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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물은 물 쓰듯 하되 보물은 꼭 지키자>의 줄거리 :
실제 생활 현장에서 믿음이 끊어짐을 경계하십니다. 본문은 특별히 돈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끊어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돈이 많을 수는 있어도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자 되기는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부당한 자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부당한 부자에게 부당함을 당한 가난한 자에게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인내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재물은 물 쓰듯 하되 보물은 꼭 지키자
(야고보서 5:1~11)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물 쓰듯 하다’라는 말에는 재물을 낭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본문 5절에서 사치하고 방종한다고 하였던 바와 같이 돈을 써야 할 때와 쓰지 말아야 할 때를 가리지 않고 마구 써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다만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돈을 쓰는 명목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살려 이야기해 보자면 재물이란 하늘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흘러 내려오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내 삶에서 관계된 모든 영역과 대상으로 흘러갑니다. 그럴 때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내게 주어진 돈은 하나님의 주권적 흐름을 따라 원하시는 목적지까지 흘러가게 됩니다.
제가 사는 강릉 주변에는 계곡과 하천이 많습니다. 남대천, 연곡천, 사천과 같은 하천이 흐르고, 조금만 더 가면 소금강 계곡이 있어서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립니다. 그 맑은 물은 지금도 흐르고 있지만 계곡물이 아깝다고 막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까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고 흘려보내야만 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흘려보내되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흘러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많이 버느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관심의 70% 이상은 어떻게 버느냐를 향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바뀌어야만 합니다. 내게 주어진 돈은 다만 몇 푼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흘러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막힘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돈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돈이 필요 없다면 상관없지만,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돈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주권에 막힘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든지 돈을 끌어서 내 앞에 가져다 놓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있는 돈을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에 흘려보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고 당장 먹고 죽으려고 해도 한 푼이 없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붙잡고 내 마음이 가야 할 곳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과 연관을 지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향방과 재물과 보물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느냐를 우선시할 때 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계곡물이 흘러가듯이 재물은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흘러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알고, 그 주권에 재물을 흘려보낼 수 있을까요? 보물에 대한 관계가 이것을 결정합니다. 보물은 욕심을 내서 많이 갖고 굳게 지켜내야 하는 대상입니다. 보물을 계곡물이 흘러가듯 아까워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그냥 바보가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 바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물을 지켜야 하는 마음을 재물에 보내면서 치근덕거리는 동안 보물은 계곡물처럼 흘러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보물이 무엇이냐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표현을 바꾸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거의 똑같은 표현이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에 더해 20~21절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을 내게 주어진 재물을 구제나 봉사 혹은 장학금 같은 덕스러운 일에 쓰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헌금들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가장 명확한 취지는 이제까지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세상의 재물을 주로 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금과 은과 비싼 옷과 같은 재물을 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재물에 두지 말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진짜 보물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재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아무리 덕스럽게 잘 써도 그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재물은 본래 내 것도 아닙니다. 주권(主權)은 주인 된 권리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덕스럽게 재물을 사용한다고 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내가 썼다고 생색낼 수는 없습니다. 내게 있는 돈 한 푼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덕스럽게 쓰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지 그것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을까요? 보물의 개념부터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에게도 소중한 인류의 가치로 인정될 때 ‘국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보 1호는 남대문이고 보물 1호는 동대문입니다. 소중하다는 표현으로부터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내 마음과 연관하여 보자면 하나님은 전 우주에서 유일한 보물이십니다. 피조 세계의 지구와 우주를 통틀어도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보물은 없지만, 하나님이야말로 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보물입니다.
