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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2

녹취문: 기도가 보좌를 움직인다는 거짓말_태승철 (약 5:12~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9.18|조회수5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도가 보좌를 움직인다는 거짓말>의 줄거리 :

야고보서를 끝내면서 특별히 기도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지만 그의 기도를 따라서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다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흔히들 하는 '기도가 보좌를 움직인다'라는 말이 맞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정말 신성 모독의 망언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의 한 측면을 묘사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보좌를 움직인다는 거짓말

 

(야고보서 5:12~20)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19절은 야고보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야고보서 전체의 주제는 말하고 행동해야 될 때, 돈과 관계해야 될 때, 그 밖의 생활 속의 모든 순간에 믿음이 끊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일로 인해 믿음이 끊긴 상태의 형제를 돌아오게 한다면 대단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엘리야가 언급됩니다. 17~18절을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엘리야의 기도는 보좌를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보좌가 엘리야를 움직여서 기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많이 오해됩니다. 본문을 글자대로만 보면 엘리야가 기도했기에 비가 오지 않았고 또 기도했기에 비가 내렸다는 식으로 이해됩니다. 그야말로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묘사한 것 같습니다. 선민의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까지 2000년,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0년으로써 도합 4000년입니다. 그런데 단언컨대 이러한 선민의 역사 속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가 움직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거꾸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선민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셨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엘리야의 기도 또한 하나님이 움직이셔서 하게 된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가 보좌의 하나님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보좌의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셔서 기도하게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신 크고 은밀한 일들을 응답으로 주십니다. 여기서 미리 준비하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흔히 우리는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보좌에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가만히 앉아계시지 못하고 그야말로 우리의 기도대로 행하시기 위하여 움직이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물 샐 틈 없이 이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죽을 날을 결정하셨으며 앞날을 다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둔다면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는 발상은 주객전도입니다.

바로와 요셉의 관계에 비유하자면 내가 바로가 되고 하나님을 요셉으로 삼아 부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는 나라를 잘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나랏일이 자기 뜻대로 풀려가기를 원했고, 요셉은 총명함을 발휘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우리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형태가 되기를 기대했고, 그렇기에 본문 또한 오해해 왔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려 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북 왕국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만연하던 때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남신과 여신으로 여겨지던 우상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 선민들은 오직 부자가 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을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나타나서 대결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2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맹세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 엘리야를 언급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과 이미 모종의 협의를 끝마쳤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려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엘리야에게 알려주셨기에 감히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장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엘리야가 기도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았고 또 기도하니 비가 왔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가뭄과 갈멜산의 대결 후에 엘리야가 기도했기 때문에 비가 온 것이 오해를 낳은 겁니다. 표현만 보자면 보좌를 움직인 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가뭄이나 비 오는 일에 대해 아무 관심이나 생각이나 계획도 없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을 엘리야가 스스로 생각을 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선민들은 단단히 혼이 나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해보니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우상들입니다. 비를 오지 않게 함으로써 곡식이 익지 않으므로 풍요에 차질이 생기면 선민들이 바알과 아세라가 거짓 신임을 깨닫고, 풍요와 다산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깨닫게 될 것 같았습니다. 쉽게 말해 엘리야는 ‘비가 안 오면 정신 차리겠지. 이후에 여호와의 종인 내가 다시 비를 내리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믿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러한 생각을 아뢰며 기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도 ‘너의 말을 듣고 보니 기가 막히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선민들이 풍요와 다산의 우상 숭배를 그만두고 정신을 차리겠구나. 엘리야, 너는 정말 총명하구나. 나는 생각도 못 한 일을 하다니, 너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큰일 날 뻔했다. 이제 너의 계획대로 하자.’라고 말씀하시며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이것이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고 이해하는 상황의 전말입니다.

