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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 스태미나 위한 영문 밖 은혜 맛집>의 줄거리 :
히브리서는 마지막에 강력히 호소합니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러면 영문 밖 십자가로 가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먹자는 것입니다. 왜요? 마음의 스태미나를 강하게 하여 날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전력 질주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달려가기에 지치면 안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달려갈 힘은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때만 주어집니다.
마음 스태미나 위한 영문 밖 은혜 맛집
(히브리서 13:1~25)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마음의 스태미나 증진을 위한 영문 밖에 은혜의 맛집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문 밖이란 진영의 바깥으로써 우리 삶의 현장 바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영문 밖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맛집에 가서 은혜를 먹을 수 있고 마음의 스태미나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체력에는 근력이나 순발력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습니다만 스태미나라고 한다면 특별히 지구력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박지성 선수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때의 일입니다. 전후반 90분을 뛴 거리를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보면 박지성 선수가 뛴 거리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당시 박지성 선수가 속해있던 구단의 퍼거슨 감독은 이러한 박지성의 스태미나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스태미나는 육체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창조적이고 지적인 작업에도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 문자 선교를 위해서 책을 저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탈고해 출판사에 넘겼고 교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앉아서 책을 저술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2시간이 지나면 몸에 신호가 오고, 최대 3시간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스태미나에 한계가 온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스태미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본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유대인 출신으로써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일이 자꾸 발생하였기에 이들을 위해 히브리서는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자면 결국 스태미나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늘의 빛을 맛본 그리스도인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가장 큰 이유는 날마다 하늘 경주를 전력 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 경주를 전력 질주할 수 있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마음의 스태미나가 없으면 5분 10분 기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일에 대해 스태미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마음을 쓸 수 있는 것을 보자면 마음의 스태미나가 상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유독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을 향한 마음의 스태미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9절을 보면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스태미나를 굳건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굳건한 스태미나가 없으면 하늘 경주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문 밖에 있는 은혜 맛집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 하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의 스태미나를 보강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마음의 스태미나를 보충할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결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게 되었던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뒤에 하늘의 빛을 맛보고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날마다 하늘을 향하여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다른 일에 소진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매여서 세상과 씨름하는 동안 마음의 스태미나는 소진되어 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국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마음의 스태미나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눈에 보이는 유대 종교를 향해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날마다 하늘 경주를 전력 질주하기 위해 마음의 스태미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스태미나가 소진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음의 스태미나가 소진될 때는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3절을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충만하다면 형제 사랑과, 손님 대접과, 학대받는 자를 염두에 두고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형제 사랑이나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이해가 되지만 손님 대접이 어떤 면에서 하늘과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삼국시대 이전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손님을 위한 숙박시설이 없지는 않았으나 요즘 같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던 자들은 현지인들의 도움 없이는 사역을 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을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마음의 스태미나가 충분해서 하늘 경주를 지속할 수 있다면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만족 거리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정한다면 이 땅에서 형제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는 대신 형제를 사랑하게 되며, 손님을 대접하고, 학대받는 자를 염두에 두고 그들을 위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이상한 마음의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타인에 대한 민감성입니다. 하늘로 전력 질주하는 경주자는 몸이 있는 세상에 대해 죽고 마음이 떠난 자들입니다. 마음이 몸을 떠났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몸으로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도 둔감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 몸과 몸이 있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훨씬 둔감합니다.
마음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면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집니다. 얼핏 ‘당신도 나처럼 마음이 몸을 떠나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끝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들을 신경 쓰고 배려하며 고려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늘을 향하여 날마다 경주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당시 찾아오는 손님이란 복음을 전하는 나그네였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어떤 유익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손님을 대접함에 있어서 아까워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나와는 무관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하늘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떨어졌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4~5절에서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떨어진 증거로써 나타나는 탐심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를 버리고 음행을 한다든지, 돈을 사랑함은 하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이 세상에 붙잡혀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특히 돈에 대해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가진 재산이 다릅니다. 백억 원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만 원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은 비록 재산이 천만 원만 있을지라도 만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백억 원이 있든 천만 원이 있든 돈의 액수에 상관없이 내 만족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돈을 보면서 만족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늘을 보며 만족하라는 뜻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꿔 말해 돈이 없어서 아쉽거나 돈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마음의 스태미나가 떨어져서 하늘 경주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늘 경주를 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돈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돈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늘 마음으로 하늘 경주를 하는 사람은 마음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로 간 사람들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친하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무서워할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련히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스태미나가 충분해서 날마다 하늘로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험이시며, 하나님이 나의 계좌가 되시며,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가 되심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에 돈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돈이 있든 없든 마음의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믿음이 없기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돈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로 전력 질주할 수 있는 마음의 스태미나를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영문 밖으로 나가서 은혜를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9절을 보면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음식과 은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듯이 은혜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음식에 대한 교훈을 떠올려 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정하여 먹어야 할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구분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음식에 대한 교훈에 매이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무엇을 먹느냐는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내 마음의 강력한 스태미나를 제공하는 것은 음식이 아닌 은혜입니다. 그리고 내가 먹어야 될 은혜라는 메뉴를 제공하는 맛집은 바로 영문 밖 십자가입니다.
