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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2

녹취문: 책임, 관계 다 벗고 예수님 보며 전력 질주_태승철 (히브리서 12:1~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8.17|조회수7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책임, 관계 다 벗고 예수님 보며 전력 질주>의 줄거리 :

믿음의 삶은 목표지점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경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마음이 달려가는 경주입니다. 마음이 달려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현실감과 좋음과 중요함은 객관적인 사실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많이 불어 넣어지면 그 대상은 현실이 되고 좋음이 되고 중요함이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마음이 달려감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과 천국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보다 더 좋고 중요한 현실이 되도록 판세를 바꾸기 위함입니다.

 

책임, 관계 다 벗고 예수님 보며 전력 질주

 

(히브리서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휴가 기간 동안 태풍도 지나갔고 무더위가 많은 지역에서 계속 되고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한 달 동안 얼마나 성장했고 얼마나 많은 열매로 확인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되돌아보며 함께하는 앞으로의 시간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책임이나 관계를 다 벗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있는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키워드로 요약해 보자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자.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는 십자가에서 부활과 승천을 거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결론부가 시작되는 시점에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독특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의 경주입니다. 경주를 위해서는 목표지점이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표지점이 설정되면 출발점에서부터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보며 이 마음의 경주를 할 것을 요청합니다. 마음이 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경주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경주자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100미터 달리기 선수의 마음이 오직 목표지점을 향하듯이 우리 마음도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100미터 달리기 선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출발선으로 해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을 달려가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좋으심을 실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천국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삶은 별것 없습니다. ‘아, 참 좋다! 오늘도 좋다! 내일도 좋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돈입니다. 돈은 가지면 바로 좋음이 느껴집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라면 건강을 회복할 때 좋음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도 하나님의 좋음은 돈이나 건강 혹은 승진이나 자녀의 형통같이 저절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좋으심이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저 성경에서 하는 말이기에 목사님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감입니다. 어떤 대상이 내게 우선적인 현실이 되고, 그 대상의 존재감이 크고 중요하게 느껴지게 되고, 그 대상이 좋게 느껴지는 것은 내 마음이 얼마나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 대상에게로 내 마음이 날마다 달려가기 때문에 우선적 현실이 되고, 최고의 존재감을 띠게 되며, 중요하고 값진 대상이 됩니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평안도 감사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최고의 요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평안감사가 자기 자리에 관심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군침 흘리는 자리라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객관적으로 최고로 우선적이고, 최고로 좋은 것, 최고로 중요한 사실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마음을 쏟아붓는 대상, 마음이 달려가는 대상이 최고로 중요한 사실이자 우선적 현실이 됩니다.