이러한 가정을 통해 보면 기도로 보좌를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인지 확연히 느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 없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제 네 계획대로 하자!’라고 하시며 가물게도 하시고 비를 내리게도 하신 것일까요?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비 내리는 일에 아무 관심도 없으셨고, 선민들의 우상 숭배에 대해서도 아무 관심이 없으셨다가 엘리야가 계획하고 아뢰니까 그때서야 깨달으시고 움직이셨을까요? ‘네 생각이 내 보좌를 흔드는 바람에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하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말처럼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은 달리 없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임에도 기도하면 비가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했다는 말씀은 그런 뜻으로 제시된 내용이 아닙니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 자연의 일은 사람이 알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 장로는 앞선 7~8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농부와 비의 관계를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성정을 가진 엘리야는 자연의 일에 관여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의인은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입니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늘 쪽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측근이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측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에 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하나님의 측근을 관여시키고 참여시키실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깨우침을 받으시고 그 내용대로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지 않은 일을 기도해서 응답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보니 정말로 네 생각이 맞다. 내가 주권자로서 깨닫지 못해서 잘못했다. 미안하다. 네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 주겠다.’라는 법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도는 거짓말이 됩니다. 바로의 입장에서 요셉을 부리듯 하나님을 부리고자 하는 종교의 기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우리의 악함 때문에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뜻이 땅에서 우리의 기도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 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럴 때 의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필요하고 특별히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통로로써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인격 자체가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보좌를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바알 숭배에 빠진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움직이셨습니다. 계획하셨던 가뭄과 비를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땅에서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살펴봅니다. 14~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16절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병과 죄가 연결되고 의인의 기도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는 일관성이 무척 중요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된 말씀들에 담겨있는 취지의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 표현이 다를 수 있으나 취지가 일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관된 취지를 염두에 두고 본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병든 자가 있으면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를 청하라 하지 않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병 고치는 은사자의 힘이 크다고 하지 않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는 특정인에게 주어질 수 있지만 의인이라고 함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늘 쪽으로 마음이 머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한 이유는 쉽게 말해 병이 들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의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병이 들면 믿음이 끊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26절을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모든 재산을 다 가져다 쓸 만큼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의술이란 우리의 기준에서 보자면 민간요법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인정받는 의술이 있었고 의사가 있었습니다. 병이 들면 제일 먼저 의사를 생각하고 의술에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때 믿음이 끊어지기 쉽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의사에게 보일 생각을 하지 말고 먼저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장로는 지금 예배당의 장로와는 달랐습니다. 야고보 또한 장로이고 첫 번째 감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오르신 사건을 목격하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삼았고 마음이 하나님 가까이 가 있는 측근이었습니다. 예배당 직분으로써의 장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가 하나님의 측근 되기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장로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 장로는 의사를 찾아가기에 앞서 하나님의 측근들을 청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병든 상황에서 이러한 장로를 청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쪽과 하늘 쪽으로 나눠집니다. 몸이 있는 세상 쪽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겨두고 마음 놓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 하늘 쪽으로 가서 하나님의 측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을 실천하는 입장에서 병자와 만나 이야기를 하면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과 하늘이라는 틀 안에서 병든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장로가 하는 일은 병자의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넘어가는 일을 강화시키고 의인이 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19~20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병자를 의인 쪽으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급한 이유는 혈루증 걸린 여인이 잘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재산만 탕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병든 자는 의술을 거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안수를 받거나 성스럽게 구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의 기름이란 약의 일종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약이 없었기에 웬만한 상처에는 기름을 발라 보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먼저 장로를 청하라 합니다.