이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늘에 마음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내 마음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많이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하늘로 보낸 만큼 하나님의 좋음을 가지게 됩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과 친분을 갖는 것이야말로 내 보물을 하늘에 쌓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좋음이시더라도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하나님의 좋음을 내 것으로 가지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앞서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쪽과 하늘 쪽이 나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늘 쪽에 마음이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보물이라고 생각했던 재물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들어가서 욕구할 수밖에 없는 공백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늘에서는 무한한 하나님의 좋음 중에 내 몫이 쌓여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재물이 곧 보물이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대로 재물을 가지고는 어떻게 하더라도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살면서 재물을 사용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유일한 보물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자꾸 소망하고 원해서 내 몫의 하나님의 좋음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을 아까워함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주권은 명확하게 깨달아집니다. 반대로 내게 주어진 재물이 아깝게 느껴질수록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깨닫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한 앗사리온은 16분의 1데나리온입니다. 유대 땅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작은 단위였습니다. 현재 가치로는 얼마에 해당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참새 두 마리의 가격이니 얼마 되지 않는 푼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참새 두 마리가 떨어져 한 앗사리온이라는 푼돈에 팔리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주로 참새 두 마리가 떨어지는 것에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춰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합당합니다만 여기서 조금 더 연장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참새 두 마리가 떨어진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진 후 새의 운명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참새 두 마리가 팔리는 한 앗사리온에도 하나님의 주권은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누군가 한 앗사리온을 주고 참새 두 마리를 사야 될 필요가 생겼다면 그 필요에 상응해서 참새 두 마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떨어진 것입니다.
한 앗사리온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으니, 내게 주어진 모든 재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한 푼도 남김없이 하나님의 주권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로막는 자들이 바로 부자입니다. 1~3절을 보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부한 자들이란 단순히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어진 재물을 마음으로 감싸는 사람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에는 한 푼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재물을 감싼 사람은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차단하고 끊어버립니다. 다시 말해 야고보 장로가 언급한 부자란 주어져 있는 돈을 마음으로 감싸서 하나님의 주권을 끊어버리는 자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끊기면 반드시 증상이 나타남을 알려줍니다. 돈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끊겨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부자의 마음가짐이 나타납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썩고, 좀이 먹고, 녹이 슬었음은 어떤 물건을 활발하게 활용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부자가 금고에 넣어두고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돈 또한 본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계곡의 물처럼 흘러가야 하는 대상입니다. 돈은 보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물로 삼아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음을 알았다면, 주야로 하나님을 많이 가지는 일을 함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주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 갖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보물을 많이 가지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바보같이 보물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보물이냐는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의 보물이 아닙니다. 내가 갖기에는 배설물로 느껴져야 할 것들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가지려는 마음을 품을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흘려보낼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재물은 배설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한 돈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진짜 보물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내게 들어온 돈을 보물로 삼아 치근덕거린다면 추잡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재물은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활용될 수 없고, 본래 계획하신 뜻대로 쓰일 수 없습니다. 활용되지 못하니 썩고, 좀이 먹고, 녹슬어버립니다. 그런데 야고보 장로는 단순히 녹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내 살을 먹어 치우는 괴생명체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살이 뚝뚝 끊어지는 것을 의식으로 다 느끼는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게 들어온 돈을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계곡물처럼 흘려보내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바로 녹입니다. 돈을 보물인 것처럼 마음으로 감싸고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녹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녹은 우리의 살을 갉아먹는 괴생명체처럼 작용합니다. 천국에 있어야 될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어서 존재가 흔적도 없게 만듭니다.
