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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대신 귀신 따라 하나님 믿음>의 줄거리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말 강한 어조의 말씀입니다. 행위로 구원 얻음을 말씀하심이 아니고 오직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고 또 별도로 행위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제대로 되었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행위가 보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쐐기를 박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예수님 따르는 믿음이 아니라 귀신을 따르는 믿음이라고.
예수님 대신 귀신 따라 하나님 믿음
(야고보서 2: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자면 귀신을 따라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야고보 장로는 무척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읽지 않은 20절을 보면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라고 하였고, 24절을 보면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6절을 보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무척이나 강한 어조의 말씀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서운 말씀은 바로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귀신을 따라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믿기와 귀신을 따라 하나님을 믿기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과 귀신을 따르는 믿음의 공통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영적인 사실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대로 귀신들에게도 믿음은 존재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가진 믿음의 내용은 참으로 방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 하나님이 좋음이라는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인간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귀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실 수 있는 해방의 사건이며, 구원의 사건에 대해서는 이 세상 어떤 인간보다 귀신들은 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야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압니다. 성령이 계시며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주어짐에 대해서도 모를 리 없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2,000년 역사 속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한 사람을 뽑는다면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고, 현대에는 칼 바르트나 헤르만 바빙크 같은 인물들을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신학자보다도 귀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일지라도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지식은 귀신 한 마리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소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면서 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심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들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학에는 여러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신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론이라고 합니다. 창조 이후에 인간의 타락상에 대한 이야기가 죄론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다시 해방시키신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구원론 혹은 화해론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쳐서 다시 기독론 또는 그리스도론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도 성령론이 있고, 교회론이 있으며, 종말론도 있습니다. 귀신들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해박합니다. 심지어 종말론에 대해서조차 이 세상이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떤 인간보다도 귀신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귀신을 따르는 자들의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천국이 있다는 사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은 귀신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영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귀신을 따르는 자들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일지라도 그 저술한 책의 내용만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인지 귀신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교의 총장일지라도 총장이라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을 따라 믿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이야기하고, 천국의 있음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독생자이심을 이야기하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주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라 믿는 것인지 귀신을 따라 믿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영적 사실들은 귀신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과 귀신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차이점은 단 하나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실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사랑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좋아하며 바란다면 귀신을 따르는 자의 믿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좋아하며 하나님을 바란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믿음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는지 혹은 이 세상으로 가는지의 차이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인지 귀신을 따르는 믿음인지가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누구나 다 돈을 좋아했습니다. 돈을 좋아하던 중에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을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해의 사건이며,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여전히 돈을 향해 있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귀신이 넣어준 상태입니다. 그 결과 귀신을 따라 더욱더 열심히 돈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까지 동원해서 돈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경고하기 위해 강한 어조로 비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모든 영적 사실들을 다 알고 다 인정할지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믿음에서 마땅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설령 신학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사실들에 대해 정통할지라도 마땅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신을 따르는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아닌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은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라는 신학적 지식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맞닥뜨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믿음입니다.
이는 마치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빠와 직접 마주함으로 믿음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어느 회사에서 어떤 직위를 가지고 있는지, 몇 살에 엄마와 만났는지, 키가 몇이고 체중은 몇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서 아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아빠가 앞에 있으면 그 아빠를 실제로 끌어안으면서 믿음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마음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안기듯이 하나님께 안기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많이 갖고 싶어 하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이게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아빠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끌어안는 사람의 삶에는 풍랑 속에서도 잠을 주무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또한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평강을 누렸던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실제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여 아빠라고 부르며 끌어안는 상황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사실들만을 지식으로 보유하고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은 귀신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 열심히 추구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끌어안는 믿음의 상태를 유지할 때 이 땅에 남아있는 몸에는 이와 관련된 일들이 나타납니다. 