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몸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공용>의 줄거리 :
예수님의 몸은 예수님과 나의 공용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남녀노소 공용입니다. 빈부귀천 공용입니다. 동서고금 공용입니다. 이 사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의 핵심이지요.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마호메트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 자기 몸을 다른 사람의 마음이 입을 수 있는 몸으로 내어 준 사람도 내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 몸을 마음이 입으면 나타나는 특성들이 있어 알아봅니다.
예수님 몸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공용
(히브리서 2:11~18)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탁월하심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용(共用)하면 떠오르는 말들이 있습니다. 남녀공용, 공용주차장, 아파트의 공용면적, 직원 공용자동차 등이 있고, 공원이라는 말은 공용정원의 준말이고 대중교통은 공용교통수단입니다. 이처럼 큰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로서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모든 사람에게 공용으로 내어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공용입니다. 심지어 동서고금과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의 몸은 공용입니다. 이 사실이 큰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상을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리를 가르치거나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신 분도 아닙니다. 종교의 창시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내 마음이 입도록 내어주신 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공용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든 인간이 공용으로 입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라나 민족이나 인종 등 어떤 처지에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심각한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라 하더라도 상관이 없고, 아무런 재산이 없는 노숙자든 엄청난 재산을 가진 재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기를 바라시며 당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참으로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마호메트 같은 인물들을 보면 모두 훌륭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해도 인간으로서 자기 몸을 공용으로 내어주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위인일지라도, 아무리 훌륭한 정치가나 예술가일지라도 그 누구도 자기의 몸을 다른 사람의 마음이 입을 수 있도록 내어준 사람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 점을 놓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의 이유는 예수님의 몸이 공용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마음은 몸을 입어야만 깨어나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몸이 없으면 영인 마음은 깊은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옷처럼 몸을 입어야 하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공용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어벤저스의 영웅들 중에 아이언맨을 보면 쇠붙이로 만든 옷을 입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마찬가지로 앤트맨에서는 나노과학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몸이 나노의 크기로까지 작아지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처럼 특수한 옷을 입고 초능력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렇게 나타나는 특성, 네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용 몸을 입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특성은 거룩함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공용이기에 누구나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입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는데 기독교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몸을 공짜이자 공용으로 내어주셨기에 누구라도 입을 수 있습니다. 다만 멋지게 잘 만들어진 공원이 있어도 이용하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듯이 예수님의 몸도 이용할 수 없다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몸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거룩함이 나타납니다. 거룩함이란 이 세상적인 속성이 내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세상적인 속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세상에 속해 있는 몸 때문에 생긴 자아의식이 깨어지는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으면 육체의 몸을 입고 있을 때 느끼던 자아의식은 없어집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자아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자다, 나는 남편이다, 나는 아버지다, 나는 회사의 직원이다.’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은 모두 세속적인 자아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거룩함이 임하게 되면 기존의 자아의식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대상도 바뀌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을 향하게 됩니다.
거룩함이란 간단히 말해 세상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구분되되 좋은 방향으로 구분됨입니다. 감옥에 갇혀 격리되듯이 나쁜 방향으로의 구분됨은 거룩함일 수 없습니다. 거룩함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면서 이 세상에서 좋음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함은 곧 최고로 좋음입니다. 이러한 거룩함이 임하면 이 세상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됩니다. 좋음을 위해서 이 세상 것은 전혀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함은 오직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많이 배워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며, 돈을 많이 벌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며, 외모가 출중하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은 내 마음이 육의 몸을 벗고 공용이신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만 일어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어떤 것도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좋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 입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육의 몸 대신에 예수님의 몸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침 흘리며 추구하고 따라가는 세상의 좋은 것들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좋은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을 입었을 때 나타나는 거룩함이라는 첫 번째 특성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지 않고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없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진 재벌도, 엄청난 권세를 가진 왕이나 대통령도, 심오한 지식을 가진 대학 총장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연예인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몸을 입음으로써 이 거룩함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용 몸을 입을 때 나타나는 두 번째 특성은 예수님과 형제 됨입니다. 거룩함이 공통의 유전자가 된 자들은 예수님과 한집안 사람이 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입고 거룩해질 때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수님의 형제가 됩니다.