이어서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세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지만, 세상의 끝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이 하늘 쪽으로 갔다면 세상은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탈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과 동시에 모든 개인에게는 실질적으로 말세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우주적 재림 사건이 아니더라도 십자가 사건은 세상의 끝이 만들어졌기에 개인적 차원의 말세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끝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우리는 세상을 벗어나서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가서 마음의 보물을 쌓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 쪽에 머물면서 세상에서 재물을 쌓으며 보물이라 생각한다면 어떤 면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재물을 보물로 삼았기 때문에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물은 놓치면 안 됩니다. 보물을 놓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할 악한 바보입니다. 영원토록 지옥에서 불로 괴로움을 당해야 될 바보입니다. 다른 것 다 못해도 내 마음에 유일한 채움이 되는 보물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설령 몸이 돌에 맞아 죽더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재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지 않는 예를 보여줍니다. 4~5절을 보면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맥주를 좋아해서 배가 뚱뚱하다 못해 한 더미씩 나온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돈을 끌어안으면 마음이 뒤룩뒤룩 살이 찝니다. 계곡물에 낙엽이 흘러가듯이 내게 있는 돈을 하나님 주권의 흐름을 따라 떠나보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떠나보내지 못한 돈이 내 마음의 살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음이 뒤룩뒤룩 살쪄서 돼지처럼 되었으므로 천국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품꾼에게는 반드시 지급되어야 하는 품삯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급되어야 하는 항목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6절을 보면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7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라고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의인’은 대표 단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구원받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전체를 가리킵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다 의인은 아닙니다. 부자들에 의해서 일을 하고도 품삯을 못 받아 가난하게 된 것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가난하게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이렇게까지 돈이 없는 이유는 부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돈을 흘려보내지 않음으로써 나타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부당한 부자가 있으면 반드시 부당한 가난한 사람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자 중에 교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길이 참으라’는 부분은 원문을 보면 마크로두메사테(Μακροθυμήσατε)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길다’라는 뜻의 마크로스(μάκρος)와 ‘격분’을 뜻하는 뒤모스(θυμὸς)의 합성어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될 돈인데도 부자들이 주지 않을 때 격분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길게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격분은 순간적으로 폭발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길게 하는 격분은 격분이 되지 못합니다.
부당한 부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흘려보내야 할 돈을 주지 않은 것은 자기 마음을 돈으로 살찌워서 돼지 같은 모습이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이 막혀서 품삯을 받아야 할 가난한 자에게 돈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격분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격분과 분노를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믿음의 끊김을 보여주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가룟 유다에게 팔리실 때도 격분하실 일이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빌라도나 산헤드린 공회나 군중들 따위가 십자가에 죽이고자 판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격분을 마크로두메사테(Μακροθυμήσατε)라는 표현대로 가늘고 길게 늘여서 없는 것처럼 만드십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법정 용어를 사용하며 지적합니다. 야고보 장로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 가며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나 산헤드린 공회나 군중들을 대하실 때의 태도를 보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야 할 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가로막고 떼어먹은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빌라도 위에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심을 보았습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 위에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심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 위에도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심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부자들에 대해 당연히 격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 마음대로 격분한다면 그 부자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고, 스데반 집사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에 대해서조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듯이, 우리도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그 부당한 부자들의 목숨 줄을 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더 놔두실 이유가 없다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그를 당장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려두고 계심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돈을 떼어먹었다고 할지라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부당한 대우 속에서 내 보물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대우하는 부자들에 대한 격분의 에너지를 십자가에서 하늘을 향한 에너지로 전환시켜서 하늘에 있는 보물을 더 많이 쌓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자들의 부당함으로 인해 굶어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끝내시기로 작정하신 그 시간까지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자가 내게 줄 돈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격분하게 될지라도 그대로 따라가면 하나님을 놓치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는 그 사람이 주는 돈이 없어서 굶어 죽을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타이밍까지는 내 인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250만 명을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먹이셨던 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한 입장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격분의 에너지를 하늘 쪽으로 바꿔서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에너지로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하늘의 보물을 많이 갖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며 세상에 부당한 부자들을 여기저기 포진해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부당한 부자들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많이 갖기 위한 악역을 담당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물을 많이 갖도록 보물이 될 수 없는 재물을 그들로 하여금 끌어안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얼마나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굶어 죽지 않습니다. 굶어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타이밍에 하나님이 데려가시기 때문이지 돈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십자가를 붙잡고 돈에 대한 태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는 계기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돈은 하나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끌고 가고자 합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하시고 재물 대신에 보물을 버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