마음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믿음의 행위를 하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해 갈 때 나타나는 행위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해서 아빠라고 부르며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행위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쉽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지, 마음이 귀신을 따라 세상 것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는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총장처럼 이야기하고 신학자처럼 성경 66권을 다 꿰고 있어도 그 마음이 하늘로 가고 있는지 땅으로 가고 있는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지 귀신을 따라가는지는 말과 행위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끌어안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말과 행동이 나타나고, 반대로 귀신을 따라 이 세상 것들을 마음에 끌어안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상태가 분명히 구분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구분되는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웃에 대한 배려와 구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끌어안는 상태가 되면 이 땅에서 내 몸이 마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긍휼이 바탕이 됩니다. 내 마음은 하늘에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땅에 있습니다. 이 하늘과 땅의 격차로부터 긍휼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 바탕이 될 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당연히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귀신에게 배워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채우기에 바쁩니다. 내게 유익이 될 사람이라면 끌어당기고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밀쳐내면서 차별하게 됩니다. 긍휼이 바탕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이 세상에서 채움 거리를 찾거나 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으면 비로소 이 세상에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고 있으면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일에 급급합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워야 하는 것은 마음이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으나 마찬가지이지만 하늘에 올라간 사람의 마음은 유일한 채움이신 하나님을 붙잡기에 이 땅에서는 눈곱만큼도 채움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에 비로소 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무엇인지가 보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관심하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의 공백을 땅에서 채우려는 사람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채울 수 없기에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이 보이지 않고 나를 채우기 위한 유익을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며 끌어안는 상태에서 나오는 행위와 귀신을 따라가서 하나님에 대한 온갖 사실을 입으로 언급하면서도 마음을 세상으로 채우려는 사람의 행위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완전히 다른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그가 예수님을 따라 믿는 사람인지 귀신을 따라 믿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 장로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가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라 믿었는지 귀신을 따라 믿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실제로 아빠라고 부르며 끌어안았다면 긍휼의 마음이 나타날 것입니다. 교리와 이론과 종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긍휼의 마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야고보 장로는 인내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귀신을 따라가고자 하는 죄적 체질과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귀신은 세상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소망을 심어줍니다. 세상 것을 가지면 만족하리라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귀신들은 마치 종합 선물 세트를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는 사람은 대상이 아닙니다. 애초에 저주 속에 있기에 잡힌 물고기처럼 여길 뿐입니다. 죄악으로 빠졌던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기뻐하셨던 것처럼, 귀신들은 이와는 반대의 상황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으로서 귀신을 탈피하고, 귀신을 박멸하고, 귀신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여겼던 사람의 마음이 세상 것을 좋아하게 되어서 다시 귀신을 따라나서는 상황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입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고, 입으로 천국의 있음을 믿고, 입으로 십자가 사건이 죄에서 해방되고 용서받게 한 사건임을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학책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보인다면 귀신에게는 종합 선물 세트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영적 사실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지 않는다면 귀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세상 것을 가졌으면 좋겠고,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는다면 마음은 세상을 향해서 흘러갑니다. 귀신들은 이러한 사람을 보며 좋아하며 파티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21~25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들을 언급하며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을 언급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그 어떤 소중한 것보다 하나님을 더 아까워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 아브라함을 막으십니다. 12절을 보면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까워함과 하나님을 경외함이 언급됩니다. 아까워함은 내게서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 잃어버림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똑같은 마음이 아들인 이삭에 대해서는 아까움으로 표현되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경외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끌어안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아까워서 독자 이삭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을 특징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 땅에서 아깝게 여겨질 만한 것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것은 마음이 땅이 아닌 하늘로 갔음을 가리킵니다. 땅에 있는 소중한 이삭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더 아깝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을 바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삭과 같은 존재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끌어안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까워하고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린 자들입니다.
라합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과 조국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까워하기 위해 조국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립니다. 아브라함의 아까워하는 마음에서 이삭이 버림받았다면, 라합의 아까워하는 마음에서 버림을 받은 대상은 조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까워하기 위해 세상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릴 때 그것들은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됩니다. 이삭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아까워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한편 기생 라합이 버린 조국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버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아까워하는 일들은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놓고 하나님만 아까워서 마음이 하늘로 갈 때 마땅한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돈이 아깝습니다. 건강이 아깝습니다. 자존심이 아깝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이 아까워서 내 몸도 버리는 사람의 행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유일한 창조주이시고,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십자가 사건은 해방의 사건이고 죄 사함의 사건인 것을 아느냐? 참으로 잘하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것을 아느냐? 참으로 잘하도다. 이에 대해 야고보 장로는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끌어안은 자의 삶에서는 마땅한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을 가진 자의 행위와 귀신을 따르는 믿음을 가진 자의 행위는 같을 수 없습니다. 행위를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인지 귀신을 따르는 믿음인지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무서운 말씀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뼛속에 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시라도 이제까지 귀신을 따르는 믿음의 형태를 보이며 살아왔다면 그러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끌어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이 땅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