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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산 돌은 하나님과 같은 언어 쓰는 사람>의 줄거리 :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마치 내 인생 자체가 성전이라도 된 것처럼 날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신령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산 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산 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생각과 계획의 집을 세워나가시기 위한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 발탁된 사람을 말합니다. 산 돌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하나님과 같은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산 돌은 하나님과 같은 언어 쓰는 사람
(베드로전서 2:1~8)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사도 베드로는 4~5절에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하나의 성전이라면 너희는 제사장이 되어서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를 드림으로써 산 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은 그동안 많이 오해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요청을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열망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로 문장이 시작됩니다. 이로부터 앞선 말씀을 받아서 이어지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장 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이로부터 ‘그러므로’가 이어집니다.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거듭남이란 인격의 거듭남입니다. 이전에는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들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인격에서는 그런 말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격의 가장 큰 특징이란 말, 다시 말해 언어의 사용입니다. 언어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 모두 관련이 있습니다. 거듭남의 인격적 실체를 언어의 인격이라고 볼 때, 거듭났다면 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요청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거짓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진정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신령함이란 영적인 상황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로기코스(λογικός)로 ‘언어적’이라는 뜻으로써 말을 의미하는 로고스(λόγος)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직역해 보자면 ‘진정한 말의 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 갓난아기와 같이 ‘진정한 말의 젖’을 사모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요청은 귀로 듣는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해야 될 말을 사모하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말은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의 말일 수 없습니다. 거짓이 없고 진정성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과 같은 말들은 거듭나기 전의 악한 말의 달인으로써 사용하던 것들입니다. 한편 거듭난 사람은 진정한 말을 함에 있어서 갓난아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주님께서 나의 죄를 사해 주셨음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제 말에서 갓난아기와 같이 되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언어를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진정한 말을 사모하여 구원에 이를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거듭난 갓난아기의 상태에서 진정한 말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언어의 인격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구원에 이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언어와 관련된 내용을 히브리서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언어, 즉 우리가 하는 말은 베드로전서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소망’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말’이란 사도 베드로의 생애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 목격을 통해 소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본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24시간 무엇인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하늘로 갔으니 소망은 하늘에만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기도하던 중에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를 생각하며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비둘기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은 마치 불의 혀와 같았습니다. 혀는 곧 말을 하는 기관으로써 언어를 상징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렇게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하신 오순절 사건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기폭제가 된 사건이 말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오순절 사건의 경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불의 혀처럼 임하신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로써 임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중요한 것은 외국어 방언의 기적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본 유대인들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말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제각각 쓰던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되었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실 때의 베드로의 반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의 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던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불이 혀처럼 임하신 뒤에는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같이 다녔어도 계속해서 사람의 일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소망이 바뀌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은 가치로 여기게 되자 성령이 임하시면서 하나님의 언어가 내려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실 큰일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언어 자체가 하나님의 언어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계획하셔도 베드로의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하면서도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말하면서 좇았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회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시작에서 베드로 사도가 한 일은 설교였습니다.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설교는 바로 베드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설교는 하나님 언어 속의 생각을 받아서 내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말하던 베드로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언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 제자들은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 제자들 중 누가 더 큰 자인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세상의 일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과 계획과 뜻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나의 독생자 예수야. 네가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아셨습니다. 저주와 죄악 속에 빠져있던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과 3년을 함께하던 제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던 유대인들 중에도 자기네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어날 십자가 사건을 알아듣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우상시하거나 성경의 문자를 즉자적으로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을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라 착각합니다. 성경의 문자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생각과 일을 알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님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언어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 한다면 성경을 난도질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나 좋자고 하는 이해가 되어버린다면 ‘죄 사함을 받아 의인이 되었다.’라는 말에서 끝나고 맙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시다’는 것은 온 하늘과 땅을 통틀어 유일한 좋음이라는 뜻입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의 언어로서의 생각은 하나님과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의 언어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은 가치로 여기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언어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최고로 좋은 가치로 여겨지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한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본문 8절에서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하였던 대로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형성된 언어 체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세상은 기독교 종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 7절을 보면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서 머릿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언급 되었던 산 소망이 죽은 소망과 대비를 이루었던 것처럼 산 돌은 죽은 돌과 대비를 이룹니다.
