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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2

녹취문: 실제 하늘의 부르심을 듣고 있나?_태승철 (히3: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6.05|조회수6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실제 하늘의 부르심을 듣고 있나?>의 줄거리 :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물어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나를 부르심을 정말 들어 본 적은 있었던가요? 하늘에서 나를 부르심이 있었다면 분명히 내가 듣는 일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부르심을 들었으면 그에 응답하였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응답하면 나타나야 하는 일이 바로 거룩함, 신실함, 소망과 자랑이라고 하십니다.

 

 

실제 하늘의 부르심을 듣고 있나?

 

(히브리서 3:1~6)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는 소통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관계하기의 믿음은 우리를 부르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초월자의 도움을 찾고자 합니다. 신을 찾게 되고 신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종교의 신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가짜 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소개해 주신 참 신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부르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상황에 대해 경고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이며 매장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서신을 읽는 자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에 대한 호소이자 경고이며 권고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부르심 받음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아들로 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승철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다.’라는 음성이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장소가 하늘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하늘은 세상을 떠나야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하늘에서 우리를 늘 부르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무책임하게 부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우리가 고백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낸 자이고, 대제사장은 거꾸로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가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으셨으며,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목적을 중심에 놓고 1절의 말씀을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거룩한 형제로서 공통된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지금도 그 부르심을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 외에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사무엘은 성막 법궤 옆에서 잠이 들었다가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무엘처럼 하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이나 사무엘처럼 하나님께서 ‘승철아, 승철아’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직접 듣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지금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으로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있는 나에게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나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보좌 우편의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통로의 하늘 쪽에서는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땅 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향해 내 이름을 부르시면 마치 전화할 때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오듯이 승천하시고 부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과정을 따라 나에게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마치 전화의 수신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십자가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신 장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하면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마음이 육체의 몸 대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렇게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는 자가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일어난 단 한 번의 역사적 사건임에도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나의 죽음을 이루어 주시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믿음이 생긴다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심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이루어 주셨다.’라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스피커 삼아 울려 퍼집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배당 생활을 오랫동안 하신 분들 중에는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공허함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십자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해 들으시면 꼭 붙잡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이 세상 것들로 채우려고 하면 희망으로 차있기 때문에 공허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면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안 벌 수는 없지만 번다고 한들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다. 이런 일로는 마음이 만족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디에서 부르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깨닫지 못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주하게 되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붙잡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붙잡게 되고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보좌 우편까지 가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란 곧 이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들과의 구분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원합니다. 그중에서 십자가 스피커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연관 짓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사하는 분이 하루종일 손님이 없었다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사람은 그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세상일과 연관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구분됨의 거룩함입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하루만 장사가 안 되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십 마음에서 기쁨과 만족이 사라집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자는 하늘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지, 결코 장사의 결과에 따라 기쁨과 만족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세상일과 연관 짓지 않는 것은 거룩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전적으로 하늘과의 관계에서만 찾게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이 세상일에서 찾지만, 거룩한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몸의 상태에서조차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외모로부터도 찾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거룩한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친분을 무시하고 모른 체 하는 안면몰수한 자들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날마다 재현되어야 하는 초시간적인 사건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안면몰수가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질 수 없고, 의리를 지키려 할 수도 없고, 책임을 지려는 염려나 근심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달라고 호소하는 세상일들 앞에서 반응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거룩함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신실함입니다. 앞서 본문이 기록된 이유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을 경고함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이유를 1장에서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유대 종교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을 뽑자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유대 종교를 만든 것은 아니나 모세의 활약에 근거하여 유대 종교의 틀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모세와 예수님의 신실함을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신실하기를 요구합니다.

성경이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실함이란 마음의 방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을 수평의 방향이 아닌 수직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실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옆으로 마음을 쓰시지 않고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께만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 신실함의 예표와 모형이 모세의 신실함이었습니다. 모세가 신실하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모든 율법은 근본적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붙잡아야 할 대상은 모세가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신실하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신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실함은 수직의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족이나 이웃이나 나라를 향하면 다시 말해 수평의 방향을 향한다면 신실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신실함은 거룩함을 유지함으로 나타납니다. 거룩함이란 세상과 구분됨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이 유지되는 상태를 신실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옆으로 번질 수 없습니다. 앞이나 뒤를 향해갈 수도 없고, 미래나 과거에 사로잡힐 수도 없습니다. 지금 마주하는 사람들을 향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신실하기 위해서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위를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일생의 직업으로 삼는 자들이 신실한 자들입니다. 이 신실함이 없으면 부르심을 받고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실하신 예수님께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소망’과 ‘자랑’이 언급됩니다.

소망은 곧 마음의 바람입니다. 마음은 본래 공백의 상태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합니다. 소망이란 마음이 무엇을 향해 방향을 고정시키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소망으로 예수님을 붙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연쇄 과정의 방향을 고수한다는 뜻입니다.

소망이라는 말이 포함하고 있는 방향성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땅의 것을 신경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서는 사업을 신경 쓰고, 건강을 신경 쓰고, 자녀를 신경 쓰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달려오는 자동차에 맞서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하늘로 달려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도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이 땅을 향한다면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땅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상태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하는 일은 없습니다. 저주 속에서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의 관심을 땅에 둔다면 하늘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방향과 충돌이 일어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소망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망할 때 예수님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세상 것들로 채우려 할 때 거룩함을 버리게 됩니다. 세속적인 더러움을 붙잡게 되면서 신실함은 깨지게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손님이 많이 오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은혜의 방향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거룩함이 부서지고 신실함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한편 ‘자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자랑은 긍지와 자부심입니다. 십자가에서 울려 퍼지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응답하기 위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에게서는 세상이 필요 없음에 대한 자랑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세상 것을 많이 가졌음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자랑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어떤 것도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필요 없음을 자랑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자랑합니다. 돈 없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주체가 되심을 압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돈으로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돈이 전혀 없어도 상관이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돈이라는 대상에 대해 안면몰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음을 자랑하게 됩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이 세상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러한 자랑은 이웃 사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 대한 안면몰수가 나타납니다. 오직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는 거룩함을 갖게 됩니다. 신실함 속에서 이 세상에 대해 사랑도 느끼지 못하고 의리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염려도 하지 않고 아까워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진정한 사랑은 마음에 담음이 아닌 버림에서 나타납니다. 마음에서 타인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 조금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쭙잖게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에게 의리를 지키고,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일은 나와 타인을 동시에 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완전히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간 마음만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함을 유지해가는 가운데 소망이 뜻하는 방향성을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령 몸이 돌에 맞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라는 측면에서 손해나 상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부르심이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통하여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연합함으로써 그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거룩하게 하시며 거룩함이 유지되는 신실함을 삶의 내용으로 채우게 하시고, 소망과 자랑이 끊이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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