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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2

녹취문: 십자가 삶은 무미래 무목적 무계획_태승철 (약 4:11~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09.14|조회수4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삶은 무미래 무목적 무계획>의 줄거리 :

내가 미래에 대해서 포부가 있고 그 포부를 성취할 계획을 세우고 따르고 있다면 나는 믿음이 끊긴 상태입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쪽과 하늘 쪽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 쪽에 머물고 있으면 여러 가지 믿음 끊김의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증상이 바로 미래에 대한 나의 포부와 계획 세우기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삶에는 미래도 없고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주권자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삶은 무미래 무목적 무계획

 

(야고보서 4:11~17)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미래가 없고 목적이 없고 계획이 없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포부가 있고, 그 포부를 갖는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따르고 있다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을 숨김없이 말하자면 지옥을 향해가는 삶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미래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실은 지옥을 향해 몸부림치며 달려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사로잡혀 있다면 믿음이 끊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도 끊겼습니다. 또 지금 아픈 몸 상태를 보면서 몇 년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미래가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이 또한 믿음이 끊긴 것이고 구원이 끊긴 것입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상태입니다. 이런 말이 심하게 보이고 극단적인 것 같아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노후 걱정을 하고 있다면 믿음이 끊긴 것이고 구원이 끊긴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믿음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대로 사는 것을 행하지 않음이 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듣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미래가 침범한 나를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생각과 걱정과 근심의 상태를 묵인하고 막연하게 미래에는 걱정이 없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라면 십자가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노후 걱정으로 인해 미래에 혹시나 재정적 도움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바란다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실제로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선의 내용이란 십자가를 기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과 관계해서 몸이 있는 장소인 세상과 우리 마음이 가야 할 장소인 하늘을 갈라놓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출구 삼아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 쪽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기에 하늘 쪽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야 합니다.

한편 지난 시간에 세상 쪽에 마음이 머물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세상과 벗 됨입니다. 세상과 친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머물고 세상과 친해질 때 우리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세상에 머물게 하고 세상과 친구가 되게 하는 요소가 바로 미래에 대한 관심입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은 현재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한 관심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마음의 뿌리를 세상에 훨씬 더 깊이 박히게 만듭니다.

미래와 과거와 현재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면적 차원의 시간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나뉜 세상 쪽과 하늘 쪽 중에서 하늘 쪽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과거에 사로잡히든지 미래에 사로잡히게 될 경우에는 세상에 깊게 박혀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미래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미래에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 미래에는 건강했으면 좋겠다, 미래에는 배우자가 달라졌으면 좋겠다, 미래에는 자녀들이 형통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미래라는 기간까지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세상에 붙잡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란 엄청난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꽁꽁 묶어두는 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는 예시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윤을 많이 남기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포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야고보 장로는 이에 대해 허탄한 생각이라 말하며 15절에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세상 쪽과 하늘 쪽으로 나뉜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늘 쪽으로 가야 합니다. 하늘 쪽에 머물러 있을 때 나타나는 일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다가 끝내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포부나 목적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오늘도 살게 하셨으니 오늘을 살자’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늘 쪽에 머무는 동안에 세상 쪽에 남아있는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흘러내리듯이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걸 하라고 하시면 이걸 하고, 저걸 하라고 하시면 저걸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마음에 미래가 없는 것은 마음이 십자가를 통과해서 하늘 쪽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 쪽에 있기에 이 세상에서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기에 계획도 있을 수 없고, 계획이 없으니 목적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늘 쪽에 마음이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과 직면하는 자리에 가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는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미래나 계획과 목적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미래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미래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마음이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입고 사는 세상에서의 미래를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세상 안에서의 미래를 생각하며 염려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은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들어가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어도 이 세상에서의 내 미래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 안에 내 미래는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내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에 대해 계획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과제이기에 하나님께 가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는 내 몸이 살아야 될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몸을 살려두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존재합니다.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갈 때 나에게는 세상에 대한 목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 목적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목적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살려두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이론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하였던 바가 이와 같습니다.

‘나는 무미래, 무계획, 무목적이라도 괜찮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내 인생의 미래와 계획과 목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머물고 있으면 된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계획이 몸으로 흘러 들어와서 알려지고 그때그때 할 일만 하면 된다.’라고 알게 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이것을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미래에 대해 걱정은 다양한 이유로 생길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데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은행 잔고를 보니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들은 말씀을 떠올리며 하나님이 내 인생의 미래를 붙잡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시고, 목적이 있으시다는 말씀을 떠올리며 삶에 적용하는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 줄 알았으니 삶에 적용해서 ‘내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십자가를 붙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에 머무르며 미래를 걱정하는 대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에 주력하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바로 이러한 적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이론은 알아도 적용하지 않는 일이 발생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11~12절에서 형제에 대해 비방이나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단순히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는 취지의 말씀이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비방하고 판단하게 되었다면 믿음이 끊겼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야고보 장로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볼 때 말로만 ‘가서 따듯하게 하라, 가서 배부르게 하라’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따듯하고 배부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또한 단순히 형제 사랑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끊겼기에 사람 차별이 나타나고 말로만 이웃 사랑을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믿음이 끊긴 것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끊어졌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형제에 대한 비방과 판단이 곧 율법에 대한 비방과 판단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어서 12절을 보면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비방하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규정입니다. 다만 율법은 단순히 지키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율법이란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내 삶의 주권자이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고 표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형제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형제 또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붙잡고 계신 대상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향하여 비방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형제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며 내가 주권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내 눈에 형제가 악독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살려두고 계신 하나님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형제라고 다를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눈에 악독하고 모자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사람을 살려두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다른 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를 붙잡고 계시기에 그를 비방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비방하고 판단하려는 것이 됩니다. 내가 주권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이 하늘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세상 쪽에 머물고 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우리에게 만남과 삶에 주어지는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권자가 되면 하나님의 주권을 내 기준으로 비방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형제에 대해 비방하고 판단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모자라십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 모양 이 꼴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면 앞으로 하나님의 주권 따위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내가 판단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사물과 상황과 문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고 믿지 않는다면 내가 주권자가 된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주권자가 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미래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생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어떨 때 미래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갑니다. 내 몸과 관련하여 주어지고 있는 환경과 처한 상황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과 상황에 대해 스스로 재판관이 될 때 마음은 미래를 향합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몸이 처한 환경과 상황의 재판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은 모자라다, 지금 상황은 잘못되었다, 지금 상황은 부족하다, 지금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재판을 하게 됩니다. 형제에 대해서 재판관의 마음으로 판단하듯이 내게 주어진 상황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은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고 있는 환경과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러한 환경과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내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가져다준 이 상황은 잘못되었습니다. 부족합니다. 이 상황은 내가 바라는 대로 바뀌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미래를 생각함으로써 지금 상황이 잘못되었고, 부족하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다고 재판할 때 이 상황을 주장하고 계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극도로 비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오류라고 판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지금을 부족함으로 느끼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일입니다.

