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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민 중 연약한 자와 완악한 자의 차이>의 줄거리 :
우리의 마음이 유착되었던 몸을 떠나 하나님만을 직면하여 상대하는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큰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무한한 긍휼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긍휼히 여기심에 힘입어 날마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은혜의 보좌를 등지고 세상을 향하면 이는 연약함이 아니라 완악함이며 이에는 자비와 긍휼이 더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선민 중 연약한 자와 완악한 자의 차이
(히브리서 4:14~5:10)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우리는 구약 성경의 예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전체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 중에는 연약한 자와 완악한 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 중에 ‘내가 약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완악함을 연약함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나간 선민들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 혹은 ‘완악한 자들’이라고 부르시며 형벌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받아 누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연역함과 완악함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완악함 속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연약함이라 말한다면 광야의 선민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연약함과 완악함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연약함과 완악함의 조건은 동일합니다. 마음이 육체와 달라붙은 유착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육체에는 눈과 귀와 코와 입과 피부의 오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 것들에 의해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연약하거나 완악한 상태에서 모두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 중에 연약한 자가 있고 목이 곧고 완악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연약함이나 완악함은 언급될 필요가 없습니다. 연약함이나 완악함은 선민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선민이란 곧 하나님과 관계 안에 있는 상태이고, 하나님을 향하기로 방향을 정한 상태이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사람의 마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있음을 느끼는 의식 기능과 좋음을 추구하는 욕구 기능, 그리고 뜻하는 주체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마음이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상대자로 마주하여 직면하는 상태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것입니다.
연약함이란 선민으로써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잘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한편 완악함은 선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온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싶은데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 것들에 마음이 걸리고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등지기를 자처하며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는 소망 자체가 없는 상태입니다.
선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연약함이나 완악함이 적용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저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함과 완악함은 오직 저주로부터 빠져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오직 선민만이 연약한 자나 완악한 자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우리가 읽은 4장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큰 대제사장이심이 선언됩니다. 그리고 또 5장 1~1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큰 대제사장이신 이유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붙잡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5장 4절을 보면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아론에 비유합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첫 번째 대제사장입니다. 이후의 대제사장들 또한 레위 지파에 속한 아론의 계열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아론에 비유할 뿐만 아니라 아론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6절을 보면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라고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연관시켜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던 아론보다 훨씬 앞선 아브라함 시대의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시날의 네 왕에 의해 잡혀갔을 때 이들을 추격하여 롯과 그의 가족을 되찾아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만나게 됩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라함에게 포도주와 떡을 제공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포도주와 떡을 제공한 멜기세덱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자신의 피와 살을 주신 것을 비교합니다. 멜기세덱을 예수님의 예표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는 것은 멜기세덱과 같은 종류의 대제사장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대제사장의 반차를 따른다면 아론의 후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아브라함 앞에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진 특이한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멜기세덱을 영원하신 예수님을 예표 하는 인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론으로부터 시작하는 대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큰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의 마음이 육체와 유착된 상태가 문제임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육체를 빠져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직면하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기억 속에 지식으로 담아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영적인 사실들을 실제 생활 현장에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영적 사실들을 현실로 받아들였을 때 나타나는 일에 대해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하고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사실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적 사실들 중에서 우리가 제일 우선적으로 붙잡고 나의 현실로 인정해야 하는 영적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현실로 인정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을 육체에서 잘라내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건이자 영적 사실에 이러한 힘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 사건 또한 영적 사실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대해 4장 1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실들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현장에서 현실로 인정하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대제사장이 존재했다면 죄인인 나를 위해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실제 살아있는 대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해주십니다.
5장 7~8절을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과정을 이루심으로써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선민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끌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이끄시는 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현실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라는 고백을 유지했을 뿐인데 예수님이 실제 살아계신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며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듯 예수님께서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보다 위대한 분임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믿다가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가르쳐줍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사실들을 생활 현장에서 현실로 삼을 수 있다면, 말씀 속에 계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실제 대제사장으로써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십니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마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써 실제로 내 마음을 끌고 하나님께로 가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세상을 탈출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생활 현장에서 현실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육체와 마음이 유착되어 구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십자가 예수님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여 내 마음과 육체를 분리하십니다.
