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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2

녹취문: 은혜의 바다는 주님 아는 지식의 깊이_태승철 (벧후 3:14~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0.26|조회수9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은혜의 바다는 주님 아는 지식의 깊이>의 줄거리 :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가 얕은 웅덩이나 개울이 아니라 바다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이 지식이 날마다 깊어지고 자라야 합니다. 이렇게 지식이 깊어지고 그래서 은혜가 바다를 이루는 지점까지 우리는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 때 아버지와 아무런 갈등이나 어긋남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지요. 이런 사람이 되라고 허락된 기간이 바로 재림의 늦어짐이고요.

 

 

은혜의 바다는 주님 아는 지식의 깊이

 

(베드로후서 3:14~18)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의 바다는 주님을 아는 깊이에 달려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주의를 집중해 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 가라’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많이 받아 누리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더 깊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잘 소화하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이고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아 은혜의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지식을 얼마나 더 깊이 더 많이 가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은혜를 제대로 받아서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소위 은혜(恩惠)란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은혜를 인색하게 주시기 때문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입맛입니다. 우리의 입맛이 죄와 저주에 길들여 있기에 은혜를 받아서 누리지 못합니다.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우리의 입맛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가 달지 않고 쓰게 느껴집니다.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 은혜가 너무 쓰기 때문에 거의 낭비되는 실정이고, 오해 속에서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인격 상태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 좋게 여겨지는 것을 예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 좋게 느껴지는 것은 독약이지 은혜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건강, 돈, 권력, 가족의 형통을 좋게 여깁니다. 이것은 죄와 저주에 찌든 사람들에게는 맛있게 여겨지는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러한 경향이 발견됩니다.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사람들과 똑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하나님이 주실 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태도입니다. 바로 여기에 은혜가 공짜 선물임에도 받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받는 내게 있습니다.

제가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침에 말씀을 전할 때 목 상태가 좋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체질 자체가 건강하지 못합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분께서 이런 점을 고려하셨는지 잠들기 전에 한 잔씩 마시면 건강에 좋을 것이라며 포도주를 몇 병 선물해 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연인들이 고급 식당에 가서 포도주를 마시는데 정말 맛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포도주를 마셔도 무슨 맛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입맛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남들은 맛있다고 하는데도 도통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어본 사람들은 맹물에 국수 말아 놓은 것 같다고 하시면서 맛을 못 느낍니다. 홍어회도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은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맛을 못 느낍니다. 은혜가 이와 닮았습니다. 은혜의 맛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에 길들여져 있는 입맛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포도주 맛에 길들여지지 않고,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에 눈뜨지 못하고, 홍어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은혜의 맛에 눈뜨지 못한 채 신앙생활이 끝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18절을 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육체로 사는 우리의 피부에 닿게 느껴지는 순서대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공짜 선물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것은 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을 이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경쟁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경쟁, 돈 많이 벌기 경쟁, 높아지기 경쟁, 이러한 경쟁이 삶의 영역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쟁에서 이김을 맛있어하지, 세상 자체를 이기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과 세상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의 경쟁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란 그러한 가치들이 기쁨과 만족을 위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이기는 은혜는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갖고 싶어 하는 저주받은 입맛에는 도무지 맞지 않습니다. 제가 포도주 맛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처음 먹어본 사람들이 평양냉면과 홍어의 맛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상태에서는 세상을 이기는 은혜의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목사, 장로, 권사가 되었음에도 죽을 때까지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다가 죽고 맙니다. 세상 자체를 이기는 공짜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 결코 눈뜨지 못한 채 삶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걱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거짓 선생들이 각광을 받고 교인들이 거짓 믿음으로 흘러가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대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과 예수님이 약속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광을 받습니다. 마실 것이 포도주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콜라를 줍니다. 포도주가 입맛에 안 맞기에 콜라가 너무나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콜라에 길들여지면 죽었다 깨어나도 포도주의 맛을 느끼지는 못하는 것처럼,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맛을 모른 채로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는 공짜 선물 중 두 번째는 마음의 채움을 위해서 세상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기쁨과 채움을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은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 맞는 세상 것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쁨과 채움의 대상으로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아버지를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바랄 수 없다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팽개치고,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서 맛있게 느껴지는 세상 것들을 구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은혜 받을만한 때라고 설교하지만 진짜 예수님이 주시려는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은혜는 세상을 이기는 은혜이며,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은혜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입맛을 유지하는 동안 이러한 은혜는 낭비되고 내팽개쳐집니다. 은혜가 입맛에 맞지 않기에 등지고 멸시하고 경멸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 인격이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전제로 할 수 없다면 복음으로 인한 모든 구원과 은사는 다 끝나게 됩니다. 구원이 좋은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입맛이 없으면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교리 속에서만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는 공짜 선물 중 세 번째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내 몸을 장갑 삼아서 내 인생을 다 살아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구하는 것도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내 능력으로는 부족해서 성령님의 힘을 빌리고 싶다는 생각으로는 성령님이 오실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선교나 목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주님의 일이고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지라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선교하시는 분들에게 ‘선교가 당신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선교가 세상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를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는 것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또 목회하시는 분들에게 ‘목회가 당신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러한 질문 앞에서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세상에 대해 책임지려는 주체성을 죽이십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하든지 잘해보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형통하고 싶어 하는 주체성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에 찌든 인격적 체질은 성령님과는 반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자꾸만 세상에서의 인생을 책임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책임지고 싶어 하기에 내가 판단하려 합니다. 내가 뜻하려 합니다. 내가 의지를 갖고자 합니다. 내가 계획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내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됩니다. 말이 좋아서 성령님이 대신 사시는 것이지,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자면 성령님이 내 인생을 완전히 빼앗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에는 너무나 쓰게 느껴집니다. 내가 주체가 된 상태에서 뜻하고 계획한 일들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능력으로 오시면 좋을 텐데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오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오실 때에는 내 주체성의 위치를 아예 박탈시키십니다.

