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으로" 해야 할 이상한 행동 유형들>의 줄거리 :
"믿음으로"라는 어절이 반복되면서 믿음의 선조들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삼고 사는 사람이 볼 때 하나같이 보편적이고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행동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현실로 삼고, 그에 맞추어진 말과 행동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선조들의 짧은 이야기가 믿음으로 하는 행동의 정해진 유형을 만들어 내고 있어 살펴봅니다.
"믿음으로" 해야 할 이상한 행동 유형들
(히브리서 11:17~31)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후에는 모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야기와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은…’이라고 ‘믿음으로’라는 표현이 강조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나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믿음으로 해야 할 모든 행동들은 이상한 유형의 행동이 됩니다. 여러분은 본문에서 언급되는 믿음으로 해야 할 이상한 행동 유형들을 실제 생활 현장 속에서 하고 계십니까? 이 이상한 행동 유형들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험을 받은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시험은 유혹으로써의 시험이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을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아브라함의 시험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18절을 보면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 이어져갈 자손이 뭇별처럼 많아질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기에 이삭이 실제로 죽지는 않았지만 칼을 빼든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은 이미 죽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19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라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삭을 죽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것으로 생각했다.’라는 말이 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렸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처럼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아브라함 앞에 서게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삭을 바칠 결심을 했던 것일까요? 본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살펴볼수록 깊이가 있고 새로움이 느껴집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현실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현실이 아니었다면 이삭이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아브라함의 삶에서 이삭은 전부였으며 미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의 오해를 하나 지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자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지리라는 약속도 주셨고, 그 약속으로부터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결과로부터 우리는 이삭을 얻은 시점에서 아브라함의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마음으로 든든히 붙잡고 약속을 이루어주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계획을 약속해 주셨으니 그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굳게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만큼 아브라함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것은 곧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관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말씀해주십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자신의 미래를 관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심을 드러내시는 순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미래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이전까지 아브라함의 미래는 아브라함의 관심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고,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를 관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미래는 실제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미래는 더 이상 자기의 소관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범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국 52개 주 전체를 관할하는 연방수사국인 FBI와 지역 경찰이 대립하는 장면입니다. 예를 들어 LA에는 LAPD라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이 있고, 뉴욕에는 NYPD라는 뉴욕 경찰국이 있습니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우선적으로 지역 경찰에서 수사를 담당해서 진행합니다. 그러던 중 사건의 규모가 커지면 FBI가 끼어들게 되고 사건의 소관이 바뀝니다. 그러면 공들여 조사하던 사건을 빼앗긴 지역 경찰국에서 반발이 나오고 FBI와 갈등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닮았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역 경찰과 같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높은 권한을 가진 FBI와 같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은 FBI가 지역 경찰의 소관을 박탈하듯이 나의 권한을 박탈하시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동일한 관심을 두고 계시며 약속을 주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꼭 붙잡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이루실 것임을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아브라함에게도 적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는 본문의 말씀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방향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미래를 이야기하셨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약속이 이루어져 나갈 증표로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계신 상황에서 이삭은 아브라함이 마음으로 붙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를 붙들 처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미래 자체가 사라졌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미래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찾아올 일이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으로부터는 미래를 빼앗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미래가 없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과제는 지금 여기서 자기를 찾아와 자기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업무이자 과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며 하나님이 현실이 되어있는 상태는 하나님이 최우선의 대상이 되십니다. 따라서 최우선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일생의 업무였습니다. 날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제쳐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선적인 현실로 마주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을 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미래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너는 너의 미래에 대해서 단 하나의 생각도 갖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이삭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왜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는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지리라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 하심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계획들을 자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삭을 죽이더라도 자기의 미래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이 지금 나의 유일하고 우선적인 현실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태도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상황을 경험해 봐야만 아브라함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완전히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기에 포기하시지 않는 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내 미래는 내 소관이 아닌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임을 염두에 두고 아브라함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았다고 이해한다면 믿음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를 붙잡는 것이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앞당겨서 현실로 살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현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살지 못한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마음을 붙이고 있다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땅이라는 무대를 사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래가 이루어질 이 땅을 염두에 두는 것은 결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상한 행동 유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유일한 현실로 붙잡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미래를 완전히 빼앗긴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는 이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이상한 유형의 첫 번째는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관심사로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0장 30절에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관심을 갖고 계시니,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비롯한 내 몸 전체는 하나님의 관심사로 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관심하고 계시는 모든 것들은 내 마음에서 관심사가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 유형 중 첫 번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상한 행동 유형의 두 번째는 이 세상 사람들이 정한 원리나 순서나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는 이삭과 야곱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 장자에게 주어질 축복을 야곱에게 해줍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삭을 속인 결과였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축복이 차남인 야곱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현실로 여기는 사람이었다면 야곱을 불러다가 괘씸한 놈이라 욕하며 대차게 혼을 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에서를 불러다 장자의 축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을 현실로 삼으며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인간의 속임수로 벌어진 장자의 축복에 대한 도둑질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아시는데도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훗날 애굽에 내려간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와 차남인 에브라임을 축복하는데 손을 엇갈려서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현실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정한 원리나 순서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여기는 모든 규칙과 원칙과 원리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뜻을 우선시합니다. 