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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온유함은 생활 현장 속 용광로>의 줄거리 :
모든 생활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사람과 상황과 문제와 변수에 대해 오직 내 말과 행동이 정답일 수만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 모든 대상을 십자가 온유함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온유함은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 안으로 받아들인 문제는 다 녹아 없어지고 그 문제 속에 감추어져 있던 정답만 제련되어 나오게 됩니다. 이 정답이 바로 지혜이고 총명입니다.
십자가 온유함은 생활 현장 속 용광로
(야고보서 3:13~18)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 장로는 1장에서 이미 지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지혜를 온유함에 연결하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구약의 잠언처럼 이해해서 이어지는 맥락 없이 단편적인 영적 교훈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다른 성경에 못지않게 일관된 맥락과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하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십자가 온유함은 생활 현장 속 용광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온유함은 생활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사람 관계와 모든 상황과 모든 문제를 끌어들여 녹아 없어지게 만드는 용광로라는 뜻입니다. 13절을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지혜와 온유함은 야고보서에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주제입니다. 좀 더 풀어보자면 ‘만약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혜와 총명을 선행으로 증명하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믿음이 있다면 나타나는 증거로서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지혜와 총명 또한 믿음이라는 행위에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13절은 정말로 믿음의 결과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당연히 선행으로 나타나며, 그리고 이 선행은 지혜로부터 주어지는 온유함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연관된 온유함 안에서 행동할 때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지혜와 총명이 주어질 수 있는 믿음이 있음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지혜와 총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지혜와 총명을 따르는 행동은 온유함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지혜가 주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을 나누며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머물러 하나님만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면 이 땅에서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정답을 따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연합함을 생활 현장에서 해나가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생활 현장 속에서 다양한 삶의 상황이나 문제나 사람을 대면합니다.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겉으로는 굉장히 온유해 보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이 나를 온유한 사람으로 보는 상황이 십자가 온유함이고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의 온유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대상을 상대하든지 마음만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곧 십자가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고 하늘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지금 내게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있을지라도, 어떤 사람이 나를 대적하더라도, 내게 가장 시급한 일은 마음이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아버지를 직면해서 아버지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몸으로 만나는 상황이나 사람이나 변수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일에 한눈을 파는 셈입니다. 십자가에 한눈을 팔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한눈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눈을 파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몸으로 만나는 상황이나 사람들이 나의 호불호의 기준에 의해서 걸러짐이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파수꾼이 없는 무방비한 상태처럼 보입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대상일지라도 내 삶 안으로 수용되는 결과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나의 유일한 있음으로 여겨서 하나님의 존재감만으로 마음이 채워지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나의 유일한 좋음으로 여겨서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해주시며,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체성만을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이 수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삶 속으로 아무런 저항감이나 거부감 없이 수용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되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감이 몸이 만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온유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십자가에 한눈팔고 하나님께 한눈파는 동안에는 미처 세상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집중하지 않기에 세상일이나 사람들을 거부하거나 뿌리치고자 반응할 수도 없고, 좋아해서 잡아 끌어당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일을 끌어당길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나쁘다고 여기는 일을 밀어낼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온유함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십자가는 우리를 삶에 대해 온유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할 마땅한 일임과 동시에 세상에 대해 좋아하거나 거부하는 반응들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순간과 장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마주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내게 주어지도록 허락하신 일들에 대해 내가 주체가 되어서 좋아하여 끌어당기거나 싫어하여 거부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아하여 마음에 끌어당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다만 이것이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닌 이유는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면 몸이 만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과 사람과 변수에 대해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당신의 뜻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으로 만나는 상황과 문제와 사람과 변수의 상태와 상관없이 수용할 수 있는 온유함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온유함은 삶의 변수를 받아들이고 문제나 사람을 수용하게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지혜의 온유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연결되어 한눈을 파는 상황에서 온유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지혜가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 한눈을 파는 동안 받아들여진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체로 사는 동안 생활 현장에서 어떤 상황이나 사람 혹은 변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일지라도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은 나를 대적하는 사람, 내 인생을 순탄치 못하게 하는 변수, 원치 않는 상황도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진짜 문제는 그러한 일들에 대응하고 반응하는 상황에서 나의 말과 행동이 정답이 아닐 때 발생합니다. 