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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종교인 말고 홀로 완전한 종교가 되라>의 줄거리 :
히브리서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배반을 경계하고자 합니다. 유대 종교는 성전과 제사와 율법의 세 가지 요소를 근간으로 세워진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 시스템이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기에 약점이 있어 보입니다. 이에 맞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 종교에 속한 종교인이 아니라 각자가 홀로 완전한 종교 시스템을 자기 안에 가지는 종교 자체라고 갈파합니다.
종교인 말고 홀로 완전한 종교가 되라
(히브리서 8:1~13)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우리는 어떤 하나의 종교에 속한 종교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 홀로 완전한 종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대단한 영적인 야심가입니다. 히브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유대 종교 전체 위에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 한 사람과 유대 종교를 대결시켰을 때 그리스도인이 유대 종교 전체를 밟고 설 수 있게끔 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입니다. 이 의도에 따르자면 우리 각자도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친 기독교 전체를 발아래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개신교 인구가 10억 정도 된다고 보면 우리는 개신교라는 종교에 속한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 혼자 개신교 전체를 발아래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굳이 그렇게 종교를 원하고 종교를 따지자면 나 한 사람이 완전한 종교 시스템을 갖춘 나 홀로 종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8장은 바로 그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서는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영적 배반을 경계하고자 기록한 책입니다. 유대 종교는 성전과 제사와 율법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성전과 제사와 율법이라는 기둥으로 이루어진 종교 시스템의 중심에는 대제사장이 서 있습니다.
한편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면 예배당조차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믿고 기댈만한 울타리로써의 조직 시스템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미흡하게 보일 수 있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종교라는 울타리의 장점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종교 시스템을 원하는 자들에게 스스로 종교가 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각자가 유대 종교의 근간을 이루는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자가용처럼 완전히 나 홀로 가질 수 있기에 외적인 종교 시스템이 필요치 않습니다. 한편 유대 종교는 잘 갖춰진 조직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받치고 있는 세 기둥은 성전과 제사와 율법이었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핵심 직분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대제사장과 성전과 제사와 율법을 완전히 나 홀로 자가용으로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는 바로 이러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모세의 지도력은 아론으로 이어집니다. 아론은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기에 아론의 자손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언제나 혼자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대제사장을 공통으로 가졌던 셈입니다.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도 공통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들어있는 성전도 공통으로 가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비로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다시 ‘지극히 크신 이’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기에 아래에서 볼 때는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상태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본다면 지극히 크신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지극히 높으시고 크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구약시대처럼 공통으로 소유함이 아니라, 내가 단독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자가용 대제사장이십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아론 한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가져야 했지만,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나 홀로 온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성소에 들어가서 휘장을 걷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희생 제물의 피를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에 바르면서 속죄를 행했습니다. 이러한 성소와 지성소는 이스라엘 백성 공통의 소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는 예수님을 자가용 대제사장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이 땅에 있는 성막이나 성전도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장막’이란 성막과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안치된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성소가 있었던 성막과 성전을 공통으로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장막을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막에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다는 것은 장막이 천국의 예표였음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천국의 모형물이 장막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자가용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땅에 있는 유대 종교의 장막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성전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에 있는 성막을 공통으로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하늘에 있는 성전은 우리 각자가 개별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땅에 있는 성막은 한정된 공간이기에 수많은 백성이 들어가려야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이 대신 들어가는 것으로써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효과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천국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삼은 각자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천국 장막에 홀로 들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유대 종교의 핵심 요소인 성전 대신 천국 성전을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자가용 대제사장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모세나 대제사장을 통해 공통으로 갖던 분이 아니라, 나 홀로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직면하여 독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6~8절을 보면 새 언약이 언급됩니다. 언약이란 율법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이란 시내산 언약인 십계명으로 대표됩니다. 신명기 28장 1~2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하였고, 15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모세를 사이에 두고 맺은 언약입니다. 본문 7절에서는 이것을 ‘첫 언약’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주어진 첫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이루어진 일은 이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처럼 당신의 뜻을 담은 율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뜻을 새겨넣게 됩니다. 쉽게 말해 내 생각 안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니 내 뜻과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 종교가 자랑하는 율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탁월함입니다.