 

은혜는 공짜입니다.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수준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기독교 종교인에 불과하던 시절에는 은혜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내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다.’라는 사실을 의식 속에서 깨닫고 전제할 수 있을 때만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모든 은혜는 낭비되고 맙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만 사라진다면 우리는 은혜의 바다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얕은 개울이나 웅덩이가 아닙니다. 은혜의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입니다. 이 입맛이 은혜의 맛을 느끼지 못하기에 자꾸만 익숙한 저주의 맛을 찾게 됩니다. 여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나타납니다. 교인들 또한 이러한 익숙함을 버리지 못하기에 거짓 가르침에 열광합니다.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 십자가 복음은 쓰디씁니다. 십자가 복음에는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체질이나 기질에 하나라도 발맞추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맨날 죽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너무나 절실합니다.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을 죽일 수 없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은혜를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은혜만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 지금 형편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이란 본래 무한정으로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 외에 무엇을 더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되 많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베드로는 은혜의 바다에서 살고 싶다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질 수 있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18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는 말씀에서 지식이란 그노시스(γνωσις)입니다. 히브리어의 야다(ידע)에 해당하는 단어로써 체험적 앎을 의미합니다. 그노시스는 기노스코(γινώσκὠ)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사전에서 기노스코를 찾아보면 ‘안다, 알게 되다’라는 뜻이 있고, 곧바로 ‘동침하다’라는 뜻이 이어집니다. 남자와 여자가 동침하여 연합함을 통해 알게 되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알던 배우자의 모습과 결혼 후에 알게 되는 배우자의 모습이 사뭇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의 단계는 굉장히 다양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 지식에서 자라는 만큼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아는지에 따라 내가 받는 은혜가 얕은 개울일지 바다일지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자니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이 문제가 됩니다. 자꾸만 내 본성이 은혜를 뿌리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공짜 선물이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버리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에게 포도주를 주신 분께서는 제 건강을 생각하시며 사랑으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 입맛이 도무지 포도주 맛을 느끼지 못하기에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포도주는 그렇다 쳐도 은혜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구원도 은혜고, 천국도 은혜고, 하나님도 은혜고, 예수님도 은혜고, 성령님도 은혜입니다. 은혜의 맛을 모르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믿어도 은혜를 내팽개치고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을 따라서 이 세상 것들을 구합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것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천국을 대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너무나 두렵기에 천국을 보험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이기에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을 죽이고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여러 번 반복했던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조 바이든이라는 할아버지가 미국의 대통령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의 남편에 대한 앎에 비교하자면 그 앎의 깊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앎에는 엄청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면 질 바이든 여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대통령에 대해 상당히 잘 아는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무위원이나 국회의원들 정도라면 비서실장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대통령에 대해 잘 아는 편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국민이라면 적어도 우리보다는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보다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앎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남편으로서 바이든 대통령을 아는 것과 인도에 사는 어떤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 바이든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우리가 마치 예수님의 아내라도 된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서 같이 죽는 것뿐입니다. 세례받은 것으로 끝낸다면 예수님에 대한 앎이란 그저 바이든이라는 할아버지가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정도의 수준일 것입니다. 우리는 질 바이든 여사가 남편과 함께 매일 한 지붕 아래에서 살듯이 예수님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할 때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은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가 결정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얼마나 연합하는지가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시간으로 결정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보좌 우편까지 가서 머물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의식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세상일들에 의식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점점 더 자라고,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입맛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하고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은 함께 죽게 됩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짐으로써 하나님 맛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맛에 눈뜰 때 이 세상에서 내가 주체가 되지 않고 성령님이 주체가 되셔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주님과 연합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주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는 깊어집니다. 이 지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더 하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공짜로 주어지는 은혜의 바다도 깊어집니다. 해변에 서 있는 것과 100미터 나갔을 때와 200미터 나갔을 때 수심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주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는 대륙붕을 지나 심연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살 때, 하나님 아버지와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으로 준비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터넷 기사를 보니 요새 결혼한 부부 둘 중 하나는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결혼 후 3년 안에 이혼하는 부부가 1/3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혼할 소지가 없는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사는 방법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예수님을 통해 약속된 은혜를 얼마나 맛있게 잘 받아 누리며 은혜의 바다에서 살았는지를 통해 결정됩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은혜의 웅덩이나 은혜의 개울이 아니라 은혜의 바닷속에 완전히 빠져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때 하나님과 갈등하거나 헤어질 가능성이 없도록 준비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만 보아도 내가 준비될 수 있기 위하여 예수님의 재림은 늦어지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기를 바라신다면 지금부터 은혜의 바다에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바다를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세상에서 됐으면 좋겠다, 가졌으면 좋겠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세상 것인 한 죄와 저주의 찌든 입맛에 의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입맛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기독교 종교의 문제는 죄와 저주의 찌든 입맛에 맛있게 여겨지는 상황을 따르는 것입니다. 입맛에 쓴 은혜는 다 내팽개쳐지고 거짓이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은혜가 쓰게 느껴지는 죄와 저주에 찌든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아는 삶을 이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필코 은혜의 바닷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재림은 늦어질지라도 내가 은혜의 바닷속에서 사는 단계가 늦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루빨리 그 단계에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라며 저 또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아는 지식의 깊이가 더해짐을 따라 우리 육체의 목숨이 끝나기 전에 기필코 은혜의 바다에서 사는 인생을 실현해 내고야 말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은혜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마중물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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