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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2

녹취문: 가장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의 고민_태승철 (히 11:4~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7.10|조회수7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장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의 고민>의 줄거리 :

겉으로 보기에 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내부의 인격 상황은 사람마다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단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점점 신처럼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점 더 확정적으로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으면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믿음이 있어야 가장 잘난 아빠 하나님을 닮는 자녀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의 고민

 

(히브리서 11:4~7)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4절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구약성경에서 믿음으로 산 선진들의 예를 듭니다. 오늘 살펴본 본문에서는 아브라함 이전의 소위 원역사라 불리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기록된 믿음으로 산 선진들에 대한 내용이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있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기억을 하나 떠올려 봅니다. 일산에서 중학교 동창 둘과 만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와 친구 한 명은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기에 식사를 마친 후 다른 한 명의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차로 이동하던 중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운전하던 친구는 자녀들에 대한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 있었습니다. 불만의 이유를 물었더니 공부를 못해도 너무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서 대한민국에서 간암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서 일산에 있는 암센터의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동승하던 친구도 마찬가지로 서울대 치대를 졸업했습니다. 이 두 친구가 자녀들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잘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잘난 아빠에게 고민이 있다면 자녀들이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난 아빠에게 공부는 제일 쉬운 일이었지만 자녀들이 그 쉬운 일을 못하는 걸 보니 마음에서 열불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습니다. ‘야,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네가 했기 때문이 아니고 네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네 아이들은 하게 되지 않았기에 못 하는 거라고 생각해봐라. 너는 스스로 어려움과 불편함을 극복하고 인내해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되기 때문에 한 것 아니냐? 그런데 너희 자녀들은 안 되니까 못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니냐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서울대 교수님들은 누구의 자녀가 더 서울대에 많이 들어오느냐를 두고 시합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잘난 아빠들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과 저 하늘을 통틀어 제일 잘난 아빠가 있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잘난 아빠 열 트럭을 모아놓아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보다 잘난 아빠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께도 고민이 있습니다. ‘내 자녀들이 도대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잘난 아빠의 기준을 자녀들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잘난 아빠의 고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잘난 아빠가 아이를 기뻐하는 이유는 자기의 기준이 아이에게서 발견될 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기뻐하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피조물에게 스며들어 있는 모습을 보실 때 기뻐하십니다. 못난 아빠라면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나는 비록 이렇게 살지만 너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하지만 잘난 아빠라면 ‘제발 내가 한 것의 반만이라도 따라와라.’라는 바람을 갖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잘난 아빠이시기에 우리를 바라보실 때 바람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믿음이 하나님을 닮게 해주는 일임을 언급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세상의 잘난 아빠들을 다 모아놓아도 상대가 안 되는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닮은 아들과 딸들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선진들이 있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제 동창의 자녀들이 서울대 법대나 의대를 들어갈 만큼 뛰어났다면 너무나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잘난 아빠이시기 때문에 그 잘났음의 기준이 자녀들에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잘남이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의 인격이 신이신 하나님을 닮은 신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잘남이란 무엇일까요? 본문 6절을 보면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계신 것’이라 함은 곧 하나님의 있음입니다. 하나님만 스스로 있는 자이시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먼저 이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 주시는 이’라 함은 곧 좋음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좋음 분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재벌 아버지는 자녀에게 재벌의 자리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주시는 최고의 좋음이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에 대한 믿음이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을 닮는 일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앞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고려하여 말하고 행동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있음과 좋음을 충분히 계산에 넣은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돈의 존재감과 좋음을 최고로 아는 사람은 말과 행동의 바탕에는 돈의 존재감과 좋음이 존재합니다. 이미 돈의 존재감과 좋음에 대한 계산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란 믿는 대상의 성격을 충분히 고려해서 맞추어진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을 인격에 담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인격의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에는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의식 작용 안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빨아들이는 일이고, 욕구 작용 안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빨아들입니다. 이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으로 하나님을 내 인격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건강이나 돈과 같은 일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의식과 욕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 의식 안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욕구 안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먹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잘못 먹으면 소화가 안 돼서 설사를 하든지 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먹은 하나님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격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소화해서 내 인격의 피와 살로 만드는 일이 바로 주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계산하고 거기에 맞추어진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의식함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받아들이고, 욕구함을 통해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였다면 하나님을 먹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내 인격의 피와 살로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과정이 바로 주체성의 발휘입니다. 나에게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주체성이 나타날 때 의식과 욕구로 먹은 하나님이 제대로 소화된다면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계산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인격의 피와 살이 되면서 인격은 신적인 속성을 띄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이란 영이시고 영원하심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내 인격 속으로 들어올 때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며 ‘얘 좀 봐라. 나를 꼭 닮아가고 있구나!’라고 하시며 기뻐하시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일한 있음이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유일한 좋음이심을 믿습니다. 유일하게 있으시고 유일하게 좋음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은 있음도 아니고 좋음도 아니기에 내 마음이 이 땅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좋음보다 세상 것이 더 좋다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의 좋음을 인정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흡수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있는 것들은 모두 일시적이고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것들의 속성이 인격 속으로 들어와 체질이 됩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 홍수 때의 인간들의 모습을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한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충분히 반영하여 말과 행동을 해서 소화를 시킨 사람들의 인격은 하나님의 영적이고 영원하신 속성을 띄게 됩니다. 인격이 신이 되고 영체화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 것들을 있음으로 의식하고 좋음으로 욕구하면서 그것이 말과 행동에 나타나게 된다면 인격은 육체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쓰레기로 여기십니다.

