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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2

녹취문: 하나님은 절대 현금 결제는 안 하신다_태승철 (히 11: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7.08|조회수11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은 절대 현금 결제는 안 하신다>의 줄거리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십니다. 이 의미를 한 마디로 비유하자면 '하나님은 절대 현금 결제는 하지 않으신다'라는 뜻이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성경의 증언들은 하나님이 내게 내미신 신용 카드입니다. 이 증언들의 내용이 실제로 내 것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성경 속 모든 증언들의 내용이 실제로 내게 사실로써 지급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현금 결제는 안 하신다

 

(히브리서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현금 결제를 안 하신다’라는 비유 속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용카드를 제시하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을 통해 믿음의 본질에 관해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10장 38~39절의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왜 믿음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38절은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요청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얼마든지 퇴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뒤로 물러선다면 끝내는 멸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유대 종교로 돌아감에 대한 경고는 히브리서 전체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것은 믿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음의 퇴보를 주의하고 막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면 믿음에 전력하게 됩니다. 믿음에 전력함으로써만 믿음의 퇴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생활 현장과 모든 시간을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2장 4절을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믿음만 가지고 산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활 속에 믿음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을 조금 남겨둔다든지 혹은 많이 남겨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예배당에 다니는 것으로 국한시키고자 하고,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시간에만 국한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에게서는 이처럼 삶에서 믿음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믿음에 구멍이 나면 그 구멍을 통해 믿음의 퇴보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이 개입되면 실제로는 손에 못 넣었어도 넣은 것과 똑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우리는 먼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믿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과 천국에 대한 증언들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을 믿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가 잘될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믿음에 관한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 증언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성경은 증언하고 있을 뿐 실제로 삼위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나를 장갑으로 삼으심은 모두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우리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증언들에 대해 믿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곧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내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통해 실제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믿음의 효과를 ‘실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손에 넣지 못한 성경의 증언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하나님은 절대 현금 결제는 안 하신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용카드를 제시하시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신용카드의 가장 큰 의의는 지금 돈을 갖고 있지 않아도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용카드가 의미가 있으려면 받는 쪽에서 카드를 제시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신용카드가 현금과 똑같은 효과를 내도록 하는 이유는 바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식대를 결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손님에게 현금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손님은 현금을 갖고 있지 않아서 신용카드를 제시합니다. 신용카드는 돈 자체는 아닙니다. 식당 주인은 바라던 돈이 아니지만 신용카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카드만 받고 돈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신용카드는 실제 돈과 똑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가게 주인이 신용카드의 가치를 믿음으로써 그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적으로는 신용카드와 돈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용카드는 돈과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식당 주인이 현금만 고집한다면 많은 손님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식당 주인의 입장에 세워봅니다. 하나님은 마치 식대를 결제하려는 손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내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직접 주시는 대신 성경의 증언들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있음도 좋음도 주권자 되심도 모두 성경을 통해 증언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백 번, 천 번 이름을 불러도 그 이름이 내 마음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심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늘로 갈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도 그 효과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증언이 마치 신용카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용카드가 실제 돈이 아닌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가 아닌 증언입니다. 그러나 신용카드를 믿어서 받아들이면 돈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실제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발휘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증언 속에 담겨 있는 실제 내용이 마치 내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효과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좋음,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증언은 실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신용카드로 결제한 식대가 약속된 지급일에 통장에 들어오듯이, 증언으로 믿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내게 지급되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증거는 보이지 않는 상황을 재현하여 보이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게 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내용을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성령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또 천국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증거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선진들은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 종교의 상황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이사야 29장 13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전 중심의 종교 생활을 열심히 했어도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종교 생활에 열을 올렸으되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앞서 믿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증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에 대해 ‘나는 믿는다! 하나님만 스스로 있고 나머지는 다 있게 된 것들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믿음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그 말이 나타내는 상황을 진짜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반드시 구속력(拘束力)이 나타납니다. 구속력은 어떤 행위를 하게 하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 편의점 사장님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했습니다. 사장님의 지시는 아르바이트생에게 구속력을 갖습니다. 사장님의 지시를 따라 행동해야만 보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편의점 사장님의 집에서는 남편이자 아빠입니다.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는 보수와 같은 특별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병에 걸렸다는 상황이 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바꾸게 합니다. 건강과 관련된 말과 생각과 행동만을 하게 됩니다. 혹은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돈 문제의 구속력에 의해서 바뀌게 됩니다. 돈과 관계된 생각과 말과 행동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구속력이 작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구속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맞다.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하면서도 생활 현장에서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이루셨다고 믿는다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구속력을 띄게 됩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지시를 듣는 이유는 매장에서는 사장님이 나를 지배하는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이루셨다는 증언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로 높여드림을 의미합니다. 다른 영적 사실에 대한 증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진짜라면 직장에 나가 사장님을 마주할 때도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에 의해 구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직장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 대신 사장님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구속한다면 하나님의 있음을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는다면 사장님도 있게 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믿는다면 잘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이 믿음은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좌에 돈이 없다고 돈을 바란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좋음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좋다고 느끼는 사람은 돈의 구속력을 띕니다. 매사에 돈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좋음을 믿는다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구속력이 나타납니다.