그 대상이 객관적으로 전혀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우선적으로 느껴지고, 좋은 것으로 느껴지고, 중요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것을 좋다고 느끼기에 스스로 속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귀 사탄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전혀 좋지 않은 것을 향하여 마음이 달려가게 합니다. 일단 마음이 달려가기 시작하면 그것이 객관적으로 좋은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달려가는 대상이 내게 최우선의 대상이 됩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본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우선적 현실이 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는 정말로 좋다고 여길 수 있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승진이나 사업의 흥망은 물론이고 심지어 내 몸의 죽음조차도 실제로는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취직을 못 해서 벌이가 전혀 없는 상태일지라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니며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삼고 살아갑니다. 단지 그것들이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중요하지도 않고 우선시할 필요도 없는 일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삼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지만 본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중요할 수도 없고, 우선시할 수도 없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객관적 좋음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좋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절대로 쓰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음 쓸 때마다 창피하고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좋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것들에게 마음이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바로 이 판세를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만을 전부인 것처럼 여기던 마음의 판세가 날마다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반복하는 동안 뒤집힙니다. 경주자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목표지점으로 삼아서 날마다 달려가기를 반복할 때 비로소 객관적으로 진짜 우선시해야 하고, 진짜 중대하고, 진짜 좋은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전에 그렇게 좋았던 것들, 그렇게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중대시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질 때는 이론으로는 천국이 좋다고 인정하지만, 실제 마음의 느낌상으로는 전혀 천국에 대한 좋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주자의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향해 달려갈 때 판세가 뒤집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만을 좋음으로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 올림픽 100미터 경기에 나가는 선수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늘로 전력 질주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절에서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주요’라는 표현에는 예수님이 믿음의 창시자이자 선구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이 진짜 좋음이라는 것을 우리 앞에 드러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객관적으로 진짜 좋으신 하나님을 좋음으로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음으로 느끼는 상태가 중단되고 마음으로 바라지 않는 온전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날마다 전력 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다만 이러한 말씀을 접할 때 많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은 저절로 좋다고 느껴집니다. 승진이나 자녀의 형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은 좋음에 대한 느낌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증인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한 증언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마음에 보이는 상황을 로마의 경기장에 비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경기장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관중이 들어와 있고 경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경기에 달리기로 참가한 선수이고,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응원하는 관중들이 증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조들을 언급했습니다. 그 외에도 본문 말씀과 같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관중처럼 앉아서 나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경주를 얼마나 잘 달리고 있는가를 구경하면서 ‘가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라! 전력 질주하라!’고 응원을 하는 셈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관객이 되어서 응원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달려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길을 내셨고 당신 스스로 달려가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달려감으로써 기필코 판세를 뒤집어엎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들보다 우선적인 현실로 느끼고, 가장 중대한 대상으로 느끼고, 생각만 해도 좋아지는 상황이 되도록 판세를 뒤집어엎으라는 것입니다.

 

증인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이 진짜 객관적인 좋음임을 증언하는 자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이 세상에서 돈이 좋고 건강이 좋다고 여겨지는 이유도 증인들 때문입니다. 바로 거짓 증인인 마귀와 사탄입니다. 마귀와 사탄은 눈에 보이는 건강이 좋고, 장수하는 것이 좋고, 돈이 좋고, 승진이 좋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거짓 증언이고 속임수입니다.

서른 살에 회사의 사장이 된다면 주변에서는 모두 우러러보며 좋은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사장이 되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좋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해서 100세를 살아도 그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형통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도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거짓 증언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속에서 ‘사장이 되는 것이 좋다, 건강한 것이 좋다, 자녀의 형통이 좋다.’라고 거짓증언을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좋음은 이 거짓 증언에 근거합니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마귀의 증언을 듣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배웁니다. 건강의 좋음과 돈의 좋음과 승진의 좋음과 형통의 좋음을 배우며 믿게 됩니다. 자녀의 마음 또한 거짓 좋음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으로 달려가고, 돈으로 달려가고, 형통으로 달려가고, 승진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마음이 달려가는 동안 그것들이 주어지면 좋아하지만, 그것은 진짜 좋음이 아닙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음으로 여겼던 자들은 죽고 나서 부활하여 심판대 앞에 설 때 깜짝 놀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이 전혀 좋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쓰기조차 창피한 것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애타게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마귀에게 속아서 사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좋음의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는 좋음이 없습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마음으로 경주하여 달려감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음과 천국의 좋음을 느꼈습니다. 아벨도 에녹도 아브라함도 그렇게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최근에 태풍 카눈이 지나갔습니다. 태풍이 오면 방송에서는 태풍 대비법을 가르쳐줍니다. 너울성 파도가 일어나는 바닷가에 가지 말라, 지하차도로 들어가지 말라, 창문을 꼭 닫고 틈새를 테이프로 붙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따라 태풍을 대비합니다. 태풍에 대한 증언에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구속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1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증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좋음과 천국의 좋음이 구속력을 띄고 있었고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좋고 천국이 좋다고 해도 말과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구속력을 띄지 못한다면 온전한 믿음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 종교인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판세가 뒤집히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경주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가르쳐줍니다. 1절의 하반절을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마음이 느끼는 부담을 가리킵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발에 모래주머니를 찬다면 제대로 달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책임감, 의무감, 당위감은 마음의 모래주머니나 납덩이 주머니처럼 작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과 의무감과 당위감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담을 벗어버리지 못하여 하늘로 달려갈 수 없다면 하늘의 좋음도 느낄 수 없기에, 끊임없이 마귀의 증언을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좋은 줄 알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판세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일단 판세를 뒤집으려면 책임감과 의무감과 당위감이라는 부담을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빠에게는 아빠의 책임감이 있고, 엄마에게는 엄마의 책임감이 있고, 직장에서는 직원으로서의 책임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책임감과 의무감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에는 마귀의 증언을 따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게 여기는 삶의 판세는 뒤집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삶을 경주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100미터 경주에 나간 선수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이 학생은 달리기를 잘해서 선수로 뽑혔지만 실제로 전공은 다릅니다. 달리면서 두고 온 과제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 외에도 대학생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족관계, 교우관계 등을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100미터 경주에 출전한 이상 선수는 달리는 사람입니다. 달리며 애인에게 전화를 할 수 없고 과제를 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은 손에서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떼놓을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만, 경기장에 들어가는 선수는 누구도 핸드폰을 보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오직 100미터 달리기의 목표지점을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1등을 하든 2등을 하든 설령 꼴등을 할지라도 오직 전력 질주할 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러합니다. 지금 직장에 있을지라도 직장이 부여하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책임감과 의무감이라는 납덩이 주머니와 모래주머니를 벗어버리고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로 달려갈 때 마음에서 직장이라는 판세가 뒤집힙니다. 직장에서는 월급과 승진이 최고입니다. 이 판세를 뒤집어엎어서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최고로 여깁니다. 더 이상 월급과 승진이 최고라는 마귀의 증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좋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이 마음에서 느껴질 수 있도록 경주해 나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바라볼 대상은 일이 아닌 예수님입니다.