버린 돌, 모퉁이의 돌은 건축자들에 의해서 쓰임 받음을 기준으로 합니다. 세상의 건축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자기들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산 돌로 택하시고 인류 구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빌딩을 지으시기 위한 기초석으로 사용하십니다.
산 돌이란 이 땅에서 몸을 입고 살면서도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생각하시는 하나님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어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기초석으로 삼아 원하시는 뜻과 계획의 집을 세워 가십니다. 반대로 죽은 돌이란 이 세상이 쓰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언어를 잘 알아듣고 그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산 돌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죽은 돌인 사람은 하나님 대신 재물을 섬깁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는 사람을 채용할 때 돈에서 비롯된 언어 체계가 잘 잡혀있는 사람을 선호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 더 많은 돈이 벌리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 땅에서 건물을 짓듯이 이루어 나가고자 하실 때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임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언어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산 돌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생의 과정과 언어라는 개념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나가 변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3절을 보면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기탄없이 예수님에 대해 말함을 보고 언어가 달라졌음에 놀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의 아들 된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전에는 세상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의 달인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언어는 하나님의 언어와 불일치하는 진정성이 없는 거짓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생각 속 언어와 전혀 다른 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기에 모든 말이 거짓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소망이 바뀌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가치이자 최고로 좋은 거룩하심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언어는 달라집니다. 다만 거듭난 우리는 갓난아기와 같아서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렇기에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언어와 같아지기를 바라며 ‘진정한 말의 젖’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 또한 하나님과 같은 언어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될 자격을 얻었다고 믿는다면 이제부터 하나님과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언어를 내 입에 담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기 위하여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언어를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언어를 쓰셨기 때문에 세상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산 돌이신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와서 내 인생 자체를 신령한 집인 성전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온 자는 인생이 성전이 됩니다. 인생이 성전이면 나는 그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5절에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는 곧 언어로 드리는 번제입니다.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은 거듭나지 않았을 때의 습관입니다.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기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처럼 산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날마다 이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를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언어가 나온다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세상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가 자꾸 내 속에서 나옵니다. 그런 나를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써 소망하는 가치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는 일이 강력해지고 뚜렷해지고 선명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 아직도 세상의 가치에 매여 있는 나를 죽이는 제사를 끊임없이 드림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은 점점 더 선명하고 뚜렷해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과 현실감이 뚜렷해질수록 소망이 강화되고 점점 더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산 돌로 채택하셔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뜻을 따라 집을 지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이는 산 돌이 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여길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순종하던 사람은 노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언어를 알아듣고 구사하던 사람이 노아 한 사람뿐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중턱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와는 정반대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죽은 돌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노아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택하셨고 노아를 버렸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버려지는 결과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이 홍수에 쓸려가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를 쓴다는 것은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어가 내게 주시는 내용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럴 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의도치 않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심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자신을 돌로 치던 사람 누구도 정죄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산 돌이 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나’라는 기초석 위에 쌓여 가게 됩니다. 그럴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버려지는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어를 받아들인 나를 택하시기에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나를 반대하고 버리는 사람들이 나중에 돌아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 원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시며 통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이유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해야 할지는 명확합니다. 본문 2절에서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통하지 않는 인생으로 끝이 난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음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이시고 나도 인격이기에 통함은 같은 언어를 사용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계획하실 때 쓰시는 언어와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언어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았던 인간 중에서 홀로 하나님 언어의 달인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음의 제사를 드릴 때 내 소망이 바뀌게 됩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점점 더 뚜렷한 소망이 되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이 내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보다 점점 더 뚜렷한 현실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소망이 완벽하고 온전한 상태를 이루게 되면 언어가 바뀌고 산 돌이 됩니다. 그리고 언어 또한 하나님의 언어와 같아지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과 통하게 됩니다. 늘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제사를 드리며 하늘 소망이 뚜렷해지기만 한다면 따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더라도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돌로 사는 모습입니다. ‘나’라는 인생의 터전 위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세우신 계획과 뜻을 쌓아올려 가십니다.
산 돌이 되기 위하여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을 성전으로 삼아서 십자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며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은 뚜렷해지고,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과 같은 언어가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언어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말의 젖을 사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 입에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들여 입에 담고 말할 수 있는 산 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