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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2

녹취문: 믿음 끊김 현상 막는 맷집이 인내다_태승철 (약 1: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8.26|조회수5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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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 끊김 현상 막는 맷집이 인내다>의 줄거리 :

삶에서 만나는 시련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로 기뻐하라 하십니다. 왜냐면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랍니다. 도대체 인내가 왜 그렇게 좋은 것일까요? 인내는 십자가 복음과 믿음을 세상의 주먹 앞에서 한순간도 끊김이 없이 지켜낼 수 있는 맷집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약속된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계속 끊기기 때문입니다.

 

 

믿음 끊김 현상 막는 맷집이 인내다

 

(야고보서 1:1~4)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서두에는 시련 속에서 인내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인내란 믿음의 끊김 현상을 막아주는 맷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이 담고 있는 좋은 것 중에 과연 몇 퍼센트 정도를 실제로 받아 누리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보다도 소중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희생을 감행하시며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의 좋음을 다 누리기 위해서는 믿음의 끊김 현상이 없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바로 ‘믿음의 끊김 현상이 없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끊김 현상이 없으려면 세상의 주먹질에 대한 맷집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은 내 마음을 향하여 주먹질을 해옵니다. 그럴 때 내가 보일 수 있는 맷집은 바로 인내입니다.

 

나와 세상의 관계는 마치 권투 경기의 선수들과 같습니다. 삶의 현장은 계속해서 내 마음에 주먹질을 가합니다. 권투 경기에서 이루어지는 펀치에는 잽이 있고 유효타와 강타가 있습니다. 잽은 가벼운 펀치입니다. 주로 상대방 선수의 안면을 노립니다. 잽의 목적은 상대의 방어 자세를 흐트러뜨림으로써 유효타나 강타를 날릴 기회를 잡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마음에 끝없이 잽을 가하며 믿음의 끊김 현상을 초래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믿음이 끊어지면 유효타가 들어오고 강타가 들어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달려가는 것이 믿음인데, 세상은 사소한 일로부터 마음을 흐트러뜨림으로써 하늘을 향해 달려갈 수 없게 합니다.

이로부터 권투를 비롯한 모든 격투기 선수에게 중시되는 것이 맷집입니다. 맷집은 타격을 견디는 힘입니다. 맷집이 좋은 선수들은 설령 코가 깨지고 얼굴이 찢어져 피범벅이 되어도 다시 일어납니다. 반면 맷집이 약한 선수들은 턱이나 복부나 관자놀이 같은 취약한 부위를 공격당하면 낙엽이 떨어지듯이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믿음을 끊김 현상 없이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집의 수도관이 군데군데 끊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재미가 없고 신바람이 나지 않고 즐겁지 않은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믿음의 끊김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야고보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다만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음을 언급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야고보가 언급됩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핵심 분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언급을 보면 야고보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부활하실 시점에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세 기둥으로 불렸고, 공의회의 의장직을 맡으며 1대 감독이 됩니다. 교회의 시작에서 기둥 역할을 한 핵심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야고보서가 기록된 시기는 46~49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어떤 학자는 야고보 장로가 62년에 순교하였기에 그 직전에 기록되었으리라 보기도 합니다만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46~4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히브리서는 하늘의 빛과 구원을 맛본 사람들이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좋음을 맛본 사람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것의 좋음을 따라 흔들릴 때는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이러한 히브리서를 단단한 가시를 품은 책이라 폄하하였고, 야고보서 역시 지푸라기 복음서라고 폄하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야고보서의 핵심 구절로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신득의는 로마서의 핵심 주제이자 사도 바울의 모토였습니다. 또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을 강조하기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과 대치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서라 폄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살펴보자면 오히려 마틴 루터가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득의를 제대로 이해했는가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의심이 생깁니다. 야고보 장로가 쓴 야고보서의 주제 또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인격 안에 믿음이 있을 때 나오는 말과 행동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의 말과 행동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서의 주제는 ‘끊김 현상이 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말하고 행위를 하는 순간에도 믿음은 끊김 현상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활 현장인 사람 앞에서, 과제와 문제 앞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상황 앞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될 때 믿음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에는 말과 행위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야고보가 말과 행동을 강조한 이유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순간에 믿음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종교적인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 있는 단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마음의 상황입니다. 그 믿음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마음의 상황은 삶의 현장에서 어떤 문제나 과제를 앞두었든, 어떤 사람과 마주하든 유지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모든 순간에 끊김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서는 믿음을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강화시키고 강조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끊김 현상을 막아낼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처음으로 등장하는 요소가 바로 인내입니다. 야고보는 공생애 시절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긴 뒤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목격하였습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되던 46~49년은 아직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은 서신들에 의해 복음의 내용이 교리적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은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눈앞에서 본 자들이었습니다. 야고보에게는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유일한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교훈이 필요 없는 믿음의 오리지널이었던 것입니다. 단지 이 믿음은 종교의 울타리 속이 아닌 모든 생활 현장 속에서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믿음이었습니다.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증인과 목격자였고 이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예배당이나 예배당에서 말하는 교훈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직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마주하고 그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럴 때 이 땅에는 성령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 이상을 알 수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으며 알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고보 장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교인이 된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교인들은 박해와 흩어짐을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님의 박해입니다. 이 박해를 기점으로 예루살렘 교회에도 핍박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도들을 제외한 예루살렘 교인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었고, 이들이 수리아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렇게 시련을 겪고 로마 제국 각지에서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야고보서의 주제는 어떤 생활 현장에서도 믿음에 끊김 현상이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에 마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에 끊김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의 끊김 현상을 막는 첫 번째 요소는 인내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쁘게 여기라’고 번역된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기뻐해야 하는 시점이 시험을 당할 때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핍박을 당해 재산과 삶의 터전을 잃고 각지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살던 고향에서 거의 맨몸으로 쫓겨나 타국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러한 시험을 당한 교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시련을 계기로 끊김 현상이 없는 믿음을 유지하게 하는 인내를 키워갈 수 있습니다.