장로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쪽과 하늘 쪽이 있음을 알고 마음의 행위를 하늘 쪽으로 기울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의인이었습니다. 병든 자에게 이러한 장로를 청하라는 것은 먼저 마음이 하늘 쪽으로 옮겨가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저 병을 고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끊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의인의 상태가 되었다면 몸이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는 훨씬 더 쉬워집니다. 16절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의인 쪽으로 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될 일 중에 하늘에서 결정된 일이 있을 때 그 일은 의인들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뜻을 정하셨다면 의인이 된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 병이 낫는 일도 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 장로는 병과 죄를 연결합니다. 다시 15~16절을 보면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15절에 언급된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감을 의미하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입니다. 빗나가는 죄를 기준으로 병 고침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병은 불편한 상태이고 온전치 못한 상태입니다. 신발 안에 모래알만 들어가도 불편한데 몸에 병이 생기면 모든 일이 껄끄럽기 마련입니다. 그 불편함을 느낄 때 그냥 흘려보내거나, 다른 방법에 의존해서 믿음을 끊어지게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갔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또 16절에서 죄가 언급되는데 여기에서 죄는 실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것이 근원적인 죄라면, 실책은 하나님을 빗나감으로 나타난 구체적 잘못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해서 서로 마음이 하나님을 빗나감이 없나 확인하고,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가지 않고 세상 쪽에 머물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서로가 의인이 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면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그의 몸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병 고침의 문제도 들어있을 수 있기에 우선은 하나님의 측근이자 의인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서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방송을 통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말을 들을 수는 없지만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의 내용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지 말고,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실책을 범했는지 생각하고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가서 하나님의 측근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애씁니다. 이것이 우선이 되다 보면 몸쪽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병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정한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확률은 높아지게 됩니다.

병은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에도 생길 수 있고, 자녀 관계에서도 생길 수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병이라는 문제가 생길 때 우선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전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장로를 청하라는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우선 의인이 되고 보면 내가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의인인 장로나 형제들의 기도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내가 의인이 됨으로써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죄를 이야기한 이유는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보면 명확해집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는 ‘사탄의 사자’라 부를 만큼 지독한 지병이었습니다. 스스로는 다른 사람의 병을 많이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병을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보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의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병을 허락하셨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조금만 삶이 안정적이고 평안하면 하나님을 빗나가는 교만함이 생기는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빗나가는 교만함이 곧 죄입니다. 야고보 장로 또한 이러한 의도에서 병을 죄와 연관시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일이 조금만 편안한 것 같으면 세상에 취해버리고 빠지고 하나님에게서 빗나가는 죄를 짓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주십니다. 십자가를 붙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만드심으로써 하늘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들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빗나가면 하늘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땅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우리에게서 보여야 할 태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병이 들든, 재정에 문제가 생기든, 자녀에게 문제가 있든, 모든 문제에 하늘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를 붙잡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그 문제에 대해 이루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끊겨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믿음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 몸이 아프면 의사를 부르기 전에 장로를 청해서라도 믿음에 도움을 받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을 빗나갔는지를 발견하고, 어디에서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 쪽에 마음을 두게 되었는가, 무엇이 내 마음을 세상 쪽에 붙들어 두고 있는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음을 하늘로 보내 하나님의 측근이 되면 지금 내가 몸으로 당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반드시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갖고 계신 뜻이 내려올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마음이 십자가 바깥의 세상 쪽으로는 아예 가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를 세상을 빠져나가는 출구로 보는 단계에서 세상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으로 보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예 장벽의 상태를 이루고 살아가게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회사의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회사 전체의 운명을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을 통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전체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신 것과 같습니다. 한 가정의 죽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고자 하실 때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그 뜻을 땅에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하늘 보좌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하도록 움직이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이셔서 기도하게 되었다면 기도의 응답은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준비되지 않은 뜻을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땅에서 이루시는 일은 절대 없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의 결론을 생각해 봅니다. 삶의 모든 문제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끊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마음을 문제에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을 빠져나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몸으로 만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하늘로 가서 하나님의 측근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이 일치될 때 하늘에서 정하신 뜻들이 내 몸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생활의 문제들에 임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은 이루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따라 기도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내 몸으로 사는 모든 영역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정하신 뜻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줄을 잇는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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