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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로 하는 세상 염려 실제 처리법>의 줄거리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참 많이 좋아하고 외우고 듣는 말씀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 불안 전혀 없는 삶이 과연 실제로 가능할까요? 염려를 맡기라 하지 마시고 조물주의 능력과 주권자의 권세로 우리 아버지가 염려할 상황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될 일이지, 왜 염려거리가 주어지도록 하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본래 염려거리가 아니었던 것일까요? 십자가로 하는 염려 처리법을 알아봅니다.
십자가로 하는 세상 염려 실제 처리법
(베드로전서 5:1~14)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 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염려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동안 끊임없이 접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거나 걱정할 것들이 생길 때마다 염려하게 됩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맡기라’고 한 원문의 뜻을 보면 ‘위탁하라’는 뜻보다 ‘멀리 던져버리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염려거리가 생기면 멀리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편 55편 22절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맡기라’의 히브리어 단어도 산 위에서 돌을 굴려버리듯이 떨어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씀대로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전혀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전서의 서신을 마치며 장로들과 젊은이들과 모든 성도에게 교훈을 주고자 합니다. 장로들과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근본적으로 모든 성도에 대한 교훈과 권면이 잘 받아들여질 때 지켜질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필이면 왜 염려를 맡기라고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 2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또한 이렇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조물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염려할 상황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능력 있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인생의 걸림이 될 만한 염려거리들을 치워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거리를 주십니다.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버지가 허락하셔야 됩니다. 조물주의 능력과 주권자의 권세로 염려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염려거리를 주시고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자면 한편으로는 본래 염려거리가 아닌 것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의 켕김이 생깁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꼭 이 아름다운 시편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 되시고 아버지 되시는 분이 조물주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남는 답은 정말로 우리가 ‘염려거리가 아닌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보자면 ‘하나님께서 염려하라고 주신 일이 아닌데 우리의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괜히 염려하는 것은 아니겠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의 체질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중단시키고 죽이기 위해서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염려는 십자가가 아니면 실제로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는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실제로 염려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말씀을 통해 정말 염려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맡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립산테스(ἐπιρίψαντες)는 ‘던져버리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염려하기 때문에 염려거리를 마음에서 멀리 떨어뜨린다는 점에 강조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맡기다’라는 말을 위탁의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라는 부분을 ‘주님이 계시기에 너희 염려를 멀리 던져버리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 또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염려가 그에게 있다’라는 뜻입니다. 앞선 말씀과 합쳐서 생각해 보자면 ‘주님이 계시기에 너희 염려를 멀리 던져버리라 주님이 염려하신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의 염려는 주님의 일입니다. 염려는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고 주권자이신 아버지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재정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염려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중첩된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염려하고 관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염려가 현실이 되는 길을 막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조물주이시기에 염려하시는 일을 반드시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붙잡고 염려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염려대로 일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염려는 반드시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함으로써 해결을 위한 하나님의 염려는 막혀버리게 됩니다.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은 ‘염려가 그에게 있다’라는 뜻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염려를 던져버릴 수 있을까요? 던져버린다는 것은 내 마음과 염려의 거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내가 염려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은 이미 가까이 와 있습니다. 건강 문제 때문에 염려합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염려합니다. 노후 문제 때문에 염려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문제들에 이미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조물주이신 주권자 하나님의 손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때 내 마음이 문제를 붙잡으면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을 방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과 문젯거리 사이에 내 마음이 끼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뜻대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을 차단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 문제 때문에 염려합니다. 이 상황에서 이미 하나님의 주권의 손은 자녀에게 와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상태에서 자녀의 문제를 멀리 던져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손이 이미 와 계시는데 굳이 내가 자녀의 문제를 따로 던져버려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짜 문제는 내 마음과 문제 사이의 거리입니다. 던져버림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와 내 마음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문제를 붙잡고 있는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문제와 내 마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는 말씀은 염려를 던져버리라는 뜻입니다. 염려거리에는 하나님의 주권의 손이 이미 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주권의 손과 문젯거리 사이에 끼어있는 내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문젯거리로부터 멀리 거리를 넓히면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등한시하고 외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진 상황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상황에서 나와 자녀의 관계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에 대한 다른 관심 때문에 자녀 문제를 외면하고 등한시한다면 아버지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도 인정하고 내 마음과 자녀라는 문젯거리와의 거리를 넓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내 마음에 염려가 생기고 불안하게 만드는 문젯거리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은 문제를 던져서 마음과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다만 그 문제에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 손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내가 던져버리고 멀리 떨어뜨리려 따로 노력할 필요 없이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문제에 대해 죽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좌 우편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문젯거리로부터 거리가 넓혀집니다. 그리고 문제는 본래 그 문제에 대해 염려하시는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께 넘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문젯거리나 염려거리를 하나님께 맡기고 싶으시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맡긴다고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으신 예수님께 내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자동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염려거리, 문젯거리, 골칫거리의 문제들은 이미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의 주권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문제를 맡긴다는 말은 여러 가지 단어를 통하여 응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위탁한다든지 내려놓는다는 말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자면 내가 위탁할 수도 없고 맡길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여전히 주체가 된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내려놓음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위탁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주인인 상태입니다. 