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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2

녹취문: (S) 하늘길 갈 마음 노리는 인생길 함정_태승철 (벧전 2:18~3: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0.02|조회수3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길 갈 마음 노리는 인생길 함정>의 줄거리 :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영적 환경 안에 들어선 모든 사람은 두 가지 길을 갑니다. 마음의 길과 몸의 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길을 가는 동안 몸은 성령님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이 이끄시는 인생길을 갑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하늘길을 벗어나서 인생길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 현장에는 도처에 내 마음을 인생길로 끌어 내리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늘길 갈 마음 노리는 인생길 함정

 

(베드로전서 2:18~3:7)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장 18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는 노예들이 주인들에게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고, 3장 1~7절까지는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할 것과 남편들이 자기 아내에게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는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개인적인 형편이나 사회 제도 혹은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해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주어진 물리적 환경에 자유하지 못해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든지 개선하려는 것은 정욕을 따르는 것이고, 사회적인 제도나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 18절에서는 사환들에 대한 요청이 이어집니다. ‘사환들’이란 쉽게 말해 종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종들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는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이 있는 주인에게뿐만 아니라 못되고 까다로운 자들에게조차 순종할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읽지 않은 3장에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이며, 남편은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라는 요청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순종에 대한 요청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순종에 대한 요청을 자주 접해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 순종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대한 말씀이 아주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예로 들어 순종함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21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함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22~23절을 보면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순종의 내용입니다. 만약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고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어떨까요? 정당한 대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죽은 자처럼 무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지 반응하거나 관여하거나 책임지고 고쳐야 할 문제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의 일로 넘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요청하는 순종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인을 섬기던 종들에게는 더욱 직접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선하고 관용이 있는 주인이 있지만 못되고 까다로운 주인도 있었습니다. 주인이라는 하나의 인격적 현상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 포함된 일로 던져버리고 아예 관여하지 않는 것이 순종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착하든지 못됐든지 하나님의 주권적 표현의 현상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시키시는 일만을 하는 것이 곧 선행이고 진정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인 형편에 순종하고, 정치가나 권력가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는 곧 주어진 환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부부간의 순종 또한 아내와 남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라는 요청입니다. 이 모든 말씀의 핵심은 인간을 대할 때 인격적 사건이나 현상으로 여겨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로 떠넘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요청하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하는 선행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에서 드러나는 순종이라는 단어에 얽혀있는 내막입니다.

 

한편 21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좀 마음에 걸립니다. ‘이를 위하여’란 앞선 20절 말씀을 가리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보답을 세상에서 받지 못하고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을지라도 참는 것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자면 선행을 하면서도 평생 부당한 고난과 고통을 참으며 살라는 이야기 같아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환경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환경 속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두 개의 길을 가게 됩니다. 마음의 길과 몸의 길입니다. 마음이 가는 길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하늘길입니다. 몸이 가는 길은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는 성령님의 장갑이 되는 인생길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24시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환경 속에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늘길을 가는데 차질이 없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잘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온전한 절대 평강과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늘길을 가야 하는데 몸으로 살아야 하는 인생길 속에 끊임없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인생길의 함정에 걸려들면 안 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함정이 개인적인 형편이나 사회 제도 혹은 정치가나 권력가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종이나 고용인이 겪는 주인이나 상전과의 관계에 대한 일들이 함정이 될 수 있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여성들이 많았기에 아내들에 대한 이야기도 남편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먼저 나옵니다. 아내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영적 환경 속에서 마음으로 하늘길을 걸어갈 때 남편이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로 아내가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만나는 모든 인간관계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무조건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믿고 그 아버지의 주권에 넘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하늘길을 갈 수 없습니다. 개인적 형편이나 사회 제도나 정치가나 권력가, 상전이나 아내나 남편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하늘길을 걷지 못한다면 마음이 땅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땅에 내려온 마음은 저주받은 죄 속의 삶의 특징을 보이게 됩니다. 하늘길이 없어졌기에 마음이 인생길에 총력으로 관여합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상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상태에 익숙해진 인격적 체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길을 걸어야 할 마음으로 끊임없이 인생길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길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이냐는 항상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못돼먹고 무능합니다.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입니다. 이러한 상황일 때 남편이라는 인격적 현상에 대해 어디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어느 선부터 내가 나서서 남편에게 저항하고 고치려 하고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단적으로 말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에 있어서의 한계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고 있는 인생길에서 나의 처지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처지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노예로 못된 주인을 만나서 끊임없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주인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가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될 수 있는 지점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보다 더 열악한 환경으로 주인이 나를 몰아붙인다면 그때는 스스로 나서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몸에 채찍을 맞으시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허리에는 창으로 찔리시고 사지는 못 박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 형편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너무 강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고 있는 인생길에서 우리의 처지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처지로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은 실제로 이 세상에서 몸이 처하는 상황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지로 자아의식을 낮추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가 나의 한계입니다. 여기까지를 한계로 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인생길을 맡기셨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내 인생길이 진행될 때 인정되어야 할 하나님의 주권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형편까지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열악하고 더 나쁜 상황이 주어진다면 십자가를 제쳐놓아도 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우리 삶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보다 더 열악한 상황은 주어질 수 없기에 이 말씀은 무한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길의 함정들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넘기고 마음이 하늘길을 걸어가는 일에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길을 걸어감에 차질이 생긴다면 인생길이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자리까지 가시는 동안 엄청나게 부당한 처우를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이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서 인생길을 가는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가 내게 합당한 자리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 몸이 어떤 상황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을 맞으시고, 허리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아내는 형편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길을 차질 없이 걸어갈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상사가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뭐 저따위가 있어?’라고 생각했다면 마음은 이미 인생길의 함정에 빠진 것이고 이 땅으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상사가 나에게 잘못 하더라도 예수님의 못 박히심을 생각한다면 ‘저 사람의 인격 현상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내 상황이 십자가보다 낫다면 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이 세상 인생길을 걸어갈 때 내게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되는 한계는 십자가에서 사지가 못 박혀 죽는 상황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그 외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책임과 주권으로 넘겨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하늘길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것이 본문 말씀에 담긴 내용입니다.

