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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작은 구원’ 버리고 ‘큰 구원’에 올인하라>의 줄거리 :
'큰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이 큰 구원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라 하십니다. 큰 구원을 말씀하심에서 우리는 작은 구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 구원에 집착하느라 큰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가게 됩니다. 작은 구원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얻는 구원이고 큰 구원은 조물주와의 관계에서 얻는 구원입니다. 큰 구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유념해야할 내용을 살펴봅니다.
‘작은 구원’ 버리고 ‘큰 구원’에 올인하라
(히브리서 2:1~10)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본문 1~5절까지는 ‘큰 구원’이라는 표현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5~10절까지는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이러한 뜻에 유념하면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구원에 집착하게 되면 큰 구원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소탐대실의 치명적인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부분의 원문을 보면 ‘휩쓸려서 표류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 유실되는 것과 같은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한편 3절을 보면 무엇에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같이 ‘큰 구원’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복음을 들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분명하게 들은 말씀을 유념하지 않음을 통하여 큰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가게 된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치명적인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1절의 말씀대로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들은 것 속에는 큰 구원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증언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중에 반복하는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유념하라 언급한 ‘들은바’란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한 영적 사실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사실들을 유념함으로써 큰 구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들은바 모든 증언의 내용이란 사상이나 막연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러한 증언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삼중으로 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천국 현실감으로 살아감이 큰 구원입니다.
이러한 큰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을 유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실제 생활 현장에서 언제나 삼위 하나님과 삼중으로 연합하는 일에 유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반드시 큰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란 모세나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견고하다’는 것은 구속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으로써 출애굽의 구원을 받았고, 홍해가 갈라지면서 애굽 군대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멸절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주변국들을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침입하게 하십니다.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40년쯤 뒤인 70년경에는 성전까지 파괴되고 지구상에서 유대 나라 자체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후로 유대 민족은 거의 2,000년 동안을 흩어져 살다가 2차 대전 이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고서야 다시 모이게 됩니다.
천사에 비유되는 모세나 선지자들에 의해서 전해진 메시지도 유념하지 않는다면 보응을 받는데 하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천사나 선지자와도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전해주신 구원에 대해서 유념하지 않는다면 보응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신 큰 구원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게 된다면 어떤 보응을 받게 될 것인지는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는 히브리서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받은 구원을 지키지 못하고 구원을 이루지 못한 채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러한 경고가 히브리서 전편에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러한 히브리서를 단단한 가시를 포함하고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야고보서가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일컬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틴 루터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와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을 성경의 목록에서 제외시키고 신약성경 중의 외경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틴 루터의 이해와 태도는 결코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을 따라서 큰 구원을 놓친다는 말씀을 보자면 ‘작은 구원도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큰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가는 상황과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는 말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큰 구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까지 포함하여 구원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면 ‘안 좋은 상태에서 벗어남’이라고 간략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원은 물에서 건져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담 삼아 늦게 결혼하는 사람에게 ‘구제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안 좋은 상태에서 벗어남’이라고 이해한다면 결혼은 구원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돈 문제나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는 상태에서 돈이 있는 상태가 되면 돈 문제에 대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가 되면 건강 문제에 대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살면서 갖게 되는 모든 바람은 결국 구원을 향하게 됩니다. 안 좋은 상황에서 벗어남을 바라기 때문에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보자면 큰 구원이 의미하는 바가 특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큰 구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유념하라고 합니다. 큰 구원이 언급된 이유는 작은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큰 구원을 놓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작은 구원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큰 구원과 작은 구원은 절대로 동시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큰 구원은 무엇이고 작은 구원은 무엇이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서 1장 25을 떠올려 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는 표현으로부터 큰 구원과 작은 구원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큰 구원이 조물주를 좋아하고 간절히 찾는 바람이라면, 작은 구원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많이 좋아하고 간절히 찾는 바람입니다. 모든 인간은 둘 중 하나의 구원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섬김을 식당에서 웨이터가 손님을 시중드는 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이란 섬기는 대상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마음가짐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돈이 없는 상태에서 돈이 있는 상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돈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섬기는 사람이 돈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돈이 없는 것은 안타깝지 않은데 하나님이 없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여 하나님이 있는 상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김이고 이렇게 하나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큰 구원입니다.
돈과의 관계에서 받고 싶은 구원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고 싶은 구원의 범위를 넓히면 피조물인 만물과의 관계에서 받고 싶은 구원이 작은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을 있게 하신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고 싶은 구원이 큰 구원입니다. 구원에 대한 마음가짐 자체는 동일합니다. 구원은 곧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바라느냐가 큰 구원과 작은 구원을 구분합니다.