인내가 온전하면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집 잃고, 밭 잃고, 재산을 송두리째 잃고, 타지에 가서 나그네가 되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믿음의 끊김 현상을 없애주는 요소가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관점에서는 인내로 믿음의 끊김 현상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에 주어지는 시련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련 때문에 인내가 생겼다면 그로 인해 믿음의 끊김 현상이 중단될 수 있기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설령 집 잃고, 밭 잃고, 타국을 전전하더라도 인내가 자랄 수 있다면 진짜 좋은 것이 위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올 것이기 때문에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끊김 현상이 없는 믿음은 인내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인내는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시련을 통해 온전해지기에 시련을 만났다면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내가 믿음의 끊김 현상을 막아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 교인들은 집 잃고, 기업 잃고, 재산을 잃고 거지처럼 쫓겨났습니다. 이들에게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한 일은 바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교인들 중에 믿음에 끊김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46~49년경은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가 극심했고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 또한 시작되려는 조짐이 보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는 박해와 시련을 받을 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로 인내를 가르쳐줍니다. 인내가 자랄 수 있는 기회이기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끊임없이 하늘로 올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도 오시고 하늘의 온갖 좋은 것들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에 제일 큰 방해는 삶의 현장이 내 마음에 가하는 주먹질입니다. 마음이 생활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빠져버릴 때 하늘로 올라갈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집을 잃었고, 밭을 잃었고, 재산도 잃었습니다. 거지 같은 형편으로 타국으로 쫓겨났으나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예수님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보니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어차피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 하늘로 달려가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내 몸이 만나는 상황에 닥친 시련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탄압으로 육체와 관련된 모든 가치를 빼앗긴 상태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하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붙잡고 하늘로 달려가는 일을 기어코 해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 생활 현장 속에서 내 마음을 향하여 가하는 웬만한 주먹질은 다 견뎌내는 맷집이 생기게 됩니다. 권투 시합을 보면 방어하는 선수보다 공격하는 선수가 먼저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면 지금까지 방어하며 체력을 보존한 선수가 공격적으로 전환하여 승리를 가져갑니다. 맷집이 이루어 낸 승리입니다.

우리 삶에 시련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주먹질을 맞다 보면 상황은 불리해 보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고, 배우자에게 문제가 생기고, 생업에 문제가 생김을 통해 세상의 강타가 날아옵니다. 그럴 때 삶 전체가 허물어질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겨우겨우 추스르고 일어나서 십자가 주님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갑니다. ‘내가 언제는 몸의 건강을 보고 살았나? 내가 언제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보고 살았나?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나의 유일한 좋음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극심한 시련을 한 차례 겪고 나면 내 속에 인내가 생깁니다. 이제부터 생활 현장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주먹질은 맞아도 아프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믿음에 끊김 현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조그마한 문제만 발생해도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사소한 문제들은 세상이 날리는 잽입니다. 이 가벼운 잽만 맞아도 마음이 타격을 받고 주저앉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치 않은 시련이지만 한번 경험해 보니 맷집이 생깁니다. 맷집이 생긴다는 걸 알았으니 야고보 장로의 말대로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릴 정도가 됩니다. ‘이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키우고 맷집을 키우리라! 다음부터는 이 정도의 주먹질 앞에서는 까딱도 하지 않고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감을 통해 믿음에 끊김 현상이 없게 할 것이다. 이 시련을 놓칠 수 없는 기회로 삼겠다. 얻어맞더라도 어떻게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야 말겠다.’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맷집이 생기면 세상이 잽을 날리든 유효타를 넣든 강타를 넣든 믿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떤 시련에서도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믿음의 흐름에 끊김 현상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끊김 현상이 없는 믿음을 유지하며 삶을 살아갈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에서 예비 된 온갖 좋은 것이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의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흐름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통하는 파이프가 끊어졌기에 하늘에 예비 된 좋은 것들이 내려오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 하늘의 좋음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생활 현장 속에서 믿음이 끊겨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 끊김 현상이 생긴다면 내게 약속된 하늘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생활 현장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고 사건을 대하고 문제를 대하며 말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이러한 모든 순간에 믿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요청합니다.

믿음에 끊김 현상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는 삶에 주어지는 크고 작은 시련을 통해 인내를 키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의 인내를 키움으로써 세상이 가하는 주먹질에 대해 맷집을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떤 주먹질이 날아오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믿음의 흐름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생활 현장 속에서 어떤 강한 주먹질이 마음에 가해지고, 육체로 사는 환경 속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믿음에 끊김 현상이 없는 강력한 맷집이 길러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삶의 모든 순간에 내 마음을 향해 크고 작은 주먹질을 해옵니다. 이 모든 상황 앞에서 주님을 붙잡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마음의 맷집인 인내를 키우게 하시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에 끊김 현상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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