 

24절을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무에 달려 못 박히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본래 합당한 자리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모습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죗값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25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사지가 못 박혀 죽어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양과 같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처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사회 제도에 대해 불만을 갖고, 정치가들을 비판하며, 상전에게 대들고,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를 탓했습니다. 전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자기 처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온 마음이 인생길에 관여하는 바람에 하나님께로 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죄적인 상태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일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잘 아시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나를 움직여 가시며 인생길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인생길에 뛰어들어서 길을 잃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길을 잃고 기껏 하는 소리가 ‘회사 부장 때문에 내 삶이 괴롭다.’라며 상전을 탓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장이 나에게 못되게 굴지라도 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상황까지 몰아갈 수 없다면 그 이전까지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답이고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길 잃은 양처럼 살았습니다. 남편이 걸림이 되고, 아내가 걸림이 되고, 만나는 사람들이 걸림이 되었으며, 개인적 형편이 걸림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는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자’고 부르십니다. 십자가의 처지가 나의 처지이며 내게 허락된 신분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기준으로 인생길을 걸어갈 때 내 몸이 만나는 상황에 대해서 십자가보다 나은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몸으로 살아가는 인생길에 마음이 관여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3장에 이어지는 아내와 남편에 대한 요청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관계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관계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남편이 이유 없이 부당한 태도를 보일지라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인정한다면 내 상황이 십자가보다 더 나쁘지 않은 한 남편이라는 인격적 덩어리 자체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표현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남편이 중독자일 수 있습니다. 무능하고 괘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남편이고 훌륭한 남편이라도 함정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남편보다 못된 남편이 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을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지만 함께 생명의 은혜를 받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성의 육체가 남성의 육체보다 약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영생을 얻음에 있어서 나와 동일하게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육체가 약한 여성의 몸을 입고 있다고 해서 영이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독립적이고 소중한 영에게 육체의 몸을 입히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도가 끊어지게 됩니다. 기도가 끊김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끊김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마음이 하늘길을 가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가야 하는 인생길에는 마음을 끌어들이는 함정들이 있습니다. 이 함정을 피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일을 대신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부당한 대우와 심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부당하게 대우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주권에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선행을 행하시며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나 빌라도에게 순종하셨던 것은 그 위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일은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인정한다면 그 상황보다 더 나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주권이 책임지는 일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상황보다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진다면 내가 나서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무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그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상황보다 더 나쁜 상황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으로 관여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하늘길을 가면 됩니다. 그러면 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시는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선한 말과 행동을 하시며 인생길을 진행하실 것입니다. 하늘길과 인생길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하늘길을 가야 할 마음이 인생길을 걸어갈 때 만나게 되는 인격적 존재들에 의해서 함정에 빠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보며 내 상황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인생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줄기차게 하늘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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