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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도 베드로의 산 소망 만능주의(?)>의 줄거리 :
베드로 사도의 생각 전체를 지배하는 단어가 '소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마치 산 소망 만능주의자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따르자면 죽은 소망이 산 소망으로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관계가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왜냐면 언어 체계가 바뀜으로 인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을 가지는 길은 죽은 소망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영광을 받으신 부활 승천 예수님을 늘 의식하며 나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산 소망 만능주의(?)
(베드로전서 1:13~25)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본문의 내용을 보자면 마치 사도 베드로가 산 소망 만능주의자처럼 보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산 소망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읽지 않은 20~21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세란 베드로가 살던 시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우리를 위해 나타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시고 영광을 받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이 치욕의 사건이었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영광을 받게 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대상이 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대상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공백을 위하여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목격자로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영광을 받게 되신 사건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목격했던 베드로에게 있어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길은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자 소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공항에서 애인을 외국으로 보내는 사람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애인이 없는 동안에 공항 입구로 들어가는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며 그리워합니다. 사도 베드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가 보았던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구름 위로 올라가시며 승천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마지막 승천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아버지 집으로 가셨다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예수님이 가신 곳에 계시는 아버지를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베드로 사도의 속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왜 소망의 문제를 특별히 더 강하게 붙잡았을까요? 진리에 관한 많은 항목 중에 소망은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마치 소망 만능주의자처럼 보입니다. 민주주의, 애국주의 같은 말에서처럼 주의(主義) 앞에는 항상 최고의 가치가 붙습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이 최고의 정치적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엄밀히 말해 베드로는 소망 만능주의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베드로에게 중요한 일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소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최고의 가치는 예수님이었기에 따로 무슨 주의를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만, 본문에서는 마치 산 소망 만능주의자처럼 보일 정도로 모든 표현에 소망이 스며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 사도가 왜 이렇게 소망을 강하게 붙잡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베드로의 삶을 돌이켜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열렬히 소망하는 것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베드로의 소망은 대단하다면 대단한 소망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조국의 독립은 물론이거니와 스승으로 모시던 예수님께서 독립한 조국의 왕이 되시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은 수제자이자 최측근으로써 장관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랐으니 소망이 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갖고 있던 유형의 소망은 특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다윗 이후 천 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유대 종교를 믿는 유대인 전체의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졌던 이러한 천 년의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박살이 나고 맙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소망의 문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전체를 소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소망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부서져 버리자 소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바람에 베드로는 이전과 다른 소망을 갖게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완전히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조국의 독립이나 장관이 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바라던 소망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소망은 이미 십자가 사건 앞에서 깨어졌기에 베드로는 이것을 ‘죽은 소망’으로 여깁니다. 한편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서 생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절대로 깨어지는 법이 없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산 소망’이라 이름 붙였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신의 인격을 장악하고 있던 죽은 소망을 깨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의 문제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유대 종교는 통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유대 종교 또한 베드로처럼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천 년을 이어온 소망이 깨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보았다면 ‘이 땅에서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룰 소망이 없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천 년의 소망이 깨질 수 있었다면 유대 종교가 버림받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소망의 문제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까지 베드로는 유대 종교 천 년의 소망을 이어가던 대표 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십자가 사건 앞에서 깨어지게 되었고 이것은 베드로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증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하여 일어나야 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마주보기 이전에는 베드로와 같이 이 세상 안에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마주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소망은 완전히 부서지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없다면 유대 종교와 똑같이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지금 어떻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소원이 박살난 채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이 세상을 향한 소망을 갖고 삽니다.
대단한 일만 소망은 아닙니다. 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경험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이 세상을 향한 소망을 깨뜨리는 사건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을 향한 소망을 철저히 부수고 절대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이 세상을 향한 소원이나 바람을 갖고 있고 유지하고자 한다면 십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할지라도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는 빗나감입니다. 이는 곧 잘못된 대상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복식을 보자면 발밑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었습니다. 활동을 할 때는 거추장스러웠기에 허리를 동여매고 옷을 걷어 올려서 무릎 아랫부분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말씀을 ‘온전히 바랄지어다’라는 말씀과 연결시키자면 온전히 바랄 수 있도록 마음이 지저분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 때는 이것을 바라고, 또 어떨 때는 저것을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바랍니다. 탁구를 칠 때는 탁구를 이겼으면 좋겠고, 골프를 칠 때는 골프를 이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바람으로 인해 마음은 24시간 사는 동안 끊임없이 분산되어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다시 13절을 보면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때에는 이 세상이 없어집니다. 직장도 없어지고, 대한민국도 없어지고,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다 없어집니다. 당연히 내 가정도 없어지고, 내 몸도 없어집니다. 육의 몸이 사라지기에 영과 영이 만날 때에는 나이의 구분도 없고 남녀의 구분도 없으며 가족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은혜로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은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과 의인 모두에게 내리시는 자비로운 은총입니다. 그러나 독생자까지 동원해서 주시려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은 없어질 이 세상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없어질 것이기에 세상 것들이 은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듯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해 크고 작은 바람이 생기는 것을 막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소망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재림 때 없어질 이 세상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인 이유는 스스로를 영원한 은혜를 받기에 부적격한 자로 마음의 수준을 강등시키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기 전까지 세상 것만을 바라며 살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녀들을 향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살기를 저 하늘에서 바라마.’