내가 정답이 아닌 말과 행동을 할 때 주어진 상황들이 불행의 원인들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끔찍해 보이는 상황과 사람과 변수일지라도 내가 정확한 말과 행동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내 인생을 불행과 혼란으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그것들을 불행으로 만드는 힘은 나에게서 비롯됩니다. 정답이 아닌 오답의 말과 행동을 할 때 그것들은 비로소 나를 혼란으로 끌어가는 강력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정답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야고보 장로는 지혜의 온유함을 언급하였습니다. 지혜의 온유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과 행동에 대한 정답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주어지든, 어떤 사람을 마주하든, 어떤 변수가 발생하든 내가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생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거부반응 없이 수용됩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날카로운 기준을 가지고 주어진 일들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 한눈파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게 주어진 일들은 마음에서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어떤 문제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변수라도 이 온유함을 견딜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온유함 속에서 다 녹아 없어지면서 문제의식, 변수에 대한 두려움, 상황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오직 정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전에 십자가 온유함이 없는 상태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먼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온유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문제성은 다 녹아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문제와 사람과 변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정답이 제련되어 나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잠언 16장 16절을 보면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지혜와 총명이 언급되었듯이 잠언의 말씀에서는 지혜와 명철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잠언 20장 15절을 보면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금과 은을 많이 가지는 것으로는 내 삶의 혼란과 마음의 공허함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나로부터 나오는 악행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아무리 많은 금과 은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됩니다. 지혜란 금이 있든지 없든지 그 상황에 대한 정답입니다. 정답의 말과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평강이 깨질 수 없고, 불행이 찾아올 수 없으며, 삶의 혼돈과 혼란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혼돈과 혼란, 마음의 불행과 공허함은 몸으로 만나는 문제와 사람과 변수에 대해 오답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생활 속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허락되고 주어진 것들입니다. 지금도 내가 마주하는 문제를 내려다보고 계신 하나님 안에는 항상 답이 있습니다. 만약 암에 걸렸다면 오늘 당장 생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몰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 암이 생기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셨기에 암이 생긴 것입니다. 암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면 정답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셨음을 믿는다면 내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암이 생긴 몸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은 내 기쁨의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기쁨이시기에 그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암이 생긴 상태에 대해 판단하고 거부함이 없어집니다. 암을 싫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하는 온유함입니다.
예수님께 한눈팔아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만을 소망합니다. 열정적으로 아버지를 구하고, 아버지를 많이 갖기를 원하고, 아버지로 마음이 건강해지기를 바랄 때 암이 생긴 몸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정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정답이 주어지면 암에 걸렸더라도 삶은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몸이 건강하더라도 내가 만나는 상황과 사람과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삶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께 한눈팔아 하늘로 올라감이 없다면 온유함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판단해서 좋으면 끌어당기고 싫으면 거부하는 동안에 삶은 반드시 혼란 속에 빠져들고 행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내가 몸으로 만나는 삶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무조건 수용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누구든, 어떤 변수가 있든 일단 수용되면 내게 불안과 혼란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모든 문제성은 사라지고 그 일들에 대한 정답만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문제나 변수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대할 때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삶 전체는 금과 은보다 더 좋은 지혜와 총명의 광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지혜와 총명은 말과 행동의 정답입니다. 이 지혜와 총명은 매 순간 내가 마주하는 사람과 문제와 변수를 통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문제와 변수들에서 지혜를 뽑아내는 용광로는 바로 십자가 온유함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하나님께 한눈파는 사이에 문제와 변수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좋다고 끌어당기지 않고 싫다고 밀어내지 않습니다. 반응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이는 온유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유함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내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생활 현장에서의 모든 문제성은 사라지고 주어진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한 정답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제 말씀이 마음에 받아들여져서 심겼다면 마치 주인에게 지시를 받는 노예의 마음가짐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임과 동시에 내 마음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기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하나님! 이 상황이 어떻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더 벌게 해주시고.