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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2

녹취문: 단어 '재림'이 괜히 불편한 이유_태승철 (벧후 3:1~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0.23|조회수10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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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단어 '재림'이 괜히 불편한 이유>의 줄거리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처럼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내게도 있다면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재림'이라는 단어는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괜히 불편한 진실처럼 여겨집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제 있을지 모를 재림이 여전히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이 전혀 그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어 '재림'이 괜히 불편한 이유

 

(베드로후서 3:1~13)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재림’이라는 단어는 늘 들어도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재림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꾸 재림을 이야기하고 재림 때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종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렇게 ‘재림’이라는 단어가 괜히 불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은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과 거짓 교훈에 맞서서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거짓 선생들과 거짓 교훈은 3~4절에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조롱하고 놀린다는 것입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68년에 순교하는데 그로부터 약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역시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말이 2,000년이지 20년도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우리는 200년이라는 세월조차도 실제 생활 속에서 실감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습니다. 그렇기에 2,000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재림에 대해 본문의 거짓 선생들처럼 조롱하는 것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림이 아직 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유일한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재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도 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 자체를 보면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재림을 붙잡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재림은 흔히 ‘언제 일어날 것이냐’라는 관점에서 해석됩니다. 거짓 선생들의 말이 그렇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류입니다. 재림이 언제 일어날 것이냐의 시간적 측면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격적 측면에서 재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 사건이 오늘도 가정과 직장에서 살아갈 때 실제로 살아있는 믿음의 내용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인격적으로 천국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재림에 대한 실제로 살아있는 믿음의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재림 신앙의 핵심은 ‘지금’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우리에게 재림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고 마음에 와닿지 않고 실제 생활과 무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이 시각에도 천국 보좌 우편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는 십자가 생활화를 해도 재림은 와닿지 않더라.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난다. 그런데도 예수님에 대한 별도의 그리움이 성립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영인 공백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하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중에도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란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보여주었듯이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아버지를 모시며 사는 날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따라 보좌 우편에 머물러서 천국을 의식에 켜놓고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천국에서의 상황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그리움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늘 의식 속에 천국이 켜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도 재림의 의미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면 천국이 켜진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식 속에 천국이 켜있지 않다면 재림은 의식에서 꺼지게 됩니다. 천국이 켜있다면 내가 그 천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를 모시며 희락 가운데 영원히 살게 될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재림처럼 간절히 기다려지고 그리운 일은 세상에 다시없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애타게 부르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공항에서 애인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모습을 볼 때 그리움을 느끼는 것처럼, 사도들은 구름 타고 천국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에 대해 ‘지금’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립기에 언제 오실지 모르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가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대한민국과 전 세계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이 사실이듯이, 예수님은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심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그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까?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까? 그러한 그리움이 있는데도 재림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계신 예수님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면 반드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 것이냐에 대한 시간문제가 아닙니다.

 

이 재림과 관련하여 세 가지 종류의 이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 재림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3~4절을 보면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물도 땅도 하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들입니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지되고 있을 뿐 재림 때 다 불타버릴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을 영원한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땅은 견고하고 영구하다고 신뢰합니다.

이처럼 나도 모르게 땅이 영구하고 견고하다고 신뢰하는 증거는 마음을 세상에 붙이는 것입니다. ‘나는 땅이 영원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나는 땅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하더라도 이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영원을 속성으로 하는 마음을 세상에 붙이고 있다면 실은 이 세상이 영원하다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온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집사든 장로든 이 세상은 다 없어질 것이라고 고백할지라도 마음을 사업에 붙였다면 거짓말입니다.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사업에 붙였다는 것은 속마음으로는 이 세상이 영원하고 견고하다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에게는 자녀가 마음을 붙일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속마음으로는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자녀가 영원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벗겨지고 나면 영혼 대 영혼으로는 부모도 아니고 자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육체가 없으니 부모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자녀에게 붙이게 되었다면 재림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이단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재림을 인정하되 그 시점을 특정하려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재림에 대해서 ‘언제쯤’이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진정한 믿음에 도달할 수 없는 이단입니다. 재림의 의미를 특정한 시기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단입니다. 재림이란 십자가 복음 신앙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림에 대해서만 독단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중에 논리적으로 재림에 대한 태도도 결정됩니다. 그런데 재림의 특정한 시기를 정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단입니다.

 

세 번째 이단은 재림을 교리적으로 잘 알고 인정하지만, 재림의 의미를 실생활에 반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시간을 정할 수 없음에 대해서도 알고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음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재림이 있다고 말만 하지 실제로 재림 사건에 담긴 의미를 전혀 실생활 속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천국에 살아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는 것은 그리움의 작용이 세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려내기가 힘든 가장 무서운 이단의 유형입니다. 이러한 유형이 복음에 입각해 세워진 교회를 뿌리부터 잠식해 버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10절을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다른 신약성경 사본을 보면 ‘모든 일이 불타버릴 것이다’ 혹은 ‘없어질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 봅니다.

