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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안식, 복지, 천국에 다 들어가야 구원>의 줄거리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이라도 얼마든지 이 약속이 깨어질 수 있음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안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내게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과 가나안 복지에 들어감 그리고 천국에 들어감. 세 가지가 모두 이루어져야 구원입니다.
안식, 복지, 천국에 다 들어가야 구원
(히브리서 4:1~11)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을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다 받으려면 안식에도 들어가야 되고, 복지에도 들어가야 되고, 천국에도 들어가야 됩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위하여 약속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복지를 약속하셨고, 구원도 약속하셨고, 안식도 약속하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무조건 주어지지 않기에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무척 중요합니다. 그 태도가 바로 믿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약속을 받고도 은혜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심장을 드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약속에 대해 마음을 주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3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16절에서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복지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거역하였고 출애굽한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복지로 들어가기는커녕 진노를 받아 광야에서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며 믿음을 요청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보고 그 약속의 내용이 내게 임하지 않게 될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으로 주어진 것을 받기 위해서는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현실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현실로 약속받은 자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근거로 하여 말씀드리자면 히브리서 기자의 염려가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 가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이 세 가지는 개별적 단계를 거쳐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며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며 복지에 들어가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면 복지에 들어갈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식과 복지와 천국에 다 들어가야 한다는 요구가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것은 부담이 아닌 즐거움입니다. 안식에도 들어가고 복지에도 들어가고 천국에도 다 들어갈 수 있다니 오히려 좋습니다. 세 가지 중에 한 곳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에 다 들어가는 것이 구원을 이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해보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복지에 들어가 계십니까? 복지의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 계십니까? 복지에 들어가 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고, 어쩌면 복지나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은 다음에나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상태는 구원의 확신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지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복지에 대한 약속도 안식에 대한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에 대해서조차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나는 천국에 간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믿었다면 그 결과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있어야 하고, 복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가나안 복지는 우리와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복지의 삶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복지를 약속해 주십니다. 가나안 복지에 사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안식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에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상징적으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흔히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육체의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복지란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상태입니다. 찬송가에서 가나안 복지를 죽은 다음에 갈 천국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엄연히 이 세상에서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가나안 땅이 무엇인지는 이미 창조 때부터 내용적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2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부분의 히브리어는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무(無)의 수면 위에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 생각과 뜻이 말씀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면서 이루어진 일이 창조입니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품고 계시던 생각의 알이 병아리처럼 부화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해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 생각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실제로 해와 달과 별들이 생겨났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활 현장에서 부화시키고자 하시는 생각과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 상태가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복지입니다. 나의 모든 생활 현장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암탉이 알을 품듯이 뜻과 계획을 품고 계십니다. 내 몸과 연관된 관계 속에서 내가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그 뜻과 계획을 부화시켜 나가시는 상황이 복지의 삶입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간 가나안 복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흔히 젖과 꿀은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쉽게 말해 부자 되고, 하는 일마다 부흥하는 것을 젖과 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많이 갖는 것을 복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최고의 복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이 부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 생활 현장에서 부화시키려는 생각과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화하여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복지의 젖과 꿀입니다.
여기까지 알았다면 이제 ‘나는 복지를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선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뜻과 계획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품고 계십니다. 가나안에 들어왔다면 이제 하나님이 품고 계신 생각과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고 들리는 피조물들의 좋음을 추구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 대신 풍요와 다산을 추구한다면 복지의 삶은 깨져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나누어진 끝에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생활 현장에서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이 품고 계신 생각과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젖과 꿀을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면 내 몸의 삶도 복지가 될 수 없습니다.