 

미래를 생각함이 가져오는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부족함으로 느껴서 마음이 미래를 향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만날 타이밍은 영원히 놓쳐버리게 됩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빠져나가는 출구입니다. 세상 쪽에 머물고 있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 수 있는 타이밍은 오직 지금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의 상황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좋거나 나쁠 수도 있고, 돈이 잘 벌리거나 안 벌릴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가 속을 썩일 수도 있고, 배우자와의 관계가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온유함으로 이러한 모든 상황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잘못되었고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마음이 미래로 향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함이란 곧 잘못이 없는 상황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반드시 미래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벗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우선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형편이 좋든 나쁘든 십자가의 온유함으로 수용하고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 할 타이밍은 바로 지금뿐입니다. 지금 세상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주어지고 있는 형편과 상황과 조건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자리에 앉는다면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내 아래에 두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스로 주권자가 된 상태에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타이밍을 영원히 놓쳐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의 미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계획을 세우고, 목적을 갖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나의 죽는 날까지를 계획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미래의 마지막 한순간까지도 염두에 두시고 계획하고 계시고 목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내 인생의 미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 붙잡혀 있는 마음은 십자가를 통해 빠져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10년 뒤에는 경제적으로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 곧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지옥에 담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지옥에 담보 잡힌 사람은 몸이 죽을 때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생각하며 살다 죽으면 반드시 지옥으로 들어갈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각서에 서명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17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선이란 단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살아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로 믿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은 발동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털이나 땀구멍 숫자까지 알고 계시고, 여러분의 세포 하나하나를 다 만드셨습니다. 우리 몸에 수조 개의 세포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의식하지 않는 세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에 아멘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해 걱정합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이 생긴다면 마음이 세상 쪽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 쪽에 머물고 있음을 알았다면 십자가 너머 하늘 쪽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끊어져서 세상의 벗이 되고 있음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얼른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을 믿고 적용함으로써 십자가에서 죽고 아버지께로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의 수조 개의 세포까지 다 만드셨기에 미래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계획하고 목적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말씀드리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괴상한 소리를 한다.’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참 괜찮은 이야기다. 시원한 소리다.’라고 좋다고 받아들여도 삶에 적용하려 하지 않지 않습니다. 말씀을 좋다고 받아들였다면 선을 행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실제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적용함으로써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은 지옥에 마음을 담보 잡히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벗이 된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적용하는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1장 2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1년이 되고 2년이 되었다면 모든 말씀을 다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에 심긴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만이라도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서 생활 속에서 실제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위는 육체의 행위가 아닌 마음의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마음의 행위로 이루고, 하나님의 좋음을 마음으로 믿으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했다면 1~2년만 지나더라도 십자가 복음을 들은 대로 행하면서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듣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들음이 좋음으로 느껴지는 것도 엄청난 은혜이고 기적이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미래, 무계획, 무목적으로 산다는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미쳤다고 할 것이고 광신자라 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받아들여진다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졌다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미래, 무계획, 무목적으로 살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쥐고 계시고, 내 미래에 계획을 갖고 계시고, 내 인생의 목적을 쥐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에 내가 따로 미래와 계획과 목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안다는 것은 실제로 말씀이 받아들여졌음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받아들여졌다면 이제는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미래라는 문제는 마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국가나 단체 혹은 예배당 조직까지도 전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10년 뒤에는 이런 나라가 됩시다, 10년 뒤에는 이런 예배당이 됩시다, 10년 뒤에는 이런 사람이 됩시다, 10년 뒤에는 이런 회사가 됩시다.’라고 합니다. 반대로 불안에 떨 때는 ‘10년 뒤에는 이렇게 망할 수 있다, 10년 뒤에는 이렇게 안 좋아질 수 있다.’라고 미래를 예상합니다.

온 세상은 이처럼 미래를 이야기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현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끊임없이 비방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오류입니다. 당신은 부족합니다. 당신의 주권은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조금만 몸이 아파도 아픈 것을 부족함으로 느낍니다. 범사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십자가의 온유함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나는 아프면 안 된다. 건강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동안 지금 현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이것은 오류입니다! 하나님이 잘못됐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것을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미래를 관심하는 것은 지금 현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며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음이 미래를 향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바보같이 여기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지금 상황보다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하는 기도가 이처럼 무서운 일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24시간 아버지를 욕하며 아버지의 무능함을 비난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주권자 되심과 나를 사랑하심과 십자가의 출구됨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심으로, 오직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늘 쪽에서 내려오는 뜻을 따라서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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