인간쓰레기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해 던지는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점검하는 용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타인의 모습이 노아 홍수 때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인간쓰레기로 전락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전제를 설명한 뒤에 가인과 아벨을 언급합니다.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믿음으로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보실 때 ‘나의 속성과 닮은 면이 있구나!’라고 좋아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5절을 보면 에녹이 언급됩니다.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께서 에녹을 보시며 ‘나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구나!’라고 기뻐하셨습니다. 7절에 언급되는 노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도대체 아벨의 어떤 점을 보셨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일까요? 가인과 아벨은 타락한 상태에서 아담과 하와가 낳았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욕구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 저주 속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가인과 아벨은 태어났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정확히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해석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저주 속에 있었습니다. 마음의 있음을 의식함과 좋음을 욕구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이 세상 것을 향하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저주 속에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기뻐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십니다. 아벨은 어떻게 믿음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주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아벨은 자신의 체질이 세상 것을 의식하고 빨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좋음이시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좋음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제쳐두고 보이는 세상 것들만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런 나는 있을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양을 잡아서 바칩니다. 이러한 아벨의 제사로부터 구약성경 전체 제사의 특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던 아벨의 심정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저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악의 체질이 있습니다. 제 머릿속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가 제일 좋으심을 알면서도 마음의 체질은 죄악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욕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나를 이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살을 할 수는 없기에 나 대신에 제가 키운 양을 잡습니다. 하나님을 욕구하지 못하는 나 대신에 양을 죽여서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라는 심정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다 해석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석을 보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심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양은 죽일 수 있지만 곡식은 죽일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곡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또한 나를 드리는 제사의 의미가 담길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이방 종교의 제사는 신에게 뇌물을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라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세상 것을 좋아하는 나를 그대로 드릴 수 없음을 압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곡식에 자기의 죽음을 적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빗나가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다고 여기고 있는 나는 이대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곡식에 자기의 죽음을 적용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벨이 양에게 자기의 죽음을 적용했던 것처럼 가인은 곡식에 자기의 죽음을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믿었기 때문에 양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죽음을 동일시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법을 보면 실제로 나의 죽음을 곡식에 적용시키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바치는 소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제사에는 자기의 죽음이 동일시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좋아하는 상태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 것을 좋아하여 흡입하고,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 것을 먼저 의식하는 상태의 자신을 죽여서 드릴 생각은 하지 않고 산 채로 내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역겹게 느끼셨습니다.

잘난 아빠가 자녀를 보는데 자기의 잘남이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좋음의 속성이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론으로라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가인의 상태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아벨은 죄악의 체질을 갖고 있었지만, 이론으로나마 받아들인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이 양심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심정에서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건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하지? 왜 이렇게 노는 것을 좋아하지?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지? 왜 이렇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왜 이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지?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셔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양심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만을 좋아하고자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게 됩니다.

 

시간 관계상 에녹과 노아에 대한 이야기는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의 요지는 믿음이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 아버지처럼 영체화 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장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돈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깜짝 놀라며 ‘아니지!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할 일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는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소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쟤는 나이 먹어 갈수록 어쩌면 저렇게 나를 닮아가니.’라고 생각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잘난 아빠이시기 때문입니다. 못난 아빠라면 자기를 닮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잘난 아빠는 자기를 닮지 못하는 자녀들로 인해 고민합니다. 서울대 들어간 아빠를 닮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닮는 일은 훨씬 쉽습니다. 강남에 아파트를 산 아빠를 닮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닮는 일은 훨씬 쉽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면 그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다 하늘에 있는데 내 마음이 땅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으면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내 인격이 점점 하나님 되심의 특성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잘난 아빠들을 닮음에 백 분의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갈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 우리의 인격에 스며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최고로 잘난 아빠이신 하나님의 기쁨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면 얼마를 더 살겠습니까? 여전히 배우자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로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속성만을 닮아 점점 더 영체화 되어 감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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