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실감이 뒤집힌 자의 이해타산법>의 줄거리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감이 뒤집히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느끼던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전적으로 달라지는 일이 이해타산의 방식입니다. 박해받고 희생하는 듯 보이는 모든 순간에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손해를 참고 감당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이해타산 상 이익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현실감이 뒤집힌 자의 이해타산법
(히브리서 11:24~40)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오늘은 주일이고 여름 휴무 기간 전의 마지막 방송입니다. 물론 저녁 7시 30분에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은 당연히 진행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본문 말씀의 내용이 쉽고 간단한 내용은 아니기에 좀 깁니다. 조금 길게 진행되더라도 여름 부흥회라 생각하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감 뒤집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은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현실감이 뒤집히는 일이 나타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느끼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느끼는 것이 현실감 뒤집기입니다.
현실감이 뒤집히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바로 이렇게 뒤집힌 현실감에서 나오는 행동을 계속해서 ‘믿음으로 누가 이렇게 했다.’라는 표현으로 반복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렇게 했다. 믿음으로 이삭과 야곱은 이렇게 했다. 믿음으로 요셉은 이렇게 했다.’라는 식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보자면 ‘현실감이 뒤집힌 아브라함은 이렇게 행동했고, 현실감이 뒤집힌 모세는 이렇게 행동했고, 현실감이 뒤집힌 라합은 이렇게 행동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현실감이 뒤집히면 철저하게 이해타산의 결과로 행동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읽지 않은 36~38절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괄호 안에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여러 가지 사본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사본 중에 이 부분이 들어있지 않은 사본들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더 권위 있는 사본에 존재하기에 따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라는 부분의 헬라어를 직역하자면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혹은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독한 박해와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손해 볼 일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박해와 고난을 감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살만한 가치가 없게 여겨졌다는 것은 철저한 이해타산에 의한 결론이었습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받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임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그 이해타산의 결과를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고통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감이 뒤집힌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이 현실인 사람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손해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더라도 그런 일 때문에 이 세상에서 손해 볼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건강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녀의 형통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나 히브리서 기자가 이러한 모습을 보았다면 ‘어디 그따위 것을 소망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는 말씀은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단한 가치를 바라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까짓 것 참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 또한 현실감이 뒤집힌 상태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로움은 곧 올바름입니다. 이 역시 현실감이 뒤집힌 상태에서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로움은 올바른 계산법에 따라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움이나 올바름이라는 표현에서 먼저 희생을 떠올립니다. 충성이나 봉사 혹은 이타심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는 계산법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계산법이 달라진 상태에서 가장 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의로움이고 올바름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해 보자면 ‘올바른 계산법을 따라 계산하라! 계산하지 못하는 바보들은 천국에 못 들어올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주받음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느낌으로써 올바른 계산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산한다고 하지만 바보같이 틀린 계산법을 고집합니다. 열심히 계산하며 살지만 바보 같은 계산법, 저주받은 계산법으로 계산하기에 이익을 추구할수록 손해를 봅니다. 궁극적 손해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여우처럼 영리합니다. 정확하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고 계산합니다. 이러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 24~27절을 보면 모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4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인 상태로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집힌 현실감에서 애굽에서의 신분을 버리게 됩니다.
그 당시의 애굽은 지금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왕자의 삶과 노예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는 삶 중에 하나를 고르는 계산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노예라는 단어에서 허름한 옷차림, 냄새나는 생활환경,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부족한 끔찍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왕자의 삶이란 노예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윤택한 삶이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현실감이 뒤집힌 상태에서 이 두 신분을 놓고 정확하고도 올바른 계산을 해냅니다. 보기에 비참하고 참담한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이익임을 알았습니다.
25절을 보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표현만을 보자면 마치 모세의 인격이 훌륭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세를 그저 훌륭한 인격이라는 덕목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면 모세처럼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고난 받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낙’이라고는 하지만 쉽게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다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이것을 버리고 고난을 자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세를 그저 훌륭하다고 하면서 모세같이 될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단순히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부귀영화 대신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고 계산적으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올바른 계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산을 못한다면 훌륭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계산을 못하는 바보입니다.