한편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감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하늘까지 끌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분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나를 끌고 가시는 곳도 아들의 자리입니다. 내 마음이 아들 자리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의 사이에 그 무엇도 끼어들지 않은 상태로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하늘로 가는 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함과 완악함의 차이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완악함이란 완고함이나 목이 곧음으로 대표되는 선민의 성향이었습니다. 출애굽 한 선민들은 광야 생활에서 그 완악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관계 안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도 끼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원수의 가문이었으면서도 아무도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사랑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관계 안에 들어왔음에도 하나님을 등지고자 합니다. 마치 부부싸움을 한 부부가 서로를 멀리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아내가 거실에 나오면 남편이 방으로 들어갑니다. 남편이 거실로 나오면 아내가 방으로 들어갑니다. 밥때가 되어도 식사를 따로 합니다. 완악함이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된 상태입니다.
반면 연약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기에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 것들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이 연약함의 특성은 보이는 것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는 현실을 속상해합니다. 그렇기에 자기를 미워하고 부인하고 거부합니다.
한편 완악한 자들은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성령의 임재를 소원하지 않고 하늘을 향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신 세상의 안정을 원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원하는 사람은 돈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만큼 돈과 밀착하기를 원합니다. 건강을 원하는 사람은 건강과 밀착하기를 원합니다. 가족의 형통을 원하는 사람은 형통과 밀착하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안식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에서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잘 이루어지고 잘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이렇게 완악한 자들은 세상 것을 향하고, 세상 것을 바라고, 세상 것을 직면함을 당당하게 여깁니다. 이 상태에 대해서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배당 강단에서 그렇게 살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내가 좋아하고 갖고 싶어서 직면하게 된 세상 것들을 잘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의 설교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완악해져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완악함이 축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것을 쟁취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세상의 안정 안으로 들어가려는 완악함이 이토록 무섭습니다. 얼핏 안정은 바람직해 보입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고, 해가 될 수 있는 일이 없고, 원하는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세상을 향해 큰 것을 바라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들 다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작은 바람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완악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큰 대제사장으로 등장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하나님의 안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유착되었던 몸을 떠나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십자가 사건 속에 무한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들어있습니다.
4장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싶은 진심이 있을지라도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열 번, 백 번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쭈뼛거릴 필요도 없고 주저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백 번째 걸려 넘어졌다면 백한 번째 일어나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담대히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이 들어있습니다. 그 긍휼은 연약한 자들에 대한 긍휼입니다. 하늘을 향하고 싶고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고 싶으나, 육체를 입고 살고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 것들에 의해 마음은 자극됩니다. 마음에 세상을 바라는 동기가 주어지고, 마음이 세상에 묶이고 매이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스러워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백 번 넘어지면 백한 번째의 긍휼을 베푸시고, 천 번 넘어지면 천한 번째의 긍휼을 베푸시면서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나의 연약함을 생각하고, 세상에 걸려 넘어지고, 원하고 바라는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며, 세상에서 뒹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좌절감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라는 확성기를 통해 ‘네가 천 번째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라.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생활 현장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에 이상이 생긴 상황에서 어떻게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바라봄은 약을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몸이 아픈 상태에 곧바로 마음이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건강해야 된다.’라고 건강이라는 차원에서 안정을 바라며 자발적으로 건강을 향해 ‘하나님! 저를 건강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완악한 것입니다. 건강 때문에 걱정과 염려가 생길 때 양심이 있으면 ‘내 몸이 아파 죽어도 내 마음은 하나님과의 안식으로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본문 4장 15절을 보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것은 강인하시다는 뜻입니다.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일엽편주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풍랑에 사로잡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직면하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계셨고 그 증거로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강인하심이 승계된 사건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마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부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러움을 가진다면 몸이 아프더라도 마음이 붙잡히지 않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 예수님처럼 다른 인간의 존재감을 무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마음을 자극할 수 없었고 움직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을 직면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말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사람의 존재감이 예수님께 닿을 수 없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장 크게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의식으로 붙잡으면 우리의 연약함을 뛰어넘어서 예수님의 강인함이 우리에게 승계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강인함이 스데반 집사님에게 승계되었고,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나 초대 교인들에게 승계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다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붙잡음으로써 예수님처럼 강인해질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사도 바울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카타콤에서 살던 신앙의 선배들처럼 하나님께로 올라가 안식의 상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육체를 입은 우리는 연약합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이러한 나를 미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것을 바라며 세상을 향하는 목이 곧은 완악함은 우리에게서 그림자조차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똑같이 목이 곧은 완악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주시고 하늘의 안식이 있음을 일깨워 주셔서 하늘을 향하여 소망하게 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소망함에도 불구하고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오니 우리를 권면하셔서 생활 현장 어디에서나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놓지 않기를 끊임없이 해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