주제는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선민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러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과 예수님을 비교하며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대제사장이심을 강조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사장은 선민을 하나님과 연결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1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의 한계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시기에 선민을 온전히 연결해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제사법이었고 율법이고 계명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선민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온전히 연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연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을 다 모아도 결코 따를 수 없을 예수님의 탁월함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비함이 구약성경에 등장한 멜기세덱 제사장의 신비함과 같은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멜기세덱 제사장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과 연관하여 단 한 번 언급되고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자취를 감춤은 단순히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비함을 드러내는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출신 성분을 따질 수 없는 ‘없음’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 제사장의 존재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이 예수님에게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언급하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이유임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본문을 대하며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6장 마지막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7장 1절에서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의의 왕’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조금도 잘못된 구석이 보이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보실 때 흠잡을 곳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살렘 왕’이 뜻하는 ‘평강의 왕’이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불화와 갈등의 요인이 전혀 없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멜기세덱의 성품이 담겨있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이끌어갈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포함된 의미에 대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18~19절을 보면 계명과 율법과 제사법의 한계를 표현하며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관장하며 가르쳤던 계명과 율법과 제사법으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었으나 예수님을 통해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극히 높으심이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한양의 궁궐에 계시는 임금님은 초월적인 권력의 존재였습니다. 한양 변두리에서 소 잡고 돼지 잡던 천민 백정과 임금님의 거리는 엄청난 것입니다. 백정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임금님을 마주할 기회가 주어질 수 없습니다. 백정의 신분과 지위와 능력과 모든 요소를 고려할 때 임금님은 다가갈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요? 이 점을 알기 위해 초월성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인구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살아있는 동안 백억을 벌겠다고 목표를 세울 수 있을까요? 철없고 세상모를 때 백억, 천억 버는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 되고 실제로 돈을 벌어보면 돈을 모으기는커녕 매달 들어가는 지출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3~4년만 사회생활을 하면 돈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됩니다. 백억을 벌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능력과 한계를 초월한 목표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초월한 대상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5,500만 인구 중에 1,000명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배우자에게서 보이는 가능성을 초월한 목표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표 자체를 갖지 않습니다. 목표는 곧 소망입니다. 어떻게든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목표나 소망은 생겨납니다. 요즘은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50대 60대가 되어서도 20대 외모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높은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50대 60대가 바랄 수 있는 최대치의 목표는 40대 정도의 외모를 유지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또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부모 중에서 서울대 법대나 의대를 들어가기를 바라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목표가 너무 높기 때문에 바라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바랄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일에 대해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시다는 말은 가장 초월적인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목표보다도 높으신 분이십니다. 높음에는 좋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억이라는 돈은 좋음입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라는 직분도 좋음입니다. 20대의 외모도 좋음이고, 자녀의 서울대 입학도 좋음입니다. 좋음인 것은 분명하지만 너무 높아서 내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기에 소망할 수 없고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좋음을 다 합쳐서 쌓아 올려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좋음은 지극히 높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음에 있어서 더 이상 높을 수가 없을 만큼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감히 누구도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좋아할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백억을 바랄 수조차 없는 우리의 형편에서 백억보다 더 높은 초월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바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심이라고 표현되는 하나님의 지극히 좋으심의 내용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온전히 갖지도 못하고 단지 하나님의 좋으심의 빛을 쐬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좋음을 망각하고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백억을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백억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을 소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백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그런 태도가 나타나야 격에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억은 소망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일억이 생길 가능성이 10%, 20%, 30%만 보이더라도 마음이 온통 다 쏠리게 됩니다. 고3 자녀를 둔 부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서울대 법대나 의대를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높은 곳은 고사하고 중간에서 조금 더 낮은 곳조차 바라기 힘든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백억이나 대통령 자리나 서울대 입학이나 20대 외모의 비결 등의 좋음 같은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소망할 만큼 초월해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7장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따져보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백억을 바라지 못하는 이유는 백억이 아무것도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백억이 내 능력을 초월한 일이기 때문에 바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가지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좋으심이란 백억을 백억 번 쌓아 놓는다고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심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그까짓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 의미를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보자면 이 세상에서 도토리 높이만큼 올라가는 일도 감히 소망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기회만 주어지고 여건만 주어진다면 높아지고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같이 신비한 대제사장으로서 이러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정말로 나를 따라오면 백억을 백억 번 쌓아 놓는 좋음조차도 초월할 수 있다. 서울대에 입학하는 좋음을 백억 번 쌓아 놓는 좋음조차도 초월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음으로써만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십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도토리 높이만큼의 높은 곳조차 바랄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절대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를 가지라.’라고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소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닌 일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좋음을 전봇대 높이에 비유하자면 우리가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일들은 도토리 높이만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면 전봇대든 도토리든 이 세상에서 더 높아지는 상황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전봇대의 높이에 도달한 사람보다 도토리 높이만큼도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 소망하기가 훨씬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소망하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내가 소망하는 대상이 있다면 나의 마음은 그 대상에게 정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토리 높이만큼 낮은 이 세상 속의 고지라도 그것을 소망하고 목표로 삼고 있으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어도 갈 수 없습니다. 닻을 이 세상에 내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소망하고 목표로 삼을 수 있고, 그분께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소망한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소망함의 의미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과연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내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이가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인가?’를 따져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높이가 얼마가 되었든 하나님은 세상을 뛰어넘은 초월하신 높이에 계십니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6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일컫기를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보다 높아지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예수님을 등지고 종교로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고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는 것이 유대 종교의 시스템이었습니다. 내가 붙잡아야 하는 예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족보도 없는 영원하신 멜기세덱과 같은 분이십니다. 한편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조차도 바랄 수 없는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훌쩍 뛰어넘는 초월성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러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등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고지를 향해 갖는 목표 의식이나 소망은 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이 있는 모든 좋음을 다 쌓아도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끌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붙잡고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삶이 반복될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초월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크고 작은 높음을 군침 흘리며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높음을 발 아래로 볼 수 있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에게는 초월성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좋음조차도 감히 바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과 같은 신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연합함을 날마다 반복하는 중에 어느덧 나도 모르게 이 세상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되어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할수록 지극히 높으시며, 좋음에 있어서 최고봉이시고, 그 누구도 감히 목표로 삼을 수 없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좋음에 내 마음은 점점 더 물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물들고, 하나님의 좋음이 스며들고, 하나님의 좋음을 쐽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 모두가 세상을 온전히 초월하는 시간이 하루 빨리 올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극히 높으신 우리 하나님을 내가 감히 바라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로 가신 대제사장 예수님만을 붙잡고 아버지를 바라오니, 아버지가 계신 그 초월적인 곳의 분위기가 내 마음에 전달됨으로써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