이어지는 11~12절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였고 또 13절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때가 되면 이렇게 불타버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동안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라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재림이 있다고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불타버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것들에 대해 그리움과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마음은 영원함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세상은 때가 되면 다 불타버릴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이렇게 일시적인 세상에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쏟아부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림 때 없어질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의 돈은 없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도 없어질 것입니다. 몸이 없으니 여러분의 가족관계도 없어질 것이고, 몸이 없어졌을 때 드러나는 하나님과의 영의 관계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몸이 있을 때 가족을 포함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냈느냐를 가지고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관심을 두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쏟아부을 마음은 없습니다. 불과 몇 년 같이 살았다고 자녀 노래를 부르면서 영원한 속성을 가진 마음을 자녀에게 쏟아부을 것입니까? 심판대 앞에서 결국 없어질 자녀 관계에 휩쓸려 지옥으로 들어가기를 무릅써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타버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영원한 속성의 예수님과 하나님을 소망하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없어질 세상 것들에 써서는 안 됩니다.

다시 10절을 보면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란 사람들이 살면서 대단하고 좋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로마에 바티칸 성당이 있고 수많은 웅장한 건물들이 있습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둘러보면 나라와 민족들이 살아온 흔적으로 유적들이 있습니다. 영국 국립박물관의 소장품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들, 워싱턴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의 소장품들, 바티칸 성당 지하실에 있는 유물들, 유네스코가 정하는 세계 유산들과 같은 것들이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에 포함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의 기준에서는 대단히 가치 있는 것들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영원한 속성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하게 여겨지더라도 예수님의 재림 때 불타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에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두었다면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영원히 살도록 기회를 제공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박물관의 소장품이나 로마의 유적 따위를 가치 있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수십억, 수백억을 들여서 이 땅에 예배당 따위를 짓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는 없습니다. 그 예배당에 붙은 마음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실생활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불타버릴 것들에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실제 생활 속에서 지옥으로 들어갈 사람으로 보장받는 도장을 찍는 과정입니다.

물론 바티칸 성당을 짓느라고 들어간 마음, 수십억 수백억을 들여서 예배당을 짓느라고 들어간 마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이 재림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짓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거짓 선생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세상에 쏟아붓는 자들은 거짓 선생들보다도 더욱 예수님을 모멸하는 자들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인정하면서도 재림이 갖는 의미가 실생활에서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회할 때 무슨 행사와 프로그램을 그렇게 많이 돌리며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적인 에너지를 쏟게 했는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13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행사에 목을 매는 이유는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구역장이든 교인이든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상황을 뼈에 사무치게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많은 행사와 프로그램들은 돌려가며 교인들의 마음을 쏟아붓게 합니다.

 

2,000년 동안 일어나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르는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실생활과 관계없어 보입니다. 재림은 2,000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재림에 대한 기대는 지금 내 속에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그리워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재림이 언제 일어날 것이냐를 관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예수님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삶을 얼마나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지표가 재림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입니다. 2,000년 동안 일어나지 않은 재림이 교인들의 신앙의 진위를 판가름해 주는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는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이 활성화되기를 간절히 종용하고 권고하였습니다.

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싶다는 소망과 그리움이 없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영구하고 견고하게 느껴집니다. 이 세상을 신뢰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의식 속에 켜있지 않다면 반드시 무의식중에 이 땅이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견고하고 영구하다는 신뢰를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믿음은 끝난 것입니다.

재림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재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수도 없을 것이며, 영원한 나라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기회조차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정 가운데 선택하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태어나서 그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회복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존시키고 계십니다. 예정 가운데 있는 마지막 사람이 그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들여보내서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순간 재림은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사람이 누구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만은 알 수 있습니다.

약속이 더딘 것이 아닙니다. 본래 재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의도 속에는 분명한 섭리적 취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인간이 예수님 안에 들어와 구원이 확실시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유지해 나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재림이 언제 임할지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립고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하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의식에 켜놓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재림은 내 안에서 살아있는 소망과 기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생활 현장에서 의미가 있길 바랍니다. 불타버릴 이 세상일에 대해 영원한 속성을 가진 마음을 붙이거나 쏟아붓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속성의 내 마음은 가족이든 사업이든 대상을 막론하고 한 방울도 흘려보내면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작정하는 양심이 재림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재림은 살아있는 사건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이 올라가신 천국을 의식 속에 켜놓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정말로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은혜중의 은혜가 여러분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게 하셔서 천국이 의식 속에 항상 켜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사도 바울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의 살과 뼈에 사무침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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