2절을 보면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와 같이 아무것도 없으셨으며, 아담이 벗었으므로 부끄러워했듯이 헐벗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어떤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음이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없음과 헐벗음을 부끄러워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마치 거지 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라고 부끄럽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참으신 이유는 진짜 좋음이신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경주도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로 가고 볼 일입니다.

100미터 경주에 나간 선수도 생활 속에서 처리해야 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경주에 들어가면 삶의 모든 부담과 책임과 의무를 다 잊고 오직 목표지점을 향해 전력 질주합니다. 우리도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로 마음이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어떤 상황, 어떤 현장,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언제나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판세가 뒤집힙니다.

이어서 ‘얽매이기 쉬운 죄’ 또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쉽게 말해 내 주위에 위치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와 인연이 있고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들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모든 무거운 것’이 스스로 마음으로 책임감과 의무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얽매이기 쉬운 죄’는 내 마음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이유는 빗나감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끌어서 과녁에서 빗나가게 하는 모든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내 마음을 잡아끄는 것들이 있다면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잡아끄는 대상이 돈이라면 ‘돈아! 나중에 보자. 일단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아버지 보좌 우편까지 가는 달리기를 해야 한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더라도 ‘몸아! 아프지만 잠시 뒤에 보자. 일단 내 마음이 경주를 하고 나서 아버지께로 가고 난 뒤에 보자.’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전력 질주를 할 때 판세는 바뀝니다.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돈의 문제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옮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책임도 의무도 마음을 잡아끄는 것들도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책임이나 의무를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잡아끄는 것들에 관심하기 전에 잠깐 보류하는 것입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경기에 임할 때 손에서는 핸드폰을 놓고 인터넷에서 관심을 끊고 오직 목표지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 목표는 보좌 우편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서 보좌 우편까지 달려가겠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날마다 모든 생활 현장에서 경주를 계속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달려가면 삶의 판세도 뒤집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이미 좋음이 확보된 상태에서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충분히 의식된 상태에서 나오는 말들, 천국이 현실임을 감안한 상태에서 나오는 행동들로 우리의 삶을 채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 관계 다 벗고 예수님 바라보며 전력 질주 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분명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주님을 따라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에서든 우선 그 현장에서 전력 질주하고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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