그 문제가 잘 해결되기 위해서 나보다 능력이 있는 전문가에게 그 문제를 위임하겠다는 태도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주체가 여전히 나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자녀 문제, 재정 문제, 노후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이는 곧 내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닌 것을 맡기고, 위탁하고, 내려놓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손은 이미 문제들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나는 문제를 내 것처럼 여겨서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문제는 내 것이 아닙니다. 재정 문제는 내 것이 아닙니다. 건강 문제도 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이 만들지 않았으며,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이 만들지 않았으며,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내 것이라 생각한다면 도둑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맡기고, 위탁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다 계획된 일들을 도둑질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만 없어지면 됩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시급한 문제는 전쟁이 아닌 여러분의 마음이 아직도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직장 때문에, 재정 때문에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능력과 그 지혜와 그 사랑으로 이끌어 가실 일들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위탁하고, 맡기고, 내려놓고자 한다면 여전히 주인이 된 상태입니다. 잘되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일이라지만 실은 잘되든 못되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염려거리가 아니라 세상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염려거리가 아닙니다. 바닷속에 바닷물이 닿지 않는 부분은 혹시 있을지라도, 이 세상에 아버지의 주권이 임하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공기가 미치지 않는 곳이 혹시 있을지라도, 아버지의 주권이 닿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아버지이시고, 조물주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정말로 믿는다면 이 세상에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 마음으로 건드리고 붙잡을 상황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에게 여러분의 마음이 붙어있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설령 여러분이 죽을지라도 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뭘 못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살아있는 한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든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죽는 순간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때를 정해놓으셨습니다. 그 순간까지는 밥 못 먹어서 죽을 일은 없고, 옷 안 입어서 죽을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죽음의 순간까지 어떻게 하든지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걱정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이 세상에 내 마음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한편 8절을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마귀에게 삼켜질 자는 마음이 이 세상 문제를 걱정거리로 붙잡고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삼켜질 때 마귀에게 삼켜지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대적하는 방법은 내 마음이 세상에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을 보면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라고 고난이 언급됩니다. 어려운 점이 있을 때 그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라 마음이 세상에 먹힌다면 마귀에게 먹힌 것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귀에게 삼켜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걱정하고자 하면 모든 일을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붙잡고 걱정하게 되었다면 마귀에게 삼켜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반드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직면할 마음이 땅에서 뒹굴고 돌아다닐 때 아버지의 주권으로부터 온갖 것을 빼앗고 도둑질하게 됩니다. 내가 붙잡고 걱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마귀에게 삼켜진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것처럼 마귀 뱃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세상 걱정이나 염려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걱정과 염려를 가지고 새벽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를 2시간 한다고 치면 2시간 내내 그 염려거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염려거리를 바라보는 동안에 염려는 내 마음을 삼켰습니다. 마음이 염려거리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이미 마귀 뱃속에 들어간 상태이기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염려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염려거리는 마귀의 아가리입니다. 염려할 때 내 마음을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
돈 걱정이 생겼다면 그것이 마귀의 아가리입니다. 자녀 걱정이 생겼다면 그것이 마귀의 아가리입니다. 우리가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보이는 세상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음으로써 염려거리를 땅에 놔두고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내 마음을 염려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마귀의 아가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라는 말은 이미 이루어진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 승천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염려를 실제로 제거하는 방법은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해서 내 마음을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내 생애에 이 염려거리만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염려거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일류호텔에서 라면을 주문하면 3만 원에서 5만 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라면은 몇백 원이지만 거기에 바닷가재가 들어가니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염려거리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쓰면 쓸수록 커집니다. 라면 같은 염려거리에 바닷가재 같은 마음을 투입하니 염려가 굉장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마음입니다. 지구 전체를 팔아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내 마음보다 비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구 전체보다 더 비싼 마음을 티끌만 한 문제들에 쏟아부으며 살아갑니다. 그 문제와 염려가 굉장히 크게 보여서 내 인생을 망가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마음을 투입한다는 것은 문제를 하나님으로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자녀 문제로 염려하고 있다면 자녀를 신격화하고 자녀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재정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몇백 원 하는 라면에 5만 원씩 하는 바닷가재를 넣어 먹는 셈입니다. 내 마음은 그런 일에 투입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조물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한 용도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귀한 마음을 이 세상의 찌꺼기 같은 일들에 쓰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염려하심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근본적으로 나에게는 이 세상의 일들을 맡길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길 가는 사람의 돈을 빼앗아서 은행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자녀, 내 몸, 내 건강, 내 생애라고 해서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훔쳐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 관할할 수 있는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의 ‘맡기라’는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는 ‘왜 주인 앞에서 주인이 염려해야 할 문제를 네가 염려하느냐? 스스로 주인인 척하는 주제넘은 짓을 하지 말라.’라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맡긴다, 위탁한다, 내려놓는다’라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습니다. 손대서는 안 되는 일에 손대었으니 손을 떼야 합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내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간에서 언급되는 기후 문제, 전쟁 문제, 제도 문제, 정치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물고 있어서 마귀의 아가리 속에 들어간 채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시급하고 큰 문제는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문제를 염려함으로써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마음을 집어넣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힘들어 보이고 별 볼 일 없는 삶을 사는 것 같더라도 문젯거리나 염려거리는 없습니다. 이 비결을 알았던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세상에 남아 방황하고 굴러다니고 있는 마음을 제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을 세상에서 제거하면 이 세상에서 문제처럼 보이고, 세상 사람들 눈에 문제처럼 여겨지는 일은 있어도, 실제 우리 마음에 문제가 되고 염려를 가져다주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이 세상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며 해결하실 것입니다. 내 문제를 하나님이 염려하시게 하고 하나님이 그 염려를 해결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우리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맡길 자격조차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생각대로, 당신의 염려를 따라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끼어든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고, 내 마음은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게 될 뿐입니다. 이런 참담한 일은 우리 생애에서 더 이상 단 하루도 재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기준에 찌든 저주 속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우리의 생애는 아무것도 아니고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염려가 없으며 걱정거리도 하나 없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 간절한 말씀을 받아들여서 정말 염려 없고, 걱정 없는 에덴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