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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 싸는 병인 죄, 한 번에 없앤 십자가>의 줄거리 :
구약시대 제사에서 그토록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짐승이 죽었지만 선민에게서 실제로 죄를 전혀 없애지 못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오직 단 한 번 드렸지만, 죄를 완전히 없애버린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의 탁월성을 드러내시고 찬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 한 번에 죄를 멸하셨다는 말씀이 좋기도 하고 또 미심쩍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실상을 보면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죄가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싸는 병인 죄, 한 번에 없앤 십자가
(히브리서 10:1~18)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죄는 마음을 싸는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을 십자가를 통하여 한 번에 없애버리셨습니다. 마음을 싼다는 것은 마음을 쓴다는 말과 함께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용도에 어긋나게 사용하는 것은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쓸모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용도에 맞게 사용하면 마음을 쓰는 것이지만, 마음을 용도에 어긋나게 사용하면 마음을 싸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죄를 십자가 제사를 통해서 한 번에 없애버리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기본 취지입니다.
본문은 구약의 제사가 결국 죄를 없애지 못했음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번에 당신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애셨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배반하여 유대 종교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척 좋은 말씀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고 찜찜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 번에 이루신 제사인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마다 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은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여전히 생활 현장에서는 실제로 죄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에 죄를 없애는 일이 일어났다는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미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황을 염려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우리에게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또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 의도에도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에 종교인으로 생활할 때처럼 죄 사함의 확신만을 가지고 생활 현장에서는 죄가 덕지덕지 쌓이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짚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죄란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로 마음의 빗나감을 의미합니다. 이 빗나감은 마음이 몸에 붙어있음에 기인합니다. 마음이 몸의 오감을 따라서 이 세상으로 흐르는 상태가 빗나간 상태입니다. 우리는 앞서 소망의 누수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망은 곧 마음의 작용이기에 마음의 누수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의 마음은 땅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있다고 느끼는 의식, 가지고 싶어 하는 욕구, 추구하는 주체성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작용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본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하지만 땅을 향해 흘렀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누수 되는 모습은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낭비하면서 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할 과녁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 과녁을 놓쳐 빗나가면 이 세상을 향해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세상 것들이 내 인격 중심부로 들어와서 하나님만이 계셔야 될 자리를 더럽힙니다.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곳에 있는 상태인 청결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인격의 가장 중심부에서 더러움이 발생하면서 인격 전체가 더러워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죄 사함이란 더러워진 인격 전체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마음의 누수 현상으로 인해 통째로 더럽혀진 인격의 죽음을 위해 짐승들을 죽였습니다. 이 제사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짐승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앎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선민들의 불행의 시작도 여기에 있습니다. 짐승이 수천, 수만 마리가 죽어 나가고 있는데 정작 그 짐승이 왜 죽는지를 몰랐습니다. 물론 선민들은 이것이 속죄를 위한 제사임을 교리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의 어떤 점 때문에 짐승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중에는 번제의 제물이나 속죄 제물이나 화목 제물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되었습니다. 내가 마음을 누수 했기 때문에 회개의 과정이 되어야 했는데 이 과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본래 제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흘러가야 하는 마음이 몸을 따라 세상을 향해 흐르게 된 더러워진 인격이 통째로 죽는 과정이어야 했습니다. 내 인격 대신 짐승이 죽는다는 뚜렷한 자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는 이유를 모른 채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과 예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송아지와 염소를 드릴 테니 잘 봐주세요.’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8절에서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의 피가 강같이 흘러도 아무도 실제 죄 사함의 효과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사는 어떤 특징이 있기에 한 번에 모든 죄를 없앨 수 있었다는 것일까요? 14절을 보면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마음의 누수 현상을 일으키며 살고 있습니다. 마음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낭비하며 싸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단 하나라도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은 오염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 구분된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의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써 마음의 누수 현상이 차단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에 대해 마음이 누수 되고 있는 나를 죽이는 자리임을 알고 붙잡을 때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거룩하게 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를 내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돈 문제를 생각하는 동안 마음에 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녀 문제를 생각하는 동안 마음에 자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건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러워졌다. 이렇게 더러워진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음은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하지만 죄로부터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날마다 넘어지기에 이 말씀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착각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의 공간이 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모여야 할 공간입니다. 우리가 모일 곳은 예배당도 아니고 부흥 집회도 아니고 목사 세미나도 아닙니다. 공간이신 십자가 예수님 안에 우리의 마음은 모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써 이루어진 예수님이라는 공간은 죄의 청정지역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이라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죄를 지을 수 없게 됩니다.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틀리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면서도 없애지 못한 죄를 예수님께서는 한 번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없애셨습니다. 죄의 청정지역이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라는 공간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면 마음의 누수 현상으로써의 죄는 절대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죄의 청정지역인 예수님 안에 머물지 못한 채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인으로 사는 동안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한 번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음은 영원히 유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밖에서 여전히 마음의 누수 현상을 일으키면서도 죄 사함이 유효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대로 된 용도로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낭비하며 싸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으니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하다는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과 죄 사함은 영원합니다. 다만 그 구원과 죄 사함은 바로 죄의 청정지역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들어가 머물 수만 있다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집사람과 연애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집사람 친정은 부산이었는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방학을 하면 부산에 내려가는데 같이 버스를 타고 가든지 저 혼자 갈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고속버스에 안내원이 있었는데 기사님과 원스텝, 투스텝, 노스텝 같은 용어를 쓰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원스텝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갈 때 한 번만 쉬는 것입니다. 한 번 쉴 때는 추풍령 휴게소에서 쉽니다. 투스텝이면 금강 휴게소와 경산 휴게소나 경주 휴게소에서 쉽니다. 그런 경우는 못 봤지만 노스텝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강남 터미널에서 버스를 탈 때면 미리 화장실을 가고, 버스 안에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간식도 먹지 않습니다. 휴게소에서 내리지도 않고 한 자리에 앉아서 부산까지 갑니다. 그런데 대부분 승객은 휴게소에 들를 때 화장실도 가고 간식도 먹고 마시며 부산까지 갑니다.
