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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2

녹취문: 세상과 원수돼야 하나님 절친된다_태승철 (약 4:1~1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9.11|조회수11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과 원수돼야 하나님 절친된다>의 줄거리 :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세상과 친구 되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기를 자처하는 셈이라는 말씀입니다. 벗은 친구로서 마음이 가까운 사이라는 뜻입니다. 공백을 가진 마음이 가깝다는 뜻은 채움과 기쁨을 위하여 무척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는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절친은 절대로 세상과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과 원수돼야 하나님 절친된다

 

(야고보서 4:1~10)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본문 1~10절까지는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제가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하게 나열되다시피 하는 내용들을 전부 다루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제를 이해함으로써 모든 구절에 대한 이해의 바탕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간음한 여자들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1절에서 언급된 정욕으로 인한 다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2~3절을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대부분 정욕의 기도를 드리면서 이 말씀을 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정욕으로 인한 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에 간음한 여인들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여성 중에서 간음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 영적으로 정욕을 부림으로써 간음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세상과 벗 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하는 기도입니다. 본문에서는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파생되어 나옵니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면 세상과 원수 되는 것이 하나님과 벗 되는 것입니다. 앞선 2장 23절을 보면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였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친구라는 신분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친구란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깝다면 하나님의 친구라 불릴만한 사람이라는 것이지 신분상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자 지위는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라는 표현은 아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은 아내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로 비유되었는데 이 또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선택하여 기뻐하고 만족하려는 상태를 아내의 간음에 비유한 것입니다.

 

세상의 벗은 하나님과 원수이기에 하나님의 벗은 세상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세상의 벗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곧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로 작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앞서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거리를 가깝게 표현하기 위하여 친구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8절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세상을 가까이하는 자들은 세상의 친구가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감옥에 들어갈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정직하고 근면하고 도덕적으로 문제없이 살았더라도 죄인일 수 있습니다. 도덕은 돈을 좋아함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도덕은 남편이 아내를 좋아하고, 아내가 남편을 좋아하고, 부모가 자녀를 좋아함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만나고 가지고 소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은 세상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도덕과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특징이란 바로 이렇게 육체로 관계 맺은 대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세상과 가까이 지내고, 세상과 마음이 붙어버리고,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것이 죄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벌 받을 짓을 하지 않았어도 몸으로 만날 수 있는 세상을 가까이하면 죄인입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손을 깨끗이 하라’는 것은 세상과 가까운 상태, 세상과 친구인 상태에서 손을 대는 일마다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은 마음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받았다면 마음이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좋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해야 할 마음으로 다른 대상을 좋아함으로써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더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최대치로 가까운 친구를 속된 말로 절친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절친이 있다면 하나님의 절친도 있습니다. 다만 세상의 절친이든 하나님의 절친이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될 수 있는 일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에 하나님과 친구도 될 수 없고 원수도 될 수 없습니다. 지옥으로 들어가야 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섭리는 닿지만 하나님과 어떠한 인격적 관계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허락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절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내 마음의 거리 혹은 세상과 내 마음의 거리는 어떻게 측정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절친이냐 세상의 절친이냐가 결정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원수냐 세상의 원수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기준으로 한쪽에는 세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이 세상 쪽에 머무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 세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좋아한다고 해서 다 절친은 아닙니다. TV에 나오는 어떤 연예인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그 연예인이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한다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 중에서도 특별히 더 친한 절친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절친인지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기준은 하나님을 좋아하는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절친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내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편의상 하나님을 좋아함의 수준을 3단계로 구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이 하늘에 들락거리는 수준입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알고 그 사실을 믿기 시작한 단계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단계는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진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마음이 항상 하늘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절친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사실을 믿기 시작한 사람, 하나님과 친해진 사람, 하나님과 절친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친 중에는 아브라함이나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야고보 장로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할 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세 단계를 세상에도 상응시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세상에 대해 취하는 태도, 하나님과 친해진 사람이 세상에 대해 취하는 태도, 하나님과 절친인 사람이 세상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봄으로써 십자가를 우려내는 십자가 생활화가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유일하신 하나님의 좋음을 알게 된 사람은 세상과의 관계가 서먹해집니다. 마음이 십자가를 넘나드는 수준의 영적 상태를 보입니다. 아직 유일하신 하나님 좋음의 실제 느낌은 약합니다. 오히려 여전히 좋음의 실제 느낌은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하나님의 좋음을 이론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양심이 발동해서 세상에 마음 놓고 빠지지 못합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하늘 쪽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여전히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때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사실을 놓치고 세상 쪽으로 넘어와서 흠뻑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양심이 작동하기에 겨우 헐떡거리면서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를 지내는 동안 세상과 서먹해짐은 점점 커집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입니다. 이를 세상에 대한 태도로 바꿔보면 세상과 결별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들락거리다 보면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내 환경에 새로운 긍정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마음에 평강을 느끼고 채워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좋음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점차 세상과의 결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좋음에 빠지게 된 상태입니다.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세상이 필요 없는 상태로 점점 나아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이 아닌 하늘 쪽으로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나님의 맛은 점점 더 짙게 느껴지고 그럴수록 세상을 기웃거림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는 고작 세 가지 단계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만들어질 수 있지만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과 친구가 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친해짐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과 절친이 되는 단계입니다. 절친이라 함은 하나님과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절친의 단계에 들어가면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원수로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은 세상 것이 없어도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 깊이 눈을 뜨게 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 하나님의 절친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세상 것은 없어도 되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 것을 원수나 배설물처럼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상대하고 관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절친인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절친인 사람들은 마음에 세상 것이 조금이라도 스며들지 않도록 십자가를 붙잡는 경각심을 늦추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좋음을 알게 된 단계나 하나님의 친구 단계에서는 평소에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생활 현장에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잠시라도 마음이 빨려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음을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를 의심하고 불평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는 분노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0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반석을 두 번 내리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독한 패역함에 마음이 스며들어서 하나님의 좋음을 잠시나마 놓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친구라 불릴만한 사람이었으나 절친의 단계에 도달하기 전 친구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많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전도 여행에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를 동행시키는 일에 대해 결국에는 포용할 것이면서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패역한 상황을 듣고 다급히 방문했다가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린도후서에 이르러서는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라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친구에서 절친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친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말려들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절친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절친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언제나 기쁨과 만족으로 배부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직면한 상태이기에 마음의 흡입력은 하나님만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명확합니다. 돈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늘 보좌에 계시는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을 직면하는 동안에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작동하는 마음의 흡입력이 아무리 하나님만 빨아들여도 하나님께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이 없어질 때가 없고, 하나님이 안 벌리는 때도 없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직면하는 동안 항상 기뻐합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직면한 하나님께서는 내 몸이 있는 세상의 주권자이시기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감사하게 됩니다.