 

이로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주체성이심을 들어서 압니다. 하지만 믿음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내 생활 현장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셔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미리 생각하셔서 이끌어 가심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게 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중단됩니다.

다만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장님이 훨씬 더 강력한 믿음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일은 버겁고도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에 있는 힘을 다하지 않으면 믿음의 퇴보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들에 끌리기 쉽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붙잡지 않으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교묘한 사탄의 방식이 유대 종교와 같은 종교입니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예수님, 보이지 않는 성령님에 대해 진짜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은 종교가 관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종교를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을 없애버리고 대신에 종교를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종교를 믿고 받아들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종교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보니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성령님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아가기도 바쁜 상황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믿는 것은 더욱 힘든 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종교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유대 종교에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각종 제사와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종교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은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이로부터 굳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힘들게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삶에서 보이는 것들을 받아들여서 구속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바쁜데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믿어야 함을 힘들게 여겼던 것입니다.

돈 문제라는 상황이 벌어지면 돈의 구속력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기도 바쁩니다. 가족 문제라는 상황이 벌어지면 가족으로부터 구속력이 발생합니다. 직장 문제, 건강 문제를 비롯한 각종 일들이 생각과 말과 행동을 구속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을 인정하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니 이것을 부담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의 제안은 매력적일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종교가 다 맡아서 해줄 테니 수고비만 좀 내면서 눈에 보이는 종교를 믿으면 된다는 제안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대체했습니다. 이러한 종교를 믿는 삶은 실제로 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속의 하나님 이름은 천만번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설령 평생 수억 번을 부를지라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실상’으로써의 하나님과의 직접적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증거가 나타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증거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루터나 캘빈의 의도를 우리가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구속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성경에 증언된 내용에 구속되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죽음을 이루셨다는 증언,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좋음이시고 주권자이시라는 증언, 천국이 나의 집이라는 증언, 성령님이 나를 장갑으로 삼으신다는 증언들은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구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시다.’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 돈을 바란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믿는다면 돈이 궁해서 ‘돈 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다가도 깜짝 놀라서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믿는다면 돈을 바랄 수는 없다!’라고 깨우칠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 구속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천국이 나의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이 증언의 지급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증언합니다. 이 증언이 실제로 내 삶에 지급되는 것입니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받으면 지급일에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온 증언들은 하나님의 신용카드입니다. 이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구속력의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증언에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증언이 가리키는 실제 내용이 내 삶에 지급되기 시작합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지급되면서 나의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실제로 지급되면서 내가 세상에서 주체가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내 마음에 지급되기에 세상 것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천국이 실제로 내게 지급되기에 이 세상에서 안정된 터 잡기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됩니다.

믿음은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에서 퇴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들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구속력을 갖는 자격을 인정할 때 세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용을 쓰고 기를 쓰고 악을 써서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이라는 실상을 지급 받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좋은 믿음에 남은 삶을 올인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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