이어서 26~27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올바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15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세가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감내했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는 현실감을 뒤집는 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느끼는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현실감으로 우리의 마음을 구출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가 행하실 일을 예표로 앞서서 상징적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시고 홍해를 가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현실이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현실이 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임을 가르쳐준 지도자였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느끼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야 사십 년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정식으로 나타나 효력이 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은 그리스도 역사의 예표가 됩니다. 모세가 이러한 일을 한 것은 민족을 위한 희생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현실로 느끼는 계산을 따라서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붙잡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느끼는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느끼는 나의 죽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8절에는 유월절의 피 뿌리는 예식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28절을 보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피 뿌리는 예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육체에는 오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감을 통해 세상은 마음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눈을 오감의 대표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예식이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습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봄이란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이 마음으로 들어와서 점령하지 못하도록 마음의 출입문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 것들이 오감에 포착되더라도 내 마음의 출입문에 묻은 예수님의 피를 보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유월절 이후에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역사적으로는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취지는 우리의 삶에서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현실감이 뒤집힌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뒤집힌 현실감에서 계산할 때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홍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믿음으로 현실감이 뒤집힌 사람들은 손해로 귀결될 길을 절대로 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29절을 보면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하여 홍해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시퍼런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를 갈라서 길을 내십니다. 이는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삼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하루하루 홍해가 갈라지면서 나타나는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인 사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길만 갑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면 ‘나는 어제도 회사에 출근했고 오늘도 회사에 출근할 것입니다.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정해진 길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직장을 현실로 여기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이 정하신 길은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현실로 느껴보면 알게 됩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회사에 출근하지만 오늘 처음 출근하는 것이고 오늘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제까지 없는 길을 하나님이 내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놓인 길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현실인 사람은 이미 놓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개발서를 통해 인생의 길을 찾고자 합니다. 자기개발서가 다양한 길 중에서 어떤 한 길을 소개하면,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놓여 있는 길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현실로 느낍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떤 것들도 현실이 아닌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없던 길을 만드심을 느끼게 됩니다. 회사에 과장으로 출근하는 것이 홍해가 갈라지는 길이 됩니다. 이 길은 반복되는 길이 아닙니다. 한 번 가고 마는 길입니다. 다음 날 같은 회사로 출근하면서도 또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지나간 길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이미 열린 길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길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길로 들어갔다가 모두 죽게 됩니다. 어제 갔던 회사에 오늘도 가는 것은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길을 간다고 생각하며 살다가는 망하게 됩니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30절에 이어집니다. 30절을 보면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내가 손해 보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한편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사건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홍해는 손해 보지 않는 길이었음을 염두에 두자면 여리고 성의 함락은 손해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업무를 처리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돈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그 앞에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고 행렬 앞뒤로 무장한 병사들을 따르게 하였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매일 한 바퀴씩을 돌다가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법궤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며 행진합니다. 여리고 성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문을 닫아걸고 수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공격하려 하지 않고 눈에 뻔히 보이는 현장에서 성을 돌면서 나팔을 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 소리가 나는 곳을 보면 법궤가 있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리고 성과 같은 과제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잊어버립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과 전쟁이 붙었다면 여리고 성을 보고 집중하고 점령하고자 애를 썼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라면 설령 여리고 성을 점령했더라도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계산속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여리고 성과의 전쟁이라는 치열함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법궤를 중심에 놓고 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 주의를 집중하게 됩니다. 주의를 집중한 장소에는 바로 하나님의 있음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여리고 성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우선으로 마음이 붙잡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리고 성 같은 업무나 과제 혹은 문제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이해타산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집중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놓치게 되고 무조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업무나 과제 혹은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잃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여호수아에게는 법궤와 나팔 소리였습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여리고 성보다 법궤의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생각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문제에 대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보다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이 먼저임을 알고 하나님을 현실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현실로 여기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리고 성이 저절로 무너졌듯이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현실감이 뒤집힌 사람들이 문제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현실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 문제는 저절로 무너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31절을 보면 기생 라합이 언급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올라가면 누구를 제일 먼저 보고 싶으십니까? 만약 보고 싶은 사람 중에 기생 라합이 3등 안에 들어있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심을 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대단한 믿음의 여성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라합의 존재감은 대단합니다. 야고보서 2장을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에 맞추어진 행동을 한다는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딱 두 사람을 예로 드는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특별히 라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 엘리사와 수넴 여인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고,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린 사건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여자들이라고 할 뿐 따로 이름은 언급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에 대해서는 이름을 언급하며 특별히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강조됩니다. 야고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언급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라합이며,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장이라는 11장을 기록하면서 언급하는 인물 중 유일한 여성이 라합입니다. 라합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였기에 이토록 대단한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요?