세상의 원리, 규칙, 풍습보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더 중시하면서 삽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현실로 삼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몰상식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른 행동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상식적인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속사정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릅니다. 현실로 여기는 하나님께서 시키시기에 하는 일이지 세상의 상식을 따라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의 장남인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고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서 엇갈리게 축복한 것은 세상 원리에 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편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현실인 사람은 상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 유형을 보여주기 위하여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한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상식에서 어긋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상식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원리나 순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며,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여기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뜻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단 하나의 행동도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지를 따를 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상식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이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상식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습관을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상한 행동 유형의 세 번째는 세상에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말년의 요셉이 그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요셉은 훗날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뼈를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여년의 세월을 거쳐 민족을 이루게 된 후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애굽 땅을 벗어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시체가 어디에 묻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시체의 매장방식이 아닌 요셉의 마음상태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며 제2인자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당시의 애굽은 근동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왕은 세습되었기에 1인자는 아니었지만 뽑혔다는 입장에서는 지금의 미국과도 같은 초강대국의 대통령과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기근을 극복하고 나라를 잘 치리함으로써 바로의 애굽 백성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애굽에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묻힐 곳으로 가나안 땅을 언급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여기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 속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잊지 않습니다. 설령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리 인정을 받을지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여기는 저주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과 인정이 주어질지라도 그것을 달가워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인 사람들은 절대로 그들에게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언젠가 목사님들끼리 모였을 때 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한다면 여전히 저주 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교인들의 믿음의 상태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에 몰두하고 전념하고 있다.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상태를 볼 때 십만 명이 모일지라도 저주받은 상태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니 대단한 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굽 땅 전역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여기며 믿음으로 살던 사람은 요셉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을 제외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현실로 여기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에서 제외시킨 저주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전부 요셉을 인정하고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요셉은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러한 요셉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이상한 행동 유형의 네 번째는 세상의 권위를 따르지 않음입니다. 모세에 대한 이야기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모세와 관련해서 먼저 모세의 부모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셉의 시대에 애굽에 정착하게 된 야곱의 후손들은 고센 땅에서 430년 간 생육하고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요셉은 잊혔고 새로운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반역을 두려워하여 세력을 줄이고자 탄압합니다. 그 결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를 숨겨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갈대로 만든 광주리에 담아 나일강에 떠내려 보냅니다. 여기서 광주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노아의 방주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방주 역할을 한 광주리를 타고 떠내려가던 모세는 애굽의 공주가 건져서 키우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상징적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노예 신분이면서도 왕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차남인 야곱을 축복하게 되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엇갈려 축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노예의 신분이라도 왕과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왕과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다만 속사정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지금 왕과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을 들어도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있는 셈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권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눈에 보지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마주 대하고 있을 때 그 하나님께서 권세자의 말을 들으라 하시기에 듣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권세가 아무리 위협을 가할지라도 모세의 부모처럼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지 말고 광주리에 담아 떠나보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대로 할 뿐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아들을 죽이고자 했다면 아들만 죽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수를 썼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온 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권위를 따르지 않습니다. 유일한 현실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만을 따라가게 됩니다.
모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과 라합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간단히 뛰어넘기에는 참으로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들 하나하나가 한 편의 설교로 부족함이 없는 주제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점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한 행동 유형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현실이기에 미래가 없어진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 땅에서의 미래를 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상식과 습관과 원리나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의지를 추종할 뿐입니다.
또한 요셉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갖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랑하고 인정하고 아껴주더라도 그들에게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절대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부모처럼 설령 노예의 신분일지라도 이 세상의 권세와 권력자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마주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권세자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기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부모는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할 위험 앞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신 하나님이 아들을 광주리에 담아 나일강에 띄우라 하실 때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해야 할 이상한 행동 유형들의 1부입니다. 2부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현실로 느끼는 저주받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만을 반복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모든 생활 현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게 현실로 안겨주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현장에서 어떤 것이 눈에 보이고 어떤 상황이 귀에 들려도 하나님만이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현실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이상한 행동들만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