우리가 피조물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바라고 있다면 작은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없음을 아쉬워하며 바라는 큰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허락받아 구원받은 자들이 이 큰 구원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간다면 무시무시한 보응을 받게 되는 참사가 너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소탐대실의 과오는 너무나 흔합니다. 작은 구원을 얻으려고 하다가 큰 구원을 놓칩니다. 히브리서의 저술 목적은 바로 이러한 참사를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몸을 통해 모든 피조물과 관계합니다. 배우자, 부모, 자녀, 이웃, 직장 동료를 포함하여 우리가 대하는 모든 대상과 돈을 비롯한 각종 사물은 모두 피조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그것과의 구원을 원하지 않아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에서 버리더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마음에서 자식을 끌어안는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끌어안은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해서 자식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식은 창조주 하나님 손에 남아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버려야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가 쉽습니다.
내게 어떤 피조물이 없음을 아쉬워할 때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작은 구원을 바라게 됩니다. 이렇게 작은 구원을 바라기에 일어나는 일이 종교의 탄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큰 구원을 받은 사람들조차 여기에 넘어갑니다. 큰 구원을 받았으면 피조물들은 내가 가진 조물주의 손에 놓여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른 채 큰 구원을 받았음에도 작은 구원에 집착함으로써 큰 구원을 놓치게 됩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되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구원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유대 종교로 돌아감이었습니다. 종교를 붙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란 피조물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피조물을 갖겠다는 작은 구원에 집착하는 자들이 신을 동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앞선 7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기를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발아래에 만물이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8절 하반절을 보면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언급과는 별개로 우리의 체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봐도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는 현상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나 만물을 복종하게 하시는 왕으로 등극하시리라는 생각을 갖고 이 구절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 재림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구원을 상실하게 되는 비극과 관련하여 만물이 예수님께 복종하는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피조물에 집착하게 될 때 작은 구원을 바라게 됩니다. 이 작은 구원이 발생할 때 큰 구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는 일을 물리적 차원에서의 대변혁과 같은 일로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재림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한다는 말씀은 의미를 갖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 만물이 복종하는 일이 일어나야 할 곳은 바로 나 한 사람 개인의 마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점을 명심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에서 만물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되고 작은 구원에 집착하지 않고 큰 구원을 보존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에게 만물이 복종하는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뜻은, 내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작은 구원을 바라고 있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세상의 피조물을 대합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돈이나 집이나 차 등의 물건들을 대하고, 직장에서의 승진 같은 일들도 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몸이 있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향해 바람을 가지고 작은 구원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한 세상의 피조물들이 내 마음에서 자기를 뽐낼 수는 없습니다. 배우자도 자식도 내 마음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없다면 작은 바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내 마음을 가져갔다면 배우자에 대한 바람이 생깁니다. 작은 구원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작은 구원들이 바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작은 바람들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그 작은 바람들의 대상인 피조물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인 큰 구원을 놓치게 됩니다.
본래 큰 구원인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다면 몸으로 만나는 모든 것들은 마음으로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손에 다 담기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나를 아들로 삼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당신의 뜻대로 나를 사랑하시고 필요한 대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피조물에 집착하고 작은 구원을 바란다면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인 큰 구원은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내 몸으로 만나는 모든 피조물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에 이르기까지 마음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구원을 원하는 상태를 일으키는 그런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내 마음 앞에서 알짱대지 못합니다. ‘나와의 관계에서 바람을 가져라!’라고 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뽐내지 못합니다.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있고, 내 마음은 만물 위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작은 구원을 탐하다 큰 구원을 놓치는 일은 없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음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큰 구원’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현장에서 우리가 세상을 향해 갖게 되는 순간순간의 바람은 작은 구원입니다. 이 작은 구원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구원에 집착한다면 큰 구원으로부터는 흘러 떠내려가는 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작은 구원을 바라게 되는 대상인 모든 피조물을 발아래에 두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좌 우편에 계시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까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다양한 소재를 통해서 큰 구원을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아무쪼록 히브리서 말씀을 나누는 동안에 작은 구원을 완전히 버리고 큰 구원에 올인하는 달인들이 되고, 좀 더 견고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상실된 나를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만물을 발아래에 두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바람을 갖는 작은 구원에 집착함을 버리고, 그 대신 삼위일체 조물주 하나님과 삼중의 연합을 이루는 큰 구원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