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이 유지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16절을 보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온유함의 반대되는 상태가 시기와 다툼으로 언급됩니다. 시기는 일종의 열정입니다. 이 열정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되겠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면 시기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바로 이러한 시기와 다툼을 십자가 온유함, 지혜의 온유함의 반대되는 마음의 상태로 언급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생기는 과정 또한 온유함의 반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에 머물러 있으면 이 땅에서 마음 채움을 위한 좋음을 찾게 됩니다. 이 땅에서 좋음을 찾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많이 가진 것을 보면 시기하게 됩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여 이해가 상충할 때 다툼이 일어납니다. 결국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음이 시기와 다툼의 이유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지 않은 마음은 이 세상에서 좋음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이로부터 화평이 나타납니다. 18절을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땅에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을 시기할 필요도 없고 다툴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좋아해서 나에게 사기를 치려고 할지라도 그와 다툴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내게는 돈이 좋음이 아니기 때문이고, 아버지께서 그 사람의 행동을 모르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사기를 쳐서 내 돈을 가져갔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이기에 또한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화평을 심는 일입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고 함은 그 대신 지혜와 총명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은 말과 행동의 정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온유함, 지혜의 온유함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얻은 지혜와 총명은 말과 행동에 대한 정답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말과 행동에 대한 정답으로 여기며 자랑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개발서, 재테크 방법, 건강 유지 방법, 자녀교육 방법, 행복한 부부 십계명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방법은 이 세상에서 좋음을 추구하며 기회만 있으면 시기하고 다투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주어진 상황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자랑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문제가 있으면 전문가에게 상담하거나 책을 읽음으로써 부부 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는 정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문 15절을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문제나 상황이나 사람 관계에 대해 제시하는 방법들은 정답일 수 없습니다. 책이든 인터넷 영상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제시되는 모든 답은 땅 위의 것이고, 정욕의 것이고, 귀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점에 나가든 인터넷을 검색하든 삶의 문제에 대해 정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면 그 길은 없는 길입니다. 어느 정도로 없느냐면 죽어도 없는 길이고, 절대로 없는 길입니다.
그 모든 대답은 스스로 십자가를 우려내는 과정을 통해 주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온유함의 용광로 속으로 삶의 모든 문제나 상황은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와 상황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대답을 제련할 수 없다면 정답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치려는 세상의 모든 답은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땅 위의 것이고, 정욕에 의한 것이고, 귀신이 넣어주는 답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우리는 혀가 지옥 불에 닿아있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답이란 결국 지옥에서 나오는 기운을 뿜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란 이 땅에서 십자가 온유함을 드러냄으로써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합니다. 지혜가 온유함의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온유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윤리적 덕목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기에 받아들임의 온유함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땅에서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성결은 땅의 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답입니다. 화평은 누구와도 다툴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추구하기에 땅에서 좋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없습니다. 관용은 나를 향해 비난하고 그릇된 태도로 적대시하더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적대시하더라도 온유함의 용광로에 녹여버리기에 적대시함이 내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정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비난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관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서 양순은 하나님이 내려다보실 때 어떤 상황을 허락하셔도 다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때는 땅에 머무는 어떤 사람을 대해서도 긍휼을 드러내게 됩니다. 또 편견과 거짓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판단하여 끌어당기거나 거부함이 없이 수용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정답이 뚜렷하게 나타나기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답을 아셨기에 풍랑 만난 배 위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풍랑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 속에서의 정답을 안다면 풍랑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정답을 모른다면 풍랑이 아닌 작은 파도에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한눈팔아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없음을 인정하게 되고, 고스란히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지는 온유함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십자가 온유함은 용광로처럼 모든 상황과 문제들의 적대성을 녹여버립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상황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정답만을 제련해 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가 용광로가 될 때 몸이 만나는 것을 무조건 수용하게 되고, 계속 하늘의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용광로의 삶을 한 시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마음의 눈이 십자가를 향하게 하시고,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 부자 되기만을 경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받아들여진 모든 일들에서 문제성이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이 갖고 계신 정답만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