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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가 천막 되는 일상적 변화산 체험>의 줄거리 :
사도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공생애 때 육체에 가려졌던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런 예수님과 연합하는 길을 몰랐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이 만들어진 이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이 존귀와 영광의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갑니다. 그러면 육체는 천막이 됩니다. 우리는 천막을 칠 때 이미 헐고 떠날 것을 생각합니다. 육체는 항상 떠날 생각을 하며 잠시 거하는 천막입니다.
육체가 천막 되는 일상적 변화산 체험
(베드로후서 1:12~21)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우리는 일상적으로 변화산 체험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산 체험을 할 때마다 우리의 육체를 천막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장막’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2~15절에서는 교인들이 ‘너희’로 언급됩니다. 이미 진리 안에 서 있는 교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항상 생각나게 하고 싶다는 것이 베드로의 요청입니다. 여기서 진리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떠올리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토대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이 곧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 안에 서 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영적인 사실들로 이루어진 환경 안에 들어가 있음을 가리킵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의식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예수님을 토대로 한 삼위일체 하나님, 천국에 대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늘 켜놓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진리 바깥으로 튕겨 나가고 맙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면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죽을 때까지 교인들을 일깨우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독특하게도 죽음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기간을 ‘장막에 있을 동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닌, 믿음 안에서 진리 안에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믿음 안에서 진리에 서 있는 자들이 진리 바깥으로 튕겨 나가지 않으려면 진리를 늘 기억하고 의식에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될 때 ‘너희도 육체를 천막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막을 치는 사람은 허물 것을 생각하며 칩니다. 천막이 세워지는 주변 환경을 떠날 것을 생각하며 천막을 치는 것입니다. 진리를 늘 기억함이 이와 같습니다. 진리 안에 머묾이 유지될 때 육체를 천막으로 여기게 됩니다. 육체는 그야말로 생고기를 재료로 만든 천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식에 진리를 켜놓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육체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교인들이 이 점을 잊지 않도록 일깨울 것임을 강조합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켜져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천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 천국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16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맛보기 식으로 체험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서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가려져 있는 천국의 실상을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통하여 맛보았습니다. 17절을 보면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육체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고 있던 천국에서의 실상이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귀함은 이 세상의 어느 임금이나 왕의 아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나라는 지구 위에 있는데, 이 지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무한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부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존귀함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존귀하신 예수님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영광’이라는 표현을 통해 언급합니다. 그 존귀하신 분이 당신 자신을 내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존귀한 예수님과 연합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내 안에 비치게 됩니다. 그럴 때 베드로의 변화산 체험처럼 내 마음에서는 이 세상이 깡그리 없어지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이란 마주 대하기만 해도 우리 마음에서 이 세상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것이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므로 비록 육체 때문에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고 미련을 떨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을 대할 때에는 이 세상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한 세상 것들에 마음을 두고 육체를 붙들고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인 줄로 알고 살아서는 안 된다. 비록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가 계신 천국으로 마음이 따라가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은 지금 가려져 있습니다. 다만 그 존귀와 영광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가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의 마음은 엉뚱하게 세상에 남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려져 있지만 그 영광과 존귀를 대하기만 하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세상을 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육체를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떠나야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육체를 장막 즉 천막이라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육체를 입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때 눈에 보이는 일들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일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 관계와 일들이 마치 영원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됨을 가르쳐줍니다.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도 몸은 떠나야 하는 천막일 뿐입니다. 생고기 재료로 만든 천막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의식에 천국을 켜놓고, 진리를 켜놓는 것과 맞물려야만 합니다. 육체를 곧 떠나야 하는 장소로 여기지 못한다면 천국을 의식에서 켜놓는 일도 못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진리란 천국에 대한 증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 증언을 받아서 마음에 켜놓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 육체를 떠나야 할 장막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또 내가 육체를 떠나야 한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진리를 의식에 켜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이 떠나야 할 명분이 제공되는 곳이 어디냐?’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는 존귀와 영광을 가리고 계셨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 때 가려졌던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이 나타나게 되었다. 나는 그 사건을 직접 경험했다. 그때 나에게서 이 세상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나는 그 사건 이후에도 깨닫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장관자리나 얻으려고 꿈꾸었다. 그 이유는 존귀와 영광의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산 사건은 천국의 기운이 통과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잠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때와는 다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하늘로 가는 길을 내셨으니 우리는 그 존귀와 영광의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마음이 이 세상에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마음이 떠나야 함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변화산 사건이 가르쳐주는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은 가려져 있었기에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낄 수 없이 가려져 있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그 존귀와 영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세상은 맥을 출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마음을 끌어당길 만한 좋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려진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이 나타날 때는 이 세상의 좋음이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신경 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이라는 증언입니다. 의식에 이 증언을 늘 켜놓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변화산 체험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연결입니다. 16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이유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변화산 체험을 연결한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앞으로 살펴볼 3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 3차원의 모든 물질이 없어질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로 변화산 체험 때 사도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녹아 없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재림 때 없어질 이 세상이 변화산 사건을 통해 미리 마음에서 없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변화산 사건과 재림을 연결하며 마음이 없어질 세상에 붙어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육체는 장막입니다. 