본문에서 언급되는 대로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 즉 창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을 공략하기에 앞서 정탐꾼 둘을 보냈습니다. 라합은 그 정탐꾼 둘을 숨겨줍니다. 단순히 숨겨준 것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여 여리고 병사들에게 의심을 받고 수색을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라합이 유명해진 이유는 세상적으로 보면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 전체를 적국인 이스라엘에 넘겨주는 매국노의 일을 한 것입니다.
라합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이러한 일을 한 것일까요? 여호수아 2장을 보면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라합에게 있어서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유일한 신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데 마치 하나님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하면서도 라합과 같은 생각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 당시 모든 민족은 자기들의 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 때문에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믿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암몬이나 모압 족속과 싸워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계속된 승리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생 라합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라합은 ‘너희의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신과 다르게 살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살아있는 유일한 참 신은 너희가 믿는 하나님뿐이다.’라고 말했던 셈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는 우리처럼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 소문만으로 이러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라합은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그 계산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라합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고 빠져나가게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조국과 동포들의 운명을 적국에 넘겨주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다만 라합은 이스라엘이라는 적국을 좋아했던 것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 좋아했던 것은 일본이 아닌 돈과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이 좋아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섬기던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민족이 신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도 신이 자신들의 운명을 이끌어 가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라합은 타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신을 유일한 참 신으로 믿게 됩니다.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라합의 계산이 시작됩니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눈에 보이는 이웃을 포함한 조국의 운명을 얹어놓습니다. 저울의 다른 접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하나님의 값을 계산해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값어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국 안에는 수없이 많은 가정이 있고 가정에는 조상들과 부모와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운명이 적국에 짓밟힐 상황은 무섭고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울의 반대편 접시에 있던 것은 적국인 이스라엘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라합이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저울이 기울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합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값어치를 조국 전체의 값어치보다 비싸게 칩니다.
겉으로 보기에 모세가 한 일이나 요셉이 한 일이나 다윗이 한 일은 엄청난 업적입니다. 라합이 한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다릅니다. 다윗의 마음속에서 여겨졌던 하나님의 값어치, 모세의 마음속에서 여겨졌던 하나님의 값어치, 요셉의 마음속에서 여겨졌던 하나님의 값어치보다 기생 라합 속에서 여겨졌던 하나님의 값어치가 훨씬 더 컸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히브리서 11장이 기록될 때 그 많은 여성 중에서 하필이면 기생 라합의 이름을 명시하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야고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야고보서를 기록할 때 아브라함과 라합 두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합니다. 아브라함 마음속에서 계산되던 하나님의 값어치와 라합의 마음속에서 계산되던 하나님의 값어치가 비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값어치가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졌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적의 혜택을 경험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합의 마음에서 계산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값어치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계산된 하나님의 값어치와 거의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값어치를 얼마만큼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성령이 보실 때 아브라함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값어치가 컸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보기에 기생 라합은 별 볼 일 없는 존재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보실 때는 라합의 마음속에서 계산된 하나님의 값어치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높게 계산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세상에 나가 말하고 행동하며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하고 행동한다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값어치는 휴지보다도 못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십자가를 놓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값어치를 휴지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무서운 상태였습니다.
예배당에 다닌다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돌게 하실 때의 취지를 모르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 가운데를 걷게 하신 취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기생 라합과 같이 하나님의 값어치를 올바르게 계산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값어치를 휴지보다 못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채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현실로 느끼며 잘못된 계산을 하며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길을 고르시겠습니까?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마음속에서 계산되던 하나님의 값어치가 오늘도 주님 덕분에 우리에게도 똑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며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과 같은 하나님의 값어치를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있음을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모세 같은, 기생 라합 같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값어치가 내 가정이나 내 조국 전체보다도 더 귀하게 느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지구 전체보다도 더 값진 분이심을 실감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일깨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