이러한 상황을 신앙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십자가 터미널에서 예수님이라는 버스를 마음이 올라타는 것과 같습니다. 강남 터미널에서 부산행 고속버스를 타면 서울을 벗어나 부산으로 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인 십자가 터미널에서 예수님을 올라타면 마음은 세상을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을 벗어남이란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마음의 누수 현상이 그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낭비하며 싸는 현상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올라탄 뒤로도 끊임없이 내리고자 합니다. 마치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에 용변을 위해 휴게소에서 내리는 것과 같이 세상을 향해 있는 마음이 마려운 상태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싸고 싶어 합니다. 돈 문제에 마음을 싸고 싶어 하고, 건강 문제에 마음을 싸고 싶어 합니다. 친구 관계, 가족 문제, 자녀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마다 마음을 싸고 싶어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에 마음을 싸고 싶어서 견디지 못해 죄의 청정지역인 예수님으로부터 내리고자 합니다.
휴게소에서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버스에서 내리듯이 세상이 먹고 싶어서 예수님으로부터 내립니다. 세상을 먹고 마셔서 갈증을 없애고자 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좋겠고, 저것이 있으면 좋겠고, 이것을 가지면 좋겠고, 저것을 가지면 좋겠다는 갈증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갈증도 있고, 지금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지금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갈증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정확하지만, 우리에게 적용하기에 어려운 상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재벌의 재산을 모아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임금과 대통령들의 권세를 모아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모시도록 지음 받았기에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께 흐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몸을 입고 있는 바람에 오감을 통해 만나는 세상 것들을 향해 흐르게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사소한 것들을 향해 마음의 흐름이 이루어지며 마음의 누수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싸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소중한 마음이 똥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을 향해 마음이 흘러갑니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히 마음을 건강에 쓰는 것이 아니라 건강 때문에 마음을 똥으로 싸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그 귀한 마음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 문제에 마음이 흘러간다면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싸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대상에게 누수 되는 마음은 쓰는 것이 아니라 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흐르지 않고 이 세상일에 누수 되면서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은 제대로 사용된 것이 아닌 낭비된 것이고, 쓴 것이 아닌 싼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누수 되는 중에 몸을 움직였다면 몸을 제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똥으로 싼 것입니다. 마음이 누수 되는 중에 돈을 썼다면 돈을 제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싼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감으로써만 마음의 누수 현상인 죄는 차단될 수 있습니다. 청정지역인 예수님께 머무는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상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올바른 쓰임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평생 하는 모든 일들은 똥만 싸다가 끝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 번 고속버스에 타면 내리지 않고 부산까지 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실제 고속버스를 탈 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그러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죄의 청정지역이십니다. 가장 깨끗하고 가장 쾌적하고 가장 평안한 곳입니다. 마음이 예수님께 머물지 않고 내려올 이유가 없습니다.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청정지역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청정지역인 예수님을 늘 바라보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함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잊지 말고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청정지역에 마음이 머물 때 일어나는 일이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넣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싸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시고 뜻이신 성령님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내 몸을 쓰십니다. 내 인생의 시간을 쓰십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으면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시간을 써도 시간을 싸는 것이고, 몸을 써도 몸을 싸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싸는 일에 쓰게 됩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이라는 주체적인 역량은 하나님을 향할 때만 쓰일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음을 쓰면 마음을 싸는 것이 됩니다. 시간을 쓰면 시간을 싸는 것이 됩니다. 돈을 쓰면 돈을 싸는 것이 됩니다. 모든 일이 낭비이고 똥이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터미널에서 주님 안으로 들어가 죄의 청정지역에 머물지 않는 한 무엇을 해도 똥을 싸는 일이 되고 맙니다. 일평생 똥만 싸다가 끝나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한 번에 영원히 죄를 없애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사람이 들어가도 비좁지 않은 죄의 청정지역을 십자가에서 만드셨습니다. 이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면 마음의 누수 현상은 차단됩니다. 더러움이 사라지고 신선하고 쾌적한 평강의 상황을 유지해 가는 중에 이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신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쓰이면서 인생은 진행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깊이 깨달을수록 달리 살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죄가 단번에 사라진 청정지역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함을 호소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서 머무는 일을 중단하고 소중한 마음을 이 세상을 향해 싸는 더러움의 상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한 번에 죄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영원한 청정지역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큼은 죄의 청정지역인 주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하늘의 신선함을 마음껏 쐬며 하루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놀라운 선물과 은혜를 모르고 세상 사람들처럼 산 시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다만 오늘 하루라도 온전히 죄의 청정지역인 예수님 안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