 

야고보 장로는 앞서 정욕으로 인한 다툼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2~3절에서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언제나 채움을 욕구합니다. 그런데 야고보 장로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구하지 않았기에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기껏 구한다는 것이 정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친구가 된 상태에서 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정욕이란 세상과 친구가 된 상태에서 생기는 욕구입니다. 이러한 정욕으로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상태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정욕을 따라 세상 것을 구하고 있으니 잘못 구하는 것이고, 잘못 구하기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세상과 친구가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된 상태에서 타락한 욕구인 정욕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당신 자신도 구하지 않아 못 받고, 세상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을 원수로 돌려놓고 정욕으로 세상 것을 구하기에 그 또한 받을 수 없습니다.

이어서 5~6절을 보면 교만과 겸손이 언급됩니다. 교만이란 세상의 친구가 된 상태에서 세상 가치를 많이 모아서 그 위에 올라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반대로 겸손이란 내게 세상 가치가 주어졌을지라도 가진 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올라서고자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한 자는 십자가에서 하늘 쪽으로 마음이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세상 가치를 모아 놓고 그 위에 높이 올라서려 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내가 세상의 친구가 되고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을 시기하실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내가 세상과 벗 되지 않으면 시기하시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과 벗 되고자 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세상 가치를 많이 모아서 그것을 토대로 삼아 위에 서려는 교만이 있기에 세상과 벗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마음이 세상과 벗 되지 않고 낮은 자리도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하늘 쪽으로 머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 성령께서는 단순히 시기하심을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공짜로 주실지 기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마음이 머무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많이 얻어서 사람들 위에 높이 서려는 욕구는 교만입니다. 이러한 욕구 없이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아무리 낮은 자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마음이 머물게 되면 하나님의 시기는 끝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무엇을 공짜로 주시는가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함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늘 쪽에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 쪽으로 들어간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봄은 지속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쪽에 있을 때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출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상을 떠나서 하늘 쪽으로 마음이 넘어와도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세상 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동독과 서독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던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이 하늘 쪽에 와있는 동안에도 눈으로는 세상 사람과 세상 사건과 세상 문제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눈으로 세상을 보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놓치지 않을 때 십자가는 내 마음이 세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되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있다면 출구를 찾기 위해 십자가를 봐야 하고, 마음이 하늘 쪽으로 넘어갔다면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장벽으로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하늘 쪽으로 머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져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될 때 놀라운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번 여름에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 내외가 미국 여행을 가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오셨다고 합니다. 캐나다 쪽으로 들어가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면 난간 너머로 손을 뻗어 폭포를 만질 수도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낙하를 직면할 때의 감동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 막대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면 같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마저 생겨납니다. 물보라와 함께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리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물보라를 눈으로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피부로 느끼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면하는 짧은 순간만큼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마음을 지배합니다. 애인과 같이 온 사람도 애인을 마음에 담을 수 없고, 사업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사업을 마음에 담을 수 없고,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도 그 순간만큼은 병을 잊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함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하늘 쪽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감지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절친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직면하는 사람입니다. 정욕으로 인한 다툼, 구하지 못해 받지 못함, 교만, 간음과 같은 모든 일들은 십자가에서 하늘 쪽으로 마음이 머물지 않아 하나님의 친구이거나 절친이 되지 않으므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정욕으로 다툰다든지, 간음이라든지, 정욕으로 구한다든지, 손이 더러워진다든지, 마음이 더러워진다든지, 교만 등 이러한 모든 증상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이 하늘 쪽에 머물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하나님의 친구를 넘어서 하나님의 절친이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처럼 세상의 벗 됨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절친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늘 쪽으로 마음이 머무는 시간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늘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서먹해지고 하나님을 알고 있는 상태를 넘어서 하나님과 친해져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직면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절친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4시간 작동하는 마음의 욕구가 하나님만을 향함으로써 십자가에서 하늘 쪽에 마음이 머물게 하시고, 세상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친구를 넘어 하나님의 절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세상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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