영문 밖이란 진영 바깥 혹은 성문 바깥을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을 쳤습니다. 중앙에 법궤가 들어있는 성막을 두고 열두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진을 쳤습니다. 속죄 제사를 드릴 때는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성막 안으로 들어가서 법궤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희생제물의 고기는 진영 바깥으로 나가서 불살라 태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진영 바깥은 죽음의 기운이 맴도는 광야였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진영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영문 밖은 죽음의 장소였고 버려지는 장소였고 출교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제단은 영문 밖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성 바깥이었습니다. 영문 밖은 누구나 다 싫어하고 꺼리는 버림의 장소였고 출교의 장소였으며 치욕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영문 밖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대 종교인으로 성막에서 봉사하던 자들은 영문 바깥으로 나가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영문 바깥에서 일어난 속죄제의 제물이신 예수님을 먹을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유대 종교에서 성전과 믿음의 의미는 퇴색되었습니다. 영문 안쪽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섬기는 삶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영문 밖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스태미나를 기르기 위해서는 영문 밖 십자가를 유일한 은혜의 맛집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을 향한 마음의 스태미나가 없으면 전력 질주하여 하나님께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 다른 모든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받은 은혜도 낭비되고 소멸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반면에 하늘을 향해서는 완전히 에너지가 고갈된 모습을 보입니다. 비단 돈뿐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서는 왕성한 에너지를 보이지만 유독 하늘에 대해서는 에너지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에너지원 자체가 고갈된 상태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향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써의 스태미나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생활 현장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은 영문 밖 십자가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출교당하시고 버림당하시고 거부당하셔서 완전히 인간사회로부터 쫓겨나셔서 영문 밖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마음은 마땅히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 십자가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삶의 현장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것들을 붙잡고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의무감을 발동시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상태를 지속합니다. 몸이 놓인 생활 현장에서 영문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몸은 어쩔 수 없이 생활 현장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생활 현장을 떠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영문 밖으로 가지 못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스태미나 소진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전력 질주할 수 있는 원기가 소진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생활 현장에 묶여있는 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하늘을 향할 수 없고, 영문 밖으로 쫓겨나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생활 현장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예수님은 그 생활 현장이라는 영문 밖으로 쫓겨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마음은 몸이 있는 생활 현장을 떠나 영문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영문 밖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은 자라는 동일시의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예수님을 먹게 되면 마음으로 부활 승천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달려갈 힘이 생겨납니다. 마음에 힘이 생기면 생활 현장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손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생활 현장에서 그들을 위해 사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 의무나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완벽한 행복이고 자유입니다. 내 몸을 의식의 중심에 놓으면 나를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불행의 함정입니다. 인생이 무겁고 질퍽거리고 한없이 축축하고 우울하다면 내가 나를 위해 살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문 밖으로 나가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떠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에 남에게 알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책임감, 부담감, 의무감을 등지고 삶의 현장이라는 영문 바깥으로 나갑니다.
다시 13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하였습니다. ‘치욕을 짊어지는 것’은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의무나 책임도 질 수 없는 가장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올바른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나약함과 지독한 죄성을 가진 자임을 받아들일 때 영문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쫓겨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여전히 몸이 있는 삶의 현장에 남아있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몸이 삶의 현장에 있어도 마음은 영문 밖으로 나가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동일시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은혜를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저의 죽음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저도 이 영문 안쪽 삶의 현장에 대해서는 죽은 자입니다. 주님이 쫓겨나셨음으로 나도 쫓겨납니다. 가정에서 쫓겨난 자이며, 직장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삶의 현장에서 쫓겨나서 죽은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이 은혜를 먹음을 통해 힘차게 하늘을 향해 솟구칠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이 땅에서는 성령님께서 나를 장갑 삼아 사시게 됩니다. 그때 삶의 모습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위할 수 있는 스태미나로 나타납니다. 나에게 매여 있는 동안에는 내 일조차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12장에서 피곤하고 지치고 좌절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내 삶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때 피곤하고 지치고 좌절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삶의 현장을 떠나 영문 밖으로 쫓겨나신 예수님께로 나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면 하늘로 치솟을 수 있는 스태미나가 생겨납니다. 이 마음의 스태미나가 지속적으로 주어질 때 이 세상을 향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존에 다른 사람을 위해 살지 못했던 이유는 그럴 스태미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을 챙길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챙기거나 배려할 수 없습니다. 전부 마음의 스태미나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있으면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스태미나도 생겨납니다.
한편 14절을 보면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늘을 향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몸이 거하는 생활 현장 속에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것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것에 마음을 쏟지 말라 요청합니다. 이 세상의 가변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은 가변적인 대상에 쏟아져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살면서 할 일은 주어진 시간 속에 영원성을 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내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충분해야 합니다. 영문 밖 은혜의 맛집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늘로 치고 올라갈 스태미나를 얻은 자들에게는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 스태미나도 생겨납니다.
은혜를 먹음으로써 마음의 굳건함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늘을 향한 마음의 스태미나로 충만한 자들은 사람을 향한 마음의 스태미나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 마음의 스태미나는 오직 영문 밖에 계신 십자가 예수님께 나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함으로써만 지속적으로 생기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생기는 마음의 스태미나가 오늘도 여러분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로 가려 해도 기운이 없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려 해도 기운이 없습니다. 오직 내 마음의 기운은 몸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할 뿐입니다. 마음이 몸으로 구성된 나를 향하고 살아왔음을 통탄합니다.
오늘도 마음이 영문 밖에 계신 주님을 향해 생활 현장을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먹음으로써 하늘을 향하여 치솟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럼으로써 생활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문제를 하늘의 스태미나로 감당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