그야말로 생고기를 재료로 만들어진 천막일 뿐입니다. 천막은 세울 때부터 허물기를 생각하며, 세울 장소를 떠나기를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하늘을 향하는 증언들의 진리를 의식에서 항상 켜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하는 힘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를 떠나야 하는 천막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를 대할 때, 배우자를 대할 때, 직장에서 동료들을 대할 때,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생각은 ‘육체는 떠나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할 때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치솟는 추진력이 생겨나고 강화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세상을 떠나도 되는 이유는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존귀와 영광을 느낄 수 있다면 세상의 좋음은 기억조차 없는 것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의미는 장막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육체를 장막으로 여겨서 떠날 곳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치솟는 일을 반복하기 위한 곳이 세상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변화산 체험을 통해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질 정도로 하늘의 좋음, 예수님의 좋음, 하나님의 좋음을 경험했습니다. 존귀와 영광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기운을 받으신 예수님이 일등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운을 받으신 예수님이 최고로 좋으심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하여 세상에 존재합니다.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마음에서 세상을 없애는 상황을 만들 수 없기에 이것은 지금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유효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변화산 체험이 성경을 통해서도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아직 신약성경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들에게 성경이란 오직 구약성경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더 확실한 예언’이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을 만났던 베드로의 변화산 체험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하나님 나라로 가는 입구인 십자가에 대해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묻혀있던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토대로 얻게 되는 천국이 해가 떠서 밝은 대낮이 되는 것처럼 환해지기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잘 살 수 있는가? 이 땅에서 진행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기대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이 세상일 때문에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진 마음에서 천국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이 올라가 계신 천국이 내 마음에 해가 떠서 대낮처럼 밝게 빛나기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모하셨을 때 예수님의 육체에 가려져 있던 존귀와 영광이 환한 빛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 천국의 찬란한 영광이 내 마음속에서 환하게 빛날 것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이 세상에서 쨍하고 해 뜰 날이 오기를 기대하거나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 어지럽혀진 마음에서 어둠 속에 덮여있던 천국과 삼위일체 하나님이 환하게 드러나기만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오늘의 번제 말씀을 나누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 듣기 전까지 이 세상으로 어지럽혀졌던 우리의 마음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 세상 일만 대낮처럼 환히 비추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천국이 대낮으로 바뀌고 세상이 어둠이 되는 대역전을 위하여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이어서 20~21절을 보면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경 모든 말씀을 ‘예언’이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모든 말씀이 결국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예언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태어나시기 전에 기록되었으며, 육체를 입고 태어나신 예수님을 향해 쓰인 말씀이기에 예언입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을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캘빈은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봐야만 밝히 의미가 드러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저 또한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그 말대로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어떻게 받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신학자들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성령을 어떻게 받느냐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고 그렇기에 성경의 해석이 난립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모든 교인들은 성령 한 분의 묶음 속에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한 것은 이러한 성령의 묶음 바깥에서 성경을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받는 것이며 성령을 받으면 어떤 증거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방향을 거꾸로 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늘 의식에서 붙박이로 켜져 있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육체를 떠나야만 하는 장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령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내려오시는 길은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성령님이 강물처럼 내 안에 쏟아져 들어오실 수 있는 수도꼭지와 같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십자가가 없다면 절대로 성령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들어오신 증거는 믿음으로 인정한 예수님의 존귀와 영광,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 천국의 현실이 이 세상에 보이고 들리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현실로 느껴짐으로 나타납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내 가족들보다 더 우선적인 현실로 느껴지는 마음이어야 성경을 읽어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기대 자체가 달라집니다. 천국이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훨씬 더 밝아지고, 이 세상이 완전히 어둠에 덮이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성경은 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건강 문제, 돈 문제, 가족 문제, 여러 가지 세상 문제들을 가득 안고 그 문제들에 대한 답을 기대하며 성경을 읽습니다. 지금 내 상황이 더 나아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염원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이로부터 온갖 이단 사이비 같은 성경의 해석들이 나타납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일에 강단에서 쏟아지는 모든 언어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에서 천국이 대낮이 되고 세상은 어둠에 묻히는 상태가 될 때만 바른 설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 현장 자체도 어둠에 묻혀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성령 바깥에서 푼다는 것이고 마귀의 영을 따라 성경을 조명하여 이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을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과 천국을 향해 켜져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천국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현실로 느껴지기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의식에 켜놓은 천국이 실제로 삶의 현장에 나갔을 때도 세상에 눌리거나 묻히지 않고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만 성경의 참 의미는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내 마음에 세상 문제가 많다면 먼저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득 차기를 기대할 수 없다면 성경은 올바르게 해석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오직 예수님이 샛별처럼 찬란하게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샛별이 이끌어 동이 트고 대낮이 찾아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이 찬란하게 빛나는 상황을 바라고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성령이 임하시고 성경은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성경은 내 마음에서 세상을 지워버리는 변화산의 체험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말씀을 나누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변화산의 체험을 여러분의 일상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세상은 오간 데 없고, 주님 따라 올라간 하늘만이 대낮처럼 찬란히 비추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걱정과 염려가 태산 같았던 세상은 어둠 속에 묻히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해석한 대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 동안에 사도 베드로의 변화산의 체험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 사도가 맛만 보았던 변화산 체험을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진짜 체험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날마다 변화산의 체험을 나의 것으로 삼는 일상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중에 최고의 일이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