재벌가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보며 자신이 재벌가에 소속되었음을 의식합니다. 대통령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보며 대통령의 가문에 소속되었음을 의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몸을 입고 거룩함에 이르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의식하고 예수님과 한집안 사람임을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형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공용으로 제공된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 이러한 자아의식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공용 몸을 입을 때 나타나는 세 번째 특성은 죽음에 대한 무서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무서움을 느끼지만 육체의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체를 통해 마음이 달라붙게 된 것들을 잃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몸으로 접하는 대상은 모두 세상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마음이 접하고 있던 세상 것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마음은 죽음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무서움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기도하신 이유는 잃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엇을 잃는 것을 무서워하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장면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는 것에 비할 만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평강을 유지하였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무서워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이 붙어있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떨어져야만 했던 대상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저주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저주란 곧 하나님과 떨어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께 붙어있던 예수님은 우리가 처한 저주의 상황으로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떨어져 있던 저주 속으로 던져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떨어지는 일을 무엇보다도 무서워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에서 “제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떨어지는 일을 가장 무서워하셨기에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는 예수님이 무서워하는 일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는 동안에는 육체의 죽음이 가장 무섭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이고 있던 것들을 더는 보지 못하고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은 가족일 수도 있고, 재산일 수도 있고, 돈을 쓰면서 즐겁게 사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몸이 죽게 되면 이 모든 것을 다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되면 육체의 몸으로 만나는 대상과는 무관해집니다. 마음이 접하는 대상이 달라졌기에 육체의 죽음이 전혀 무서워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되면 무서워할 일은 단 하나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서 떨어져 나오는 일만을 무섭게 여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서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서움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도 무서움이 있었습니다. 천국 현실감을 놓치는 일을 무서워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과 떨어지는 일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이들은 세상에서 몸이 죽는 일에 대해서는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고 천국 현실감을 놓치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무서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하늘을 놓칠까 봐 무서워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으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이셨던 그 무서움을 갖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무서움은 전혀 갖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음은 곧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겪게 된 모든 불행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불행의 근원은 바로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게 됨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무서움의 감정뿐만이 아닙니다.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근심은 모두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5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었기에 마귀는 육체의 죽음을 인질로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불안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15절 말씀에 가려져 있는 온전한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무서움이 생기는 이유는 내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느끼는 무서움, 염려, 걱정, 불안, 원망, 불평, 시기, 질투와 같은 감정들은 모두 한 근원에서 나옵니다. 욕심과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과 기쁨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모든 불행의 마음 상태는 전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동일한 처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는 것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바보 멍텅구리 같은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 것을 잃는 것을 무엇보다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저주 속으로 떨어지셔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처한 저주 속으로 떨어지셔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몸을 공용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공생애 때 예수님은 저주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달라붙은 하나의 상태이셨습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떨어진 저주 속에 있었기에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몸을 입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저주 속에 던져지셨습니다. 우리의 처지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몸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큰 구원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마치 두레박 같은 존재입니다. 옛날에 저희 집 마당에서 참외, 토마토, 가지 등을 키웠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깊은 우물이 있어서 평소에는 덮개를 닫아두었다가 물이 필요하면 두레박을 내려서 물을 길었습니다. 어떤 때는 야채나 과일을 깨끗이 씻어서 우물 속에 담가두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저주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육체의 몸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종류의 불행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처지로 예수님의 몸이 두레박처럼 저주받아 내려오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두레박처럼 내려오신 예수님의 몸을 올라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라는 인격의 핵심에 큰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공용 몸을 입을 때 나타나는 네 번째 특성은 아브라함의 자손 됨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특성은 이러한 큰 구원이 생활 현장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적용될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떠올려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다만 눈으로 본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이란 육체의 눈을 가지고 보고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좋은 대상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이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좋음으로 선택하는 반복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입으면 모든 생활 현장 속에서 끊임없이 아브라함 자손의 특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은 돈을 많이 벌기 원하지만 나에게 좋음은 하나님뿐이다.’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선택함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특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실제로 선택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그 방법이 예수님의 공용 몸을 입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두레박같이 저주 속으로 떨어져 내게로 오신 예수님의 몸을 마음으로 입을 수 있으면 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으면 앞서 말씀드린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거룩함의 특징이 나타나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과 한집안 사람이 되고 형제가 됩니다. 생활 현장에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불안과 염려와 걱정이 없고,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이 없어집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많이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수련을 통해서 이러한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어도 됩니다. 재벌이라도 그 재산으로 이러한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노숙자라도 재벌이 도달할 수 없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몸을 공용으로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공원을 이용할 수 있듯이 누구나 예수님의 몸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만의 인생을 독특하게 차별화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특별한 성과를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선 공용으로 주어진 것을 이용할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공용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 예수님의 몸을 공용으로 충분히 이용하시면 이 세상 누구도 이룰 수 없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공용으로 내어주신 몸입니다. 이 공용의 몸을 이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진정 바보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형통이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주어진 예수님의 공용 몸을 내 마음이 입음으로써 놀랍고도 생각지도 못한 행복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