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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로 세상 앎 끄고 천국 앎 켜면?>의 줄거리 :
베드로후서에서는 '안다' '앎' '지식'이라는 단어들이 유난히 많이 반복됩니다. 베드로전서가 외부적인 박해로 인한 고난 앞에서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였다면, 베드로후서는 교회의 내부적인 환난에 대처함을 돕기 위한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내부적인 환난으로는 배교와 거짓 교사의 준동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 대처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더 참된 앎과 지식이 절실하였던 것이지요.
십자가로 세상 앎 끄고 천국 앎 켜면?
(베드로후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세상 앎을 끄고 천국 앎을 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세상 앎을 끄는 길은 십자가뿐입니다.
2~3절은 베드로후서의 서두에 속합니다. 서신을 쓸 때 다분히 의례적으로 나오는 인사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바요나 시몬입니다.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 시몬의 이름을 바위라는 뜻의 베드로로 바꿔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시몬 베드로라 지칭한 것은 ‘시몬이었던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중에 베드로로 바뀌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정말 독특했으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계셨던 동안에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을지라도 자신과 똑같이 보배로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나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가 없는 당신들 또한 믿음에 있어서는 똑같이 보배로우며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인 조건이 편지를 보는 이들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이어갑니다. 이로부터 2~3절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앎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앎이라는 단어가 베드로후서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헬라어에서 앎 혹은 지식을 언급할 때는 그노시스(γνωσις)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노시스는 지식(knowledge)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는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로써 ‘~위에’를 뜻하는 전치사 에피(ἐπί)가 붙어있는 형태입니다. 주석가들은 에피그노시스를 확실한 지식, 온전한 지식(on knowledge)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 이유에서 앎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며 에피그노시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요?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외부적 박해로 인한 고난 앞에서 믿음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그네, 산 소망 같은 표현을 통해서 고난이 다가오는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둘 본향이 아님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한편 베드로후서는 외부적 박해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내부적 환난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핍박이 가해질 때 그 안에서 거짓 교사들이 준동하며 교인들을 현혹하며 배교의 분위기를 가속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지식과 가르침에 맞설 것을 요청하며 확실한 지식, 온전한 지식으로써의 에피그노시스를 강조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의례적으로 사용되는 편지의 서두입니다. 이것이 세 장뿐인 베드로후서에 담겨있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 생각을 따라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베드로의 생각의 길을 밟아갈 수 있습니다. 배교와 거짓 교사의 위험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위험 앞에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1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베드로나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란 쉽게 말해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정말 내 마음에 든다.’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 중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마음에 들어 하시고 사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 자리에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몸의 태생과는 상관없습니다. 이방 지역에서 태어나 사도 베드로처럼 몸으로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더라도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습니다. 한국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시는 중에 나를 함께 받아들이시게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나의 마음을 하나님 우편 자리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사도 베드로의 생각을 주관하는 바탕이 됩니다. 이 바탕 위에서 사도 베드로의 생각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바탕으로 보배로운 믿음은 성립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주어지는 일이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 보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를 앎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이 앞서 말씀드렸던 온전한 지식(on knowledge)으로써의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서두에서 베드로는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는 본인의 경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례적 인사말이기 때문에 쉽게 넘겨버릴 수도 있습니다만 말씀드린 대로 세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서신에서 베드로 사도의 생각을 확실하게 붙잡기 위한 좋은 소재가 됩니다. 마치 농구에서 맨투맨으로 수비를 하듯이 그냥 지나가는 말씀 없이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굳이 에피그노시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지식이라는 해석보다는 영어 ‘on knowledge’를 그대로 해석해 보면 좀 더 와닿습니다. on이 켬이고 off가 끔이라면 에피그노시스는 켜놓는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이고, 미국의 대통령이 조 바이든 대통령임을 지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을 가정에서 집안일을 하고 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 의식 속에서 켜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과 의식에 켜놓고 있는 지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기억되고 있는 많은 지식은 굳이 말하면 off knowledge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 내 몸이 처해있는 생활 현장에서 필요한 일들에 관련된 지식들은 필요에 따라 기억에서 꺼내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이러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앎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지식이 아니라 의식에 항상 켜져 있는 on knowledge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대학입시 공부를 하는 자녀들은 의식 속에 항상 켜있는 대상입니다. 자녀 또한 앎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앎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모의 의식에서 자녀가 늘 켜있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의식 속에서 배우자의 존재가 늘 켜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우리 속에는 수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지식을 언제나 기억하고 의식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던 동창을 길에서 만나면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평소에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깜짝 놀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다닐 때는 주일에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의식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라고 했던 셈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던 시기는 예배당이라고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에피그노시스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과 예수님에 대한 앎을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지식은 가정에 있든지 시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직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든지 항상 의식되어야 합니다. 이 지식을 켜놓은 상태에서 무슨 일이든 하고 생활 현장을 마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꺼진다면 거짓 교훈에 빠져들고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서신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비롯한 신약의 모든 서신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서신을 쓴 것은 전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믿는 사람들이 구원에서 떨어질 것을 염려하며 기록한 것입니다.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켜놓는 지식(on knowledge)으로써의 에피그노시스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잘한 것입니다. 