10~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이란 육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가 언급되었습니다. 우리는 으레 안식을 몸이 죽은 다음에 주어지는 상태를 떠올립니다만 여기서 안식이란 죽은 후가 아닙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은 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안식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을 보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태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줄곧 그 안식에 들어올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어서 1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참 안식이란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기쁨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몸이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아닌 살아있는 동안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이와 동시에 몸을 통해서는 가나안 복지의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몸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허락하려 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태초에 이루어졌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과정에 아담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담이 의식을 갖고 맞이한 첫째 날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아담은 일하다 쉰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식을 맞이합니다. 안식을 맞이한 상태에서 아담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하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함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 본업이 있습니다.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고자 합니다. 있음과 좋음에서 하나님을 먼저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면 또한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안식이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상대자가 되시는 상태입니다. 아담이 눈을 떠서 의식이 깨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아담에게 있음을 느끼게 하는 첫 번째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욕구하려는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 한 분을 상대함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이 쉬시는 안식에 인간인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아담의 위치에서 안식에 들어가게 되면 내 마음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상대자가 되십니다. 쉽게 말해 안식이란 하나님만을 가지고 하나님과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율법적으로 제시된 안식일의 의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요구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안식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안식에 들어가지 않으면 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을 먹고 마시며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듣는 하나님 말씀의 내용이란 영적인 사실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삼위일체로서 사실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사실로 존재하고, 예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도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셨다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지금 나에게 현실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내 마음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으로 주어져 있을지라도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영적인 사실들을 현실로 삼기보다는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현실로 느끼며 마음을 쏟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주셨더라도 그 약속의 내용을 내 것으로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구원을 내 것으로 삼으려면 들어서 알게 된 말씀 속의 사실들에 마음을 붙이고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과 결부시키는 것이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현실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주님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심이 나의 현실이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실제로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영적인 사실들은 나의 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면 몸이 아픈 상황이나 돈이 없는 상황이 현실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건강한 상황이나 돈이 많은 상황일지라도 현실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믿음과 결부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의 몸의 상황이 내 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상황, 부활하신 상황,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상황을 내 현실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만을 오붓하게 상대하는 안식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 안식에 들어갈 때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께서 내 생활 현장에서 이루고자 하시며 품고 계셨던 모든 생각과 뜻과 계획은 이 땅에 남아있는 내 몸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의 삶이 시작됩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을 때의 ‘내 일’이란 내 몸과 연관된 일들이었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에 마음이 책임감을 느끼고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저 같으면 가장이자 남편이고 아버지입니다.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모두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내게 현실이 되면 이러한 부담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이 내 마음이 붙어야 할 몸이 되었기에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상대하게 됩니다. 이제 마음은 육체의 몸과 관련된 일들을 ‘내 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서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내 일’이 되지 않으니 ‘내 일’에 대해 쉬는 셈입니다. 안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일’에 대해 안식하며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상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천국에서 오붓하게 하나님 아버지만을 상대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 육체의 몸에는 하나님의 손이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외출 나오신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품고 계시던 생각의 알, 계획의 알, 뜻의 알을 부화시켜 나가는 복지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안식, 복지, 천국에 다 들어가야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관건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결부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영적인 사실에 마음을 드릴 때 나의 현실이 됩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는 어떤 일보다도 더 우선적인 현실이 됩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있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요구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라는 이름으로 바로 이 안식에 들어가는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안식에 들어가야 몸이 남아있는 이 땅에서 복지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현실로 받아들여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럼으로써 몸은 이 땅에서 복지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몸이 죽은 다음에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가나안 복지의 삶은 내 마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 자체는 안식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도 마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태초에 아담이 하나님을 직면했을 때의 상황을 내 상황으로 만들 수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가나안 복지의 삶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지의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사람은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이 품고 계시는 생각과 뜻과 계획을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내 몸을 통해 이루시는 일입니다. 나는 ‘내 일’에 대해 쉬는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 될 때, 내 몸은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부화시키는 삶이 됩니다. 이러한 삶을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증거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안식과 복지와 천국을 다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믿음에 힘쓰면 이 세 가지를 다 가지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내 마음이 붙어야 하는 첫 번째 현실로 삼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과 결부시킴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짐으로써 안식과 복지와 천국 세 가지를 다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