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이 없어지고 천국이 나타날 때 주어지는 것을 받기에는 자격 자체가 미달입니다. 세상 것만을 소망하던 체질로 죽었기에 영원한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은 무척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 알레르기 천식이 심해졌습니다. 저녁만 되면 가슴이 꽉 죄이면서 숨이 가빠지고 아픕니다. 지난밤에 한숨도 못 자다가 새벽녘에야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풀렸습니다. 옆으로 누워도 숨을 못 쉬겠고, 엎드려도 숨을 못 쉬겠고, 앉아도 답답한 상황에서 숨통이 좀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저는 밤새 이러한 상태에 대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주권자이신 아버지가 아신다. 이렇게 아프다가 죽더라도 아버지가 데려가시는 것이라면 죽어 마땅하다. 아버지가 알고 계시는 문제를 내가 바랄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자꾸만 편해지고 싶다는 바람이 생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십자가를 붙잡으며 밤새 야곱의 씨름을 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이제는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주권적으로 내 삶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형편을 다 아시면서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가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불편을 느끼고 부족을 느끼면서 간구한다면 십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로 이 사실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저는 적어도 이러한 확신은 가지고 있기에 지금 당장 죽을 것 같더라도 나를 죄어오는 상황과 조건으로부터 구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한 바람과 싸울 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안 믿는다면 모를까 믿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책임을 질 것은 내 마음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죽이시든 살리시든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죽이시기로 결정하셨는데 내가 살겠다고 소원하는 것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소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거룩함’이라는 단어가 부각됩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행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라고 하였고, 18~19절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행위와 거룩함에는 소망이라는 개념이 철저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거룩해지는 방법은 다름 아닌 산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욕이란 개인적 욕구가 아닌 간사할 사(邪)를 쓰는 간악한 욕구를 뜻합니다. 간악한 욕구를 따르거나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악한 욕구는 결국 간악한 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신의 간악한 소망이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뒤로 자빠질 만큼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고, 베드로가 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모두 보았던 베드로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생각하셨고, 부활하여 승천함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에 반해 베드로는 수제자라 불리면서도 스승이신 예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전혀 모른 채 오직 예수님이 나라를 독립시키시기를 바랐고, 자신은 예수님의 일익을 담당하여 논공행상에서 장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순응했던 간악한 소망이자 욕구였다는 것입니다. ‘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는데, 정작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모든 순간을 나는 간악한 소망으로 인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건이 만인에게 증언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간악한 욕구입니다. 이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죽은 소망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야 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사로잡혀서 평생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루어져도 마음이 채워질 수 없는 소망에 사로잡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죽은 소망은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 거룩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 씻음을 받아 거룩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는 한 아무리 십자가에서 죄 씻음을 받아 깨끗해졌어도 그 깨끗함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기껏 죄 씻음을 받아서 눈보다 더 희어진 상태가 되었는데 다시 세상을 소망한다면 도로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자전거를 탈 때 넘어지지 않고 달려가기 위해서는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하늘을 소망해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깨끗해진 상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내 소망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을 때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의 제목을 ‘산 소망 만능주의’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 대한 소망은 깨어지고 산 소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소망을 죽이는 자리입니다. 사소한 소망이라도 세상을 향한 것이라면 용인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근신하고 정신을 차려서 마음의 허리를 동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 이외의 이 세상 다른 관심사로 흩어지는 것을 현장범으로 체포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세상의 죽은 소망을 죽이는 사건이라 말합니다. 산 소망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은 소망을 찾아내서 현장범으로 체포하고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는 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산 소망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 소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소망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19절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헛된 행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가치관에 의한 소망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들이 헛된 행실입니다. 뉴스를 보든 인터넷을 뒤져봐도 어느 한 문장이나 한 단어나 세상을 향한 소망이 배어 있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심지어 드라마나 영화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보아도 결국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가치관이 배어 있습니다. 이런 죽은 행실이 나타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한 소망이 박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세상을 소망하는 나입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는 나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나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는 마지막에 형제 사랑과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2절을 보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형제 사랑도 소망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 소망이 박살나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면 몸으로 만나는 형제에 대해서는 어떤 바람도 가질 수 없습니다. 형제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뿐입니다. 산 소망이 활성화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진정으로 형제를 위한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으면 상대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화끈한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거듭남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이유이고 소망과 연관이 있습니다.
소망이란 좋은 것 다시 말해 가치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내가 제일 좋다고 여겨서 소망하고 있는 대상을 중심으로 언어의 질이 결정되고 언어의 체계가 형성됩니다.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이고 인격의 질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5천 단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더라도 언어의 체계는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과 유일한 좋음으로 바랄 때와, 그렇지 못하여 세상에 대해 죽은 소망이 펄펄 살아서 바람이 생기는 마음 상태로 언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인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산 소망으로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행실이 거룩해지고 우리가 맺는 관계가 거룩해집니다. 인격 자체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삶 또한 새로워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산 소망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소망하려고 하는 나를 현행범으로 잡아 죽이면서 하늘을 향한 산 소망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 바뀌고, 행실이 바뀌고, 관계가 바뀌고, 삶이 바뀌고, 그 모든 바뀜의 근원에는 인격의 바뀜이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흐트러지게 만드는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소망을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서라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산 소망을 유지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산 소망은 ‘하나님만이 내 보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으로 산 소망을 붙든다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의 언어가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어 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마치 산 소망 만능주의자처럼 산 소망을 강조합니다. 이 안타까운 호소가 우리의 뼈에 사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나의 죽은 소망이 산산이 부서짐을 바라봅니다. 산 소망만 유지하게 하시며 산 소망의 증거들이 확인되는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