다만 그 믿음의 지식은 삶에서 항상 의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생활 현장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상대하며 사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들이 의식에 켜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켜져 있으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지식이 꺼져 있다면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에서 살 때 믿음을 잃게 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또한 돈의 좋음과 위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을 받아들였으면 이제 돈에 대한 지식을 의식에서 끌 수 있어야 합니다. 매사에 돈, 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의식에 켜놓고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on knowledge로써의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된 이후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가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지식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언제 켜지는지를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너희의 의식에 켜져 있다면 하늘에서 느낄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이 계속하여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평강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 때문에 갖게 된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 은혜와 평강이 계속해서 내려옵니다. 사업이 바쁘다고, 직장 일이 급하다고, 가정에서 배우자가 자극하고 자녀들이 문제라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꺼버리면 하늘에서 은혜와 평강이 내려오다가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신기한 능력’이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생명이란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으로써,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함께 할 자격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경건이라는 단어 자체를 직역하면 좋게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좋게 예배함이란 하나님을 지금 내 앞에 살아계신 분으로 마주 대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좋게 예배함이 있다면 나쁘게 예배함도 있을까요? 있습니다. 에피그노시스의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쁘게 예배함이 나타납니다. 엄마라고 해서 자녀를 의식에 켜놓아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의식에 켜놓고 시장을 보고 살림을 한다면 자녀를 예배하는 나쁜 예배입니다. 마찬가지로 배우자와 이야기하는데 주제가 오직 돈입니다. 돈에 대한 지식이 켜있는 상태이고 돈을 예배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나쁜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 당시에 예배당은 없었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이 좋게 예배한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이 있었기에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삶의 현장뿐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삶의 현장에서 좋게 예배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좋게 예배함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내 마음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지식을 늘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서 직면하게 되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주권자이십니다. 또한 나 개인에게는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며 유일한 채움을 위한 좋음의 대상이시고 주권자이심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실들은 늘 의식되어야 합니다. 회사에 있을 때든 시장에 있을 때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은 나의 우선적인 존재감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사장님 앞에서든 대통령 앞에서든 배우자 앞에서든 누구 앞에서라도 하나님이 유일한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라는 앎을 켜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이것을 켜놓으면 유일한 존재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4절을 보면 은혜와 평강에 이어서 주어지는 내용이 언급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함이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지식을 켜놓을 때 신의 성품에 참여함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의식에 켜놓으면 어떤 생활 현장에 있더라도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 유일한 주체이십니다. 이러한 지식을 켜놓으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살아 움직이시는 성령께서 나를 장갑 삼아 움직이심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배교와 거짓 교사의 위험에 처한 교인들을 바라보며 이들의 바탕에 깔려있어야 할 영적 상황을 가르쳐줍니다. 믿음은 결과적으로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주체성으로서 나를 장갑 삼으신다고 믿는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내용인 지식을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지식을 켜놓을 수 있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실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사실에 대한 지식, 성령님의 사실에 대한 지식, 천국의 사실에 대한 지식을 우리는 의식의 차원에서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on knowledge로써의 에피그노시스입니다. 그럴 때 실제로 하늘에서 평강과 은혜는 계속해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 평강과 은혜가 우리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확연히 다르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보실 때 믿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없다면 이상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라는데 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우리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믿음을 통해 갖게 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한 지식을 의식에 켜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한민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이고, 미국의 대통령이 조 바이든 대통령이라는 지식을 갖고 있지만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켜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라는 사실을 의식에서 꺼놓은 채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취급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심지어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취급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 어마어마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꺼져있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설령 사소한 일이라도 적어도 일정 기간은 그 사건에 마음이 매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가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내가 연합해야 한다는 이 중요한 지식이 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구가 두 쪽이 난다고 해도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사실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쉬운 일을 하지 않기에 이로부터 나타나는 어마어마한 영적 차이와 실질적 차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의 서두를 통해 바로 이러한 내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아버지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지식들을 의식 속에 켜놓고 살고 있느냐? 무엇 때문에 배교가 일어나고, 무엇 때문에 거짓 교사들의 준동에 휘말리고 있느냐? 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유발시킬 수 있고,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너무나도 간단한 사실을 의식에서 켜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한 지식을 켜놓는 일 한 가지를 하지 않아서 구원에서부터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앎으로’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베드로후서는 세 장뿐입니다. 이 세 장 속에서 앎과 관련된 표현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단순한 지식으로써의 그노시스가 아닌 의식에서 켜진 지식으로써의 에피그노시스가 되어야 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알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은 의식에 켜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내 마음이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이 세상의 주체성 되심, 성령님은 하나님의 주체성이 외출 나오신 분으로 나를 장갑 삼으십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내 의식 속에 켜놓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만 켜놓을 수 있으면 하늘에서 오는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어떤 은혜와 평강이 임하며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해 가는지를 스스로 관찰하며,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쭙잖은 제 안에도 말할 수 없이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만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지식만을 항상 켜놓을 수 있도록 우리를 권고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