마치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의 자랑이듯 유대 종교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 율법을 따라서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율법은 내 생각 속에 들어와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통으로 가졌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십계명과 율법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뜻 자체를 자가용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가짐으로써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통으로 가졌던 장막 대신 하늘 장막을 자가용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또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통으로 가졌던 율법 대신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자가용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자가용으로 갖게 된 하나님의 뜻 속에는 율법과 십계명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우리의 삶의 상황이나 처지는 다릅니다. 그렇기에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나만의 삶에서 가장 합당한 뜻은 다른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시면서 십계명과 율법이라는 공통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삶의 상황이나 처지에 딱 맞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자가용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번제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이 곧 나의 제사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날마다 상번제를 드림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써 이루어진 번제의 제사를 내 자가용 제사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 나의 자가용 제사입니다. 제사물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은 구약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정해진 시간에 드려지는 상번제를 통해서만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장소와 시간을 살아갑니다. 지구의 북반구에 사는 사람도 있고 남반구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전에서 상번제가 드려지는 시간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상번제의 장소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제는 시간이나 장소는 상관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루어진 제사를 언제 어디서나 내 자가용 제사로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예물이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고백하는 마음의 예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십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통으로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제는 예물을 드리는 것도 제사와 마찬가지로 자가용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1절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이라는 말은 전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써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참 신이십니다. 천국은 실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율법은 자가용이 되었습니다. 유대 종교의 핵심 내용은 성전과 제사와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이러한 핵심 내용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도 성전도 율법도 대제사장도 공통으로 가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공통적 하나님을 가리켰으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주를 알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러한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자신 안에 유대 종교의 핵심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내용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유대 종교를 믿는 종교인으로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대상이 기독교 종교입니다. 대제사장 대신 목사님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교계 지도자 밑에서 종교 생활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께로 나를 연결시켜 주시는 대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계 지도자들이나 목사님들의 할 일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각자가 자가용으로 갖도록 돕는 것이지 결코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교인들이 종교를 이룰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자기 안에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홀로 종교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를 이룰 수 있는 핵심 요소를 자가용으로 갖고 있는 여러분 자체가 종교입니다. 여러분이 움직이면 하나의 완벽한 종교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쭙잖은 가짜 종교 전체를 저울에 달면 여러분의 무게가 더 무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가짜 종교나 타락한 종교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참된 종교가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완벽한 종교일 때 집에서 청소를 해도 종교가 청소를 합니다. 직장에 나가도 하나의 완벽한 종교가 부장 노릇을 하고 대리 노릇을 하게 됩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완벽한 종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방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불의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께서 간과하시고 묵인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막 대신 천국이라는 하늘 장막을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던 공통의 제사 대신에 십자가에서 드려진 제사를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통으로 갖던 율법 대신에 율법의 취지를 포함하여 나만의 삶에 맞추어진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자가용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불의를 긍휼히 여기심은 이렇게 완벽한 종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대제사장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와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시선은 나와 관계해서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십니다. 십자가 예수님 바깥으로 나가 있는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관계하여 십자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관계하실 때는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십니다. 그렇기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바깥에서 불의를 행한 나를 하나님께서 따로 보시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 바깥 전체가 저주 아래에 있어서 영원한 멸망이 운명처럼 정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시기에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나를 보시는 방식이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마음에 두실 자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예수님을 바라보심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시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바깥에 나가 있다면 저주와 멸망 아래에 있을 뿐입니다. 운명처럼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관계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의 운명은 이미 멸망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예수님만 바라보시는 것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항상 붙잡아서 하나님 시선에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백성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부르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언제나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한 종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가 완전히 충족됩니다.
일반 종교에는 신이 있고 신전이 있고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뜻인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가 구성되기 위한 핵심 요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드는 자로 바라보시는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이 나를 가지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과 생각에 새겨져서 그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정말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종교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를 자가용으로 완전히 구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굳이 종교를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기존 종교의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는 다 가짜입니다. 참 종교의 요소를 온전히 자가용으로 가져서 스스로 세상의 모든 종교들보다 뛰어난 종교 자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히브리서 저자의 영적인 야심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종교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종교 자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