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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2

녹취문: 사도 베드로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_태승철 (벧전 3:8~2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3.10.05|조회수5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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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도 베드로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줄거리 :

사도 베드로에게서 아주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 폐소공포증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안에 갇혀서는 숨을 쉬지 못합니다. 마음이 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를 감옥에 갇힌 상태로 느낍니다. '나그네'라는 단어도 사실 이 세상 폐소공포증에서 나온 말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이처럼 폐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에서 비롯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베드로전서 3:8~22)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외적으로 발생한 사고나 재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심적인 충격을 받아 생깁니다. 이때 받은 심적 충격은 이후에도 충격을 받을 때의 증상으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이처럼 외상을 통해서 정신적인 상처를 받게 된 이후에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장애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합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심적인 외상이란 외부 요인에 의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입게 되는 정신적 상처입니다. 이 정신적 상처를 받은 상태가 아물지 않으면 정신적인 손상이나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중에 대표적 증상은 폐소공포증 혹은 폐쇄공포증으로 나타납니다. 이 증상은 재난이나 사고를 당한 뒤에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 숨을 쉬기 어렵고 심리적 신체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일으킵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보통 사람들은 다시 작동하기까지 기다리며 핸드폰이라도 들여다보겠지만 폐소공포증을 앓는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고 진땀을 흘리고 심지어는 기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바로 폐소공포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증상을 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폐소공포증의 대상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공간은 엄청나게 넓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마음이 이 세상 안에 머무는 상태를 견디지를 못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나그네’라는 단어 또한 이러한 세상 폐소공포증에서 연유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옥은 감옥이고 바로 세상을 말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지옥강하설을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사흘이 걸렸습니다. 이 사흘 동안에 예수님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서 지옥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던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말씀하시며 26절에서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죽어서 음부로 들어가고 지옥으로 가기로 결정되었다면 그 상황을 변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1절을 보면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일은 죽기 전에 들은 것으로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옥’이라고 언급한 곳은 이 세상이지 결코 음부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을 볼 때 답답한 감옥처럼 폐쇄된 밀폐공간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지를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19~20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다’라고 번역된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나프시크시스(ἀναψύξεως)로써 유쾌해짐을 뜻합니다. 이 말의 원형인 아나프시코(ἀναψύχω)를 보면 아나(ἀνα)는 ‘위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프시코(ψύχω)는 ‘숨을 쉬다’라는 뜻으로써 위를 향하여 숨을 쉬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refresh’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로 가서 하늘을 호흡할 때 유쾌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수 없다면 마음이 진정으로 유쾌하고 상쾌해질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느낌을 가지며 세상을 감옥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구원을 받으면 단순히 생명을 얻거나 영원한 만족을 얻는다고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숨을 쉬게 된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세상을 감옥처럼 여기며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는 어떠한 이유에서 세상을 감옥처럼 여기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일까요?

 

본문 18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죄를 위하여 육체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육체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마음이 갇혀있는 것이 죄와 저주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은 육체로 사는 세상에서 없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를 타파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세상에서 없어지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밖으로 나가셔서 영적인 세계에서 살아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로 사는 이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꺼내시기 위하여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셔서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영적인 세계로 끌어내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일은 어제오늘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에 살아계시면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로부터 꺼내서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가 뜰 수 있을 정도의 홍수가 없었던 상황에서 방주를 지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말씀에 기인한 일이었습니다. 방주가 뜰 정도로 비가 오면 세상은 진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보실 때 가치가 있어서 남겨 두실만한 일,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만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싹 쓸어버리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노아와 그 식구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노아의 때에 대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하다가 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으로 보이지만 실은 영이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음부에 갇히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을 바로 감옥이라 생각하며 마음이 갇힌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당시 방주로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비웃기만 했지, 그 안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탈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노아를 통하여 구원 사역을 펼치셨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구원을 받은 자는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전체는 이 세상 폐소공포증에 의한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어지는 21절의 말씀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세례’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뜻합니다.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갈 때 이루어집니다.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세상에 갇힌 상태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세상에 갇힌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태를 생각만 해도 숨을 못 쉴 것 같은 폐소공포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나프시크시스(ἀναψύξεως)의 유쾌하게 됨이란 마음의 숨통이 트이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될 날이 오겠지, 내 아이들이 잘될 수 있겠지, 사업이 궤도에 올라설 때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마음의 숨통은 트일 수 없습니다. 회사 일을 하면서 ‘조금만 버티면 긴 연휴가 온다.’라고 기대를 하는 것조차 이 세상에서 숨통을 틀 사건들을 찾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태를 견딜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바로 이러한 베드로의 세상 폐소공포증에서 비롯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겪은 외적인 충격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러한 세상 폐소공포증이 생긴 것일까요?

 

사도 베드로가 경험한 외상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가 제일 먼저 예수님의 죽음을 포착하고 배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베드로가 겪은 좌절과 충격은 마음의 상처가 되고도 남을 정도의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충격을 남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십자가 사건이 슬픔과 좌절을 넘어서는 충격이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을 넘어서는 충격이었습니다. 극단적 슬픔과 극단적 기쁨의 충격을 연속하여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충격은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집니다.

슬픔의 충격, 기쁨의 충격, 그리움의 충격이 베드로를 장악합니다. 베드로는 이 세 가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사람처럼 세상을 감옥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무척 올바른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비유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극한적 슬픔의 충격,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극한적 기쁨의 충격,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사라진 극한적 그리움의 충격을 경험한 자들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와 저주에 빠져있고 찌든 상태입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보자면 베드로가 세 가지 극한적 충격을 경험한 뒤에 보이게 된 이 세상 폐소공포증은 정상적인 심리상태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으므로 죄와 저주가 없었더라면 누구나 세상에 대한 폐소공포증을 겪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같은 세상 폐소공포증을 겪었던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목격함으로 극한적 슬픔의 충격을 받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극한적 기쁨의 충격을 받았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극한적 그리움의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이로부터 발생한 세상 폐소공포증은 사도 바울 이상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라는 말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나그네처럼 마음이 이 세상을 진작 떠난 상태가 아니라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로 가고 싶어서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며 마음이 머무르는 사람을 보면 깜깜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저주에 빠지고 죄에 물든 사람들의 심리상태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예가 우리가 읽지 않은 8~17절에 등장합니다. 9절을 보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욕은 모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이와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적어도 그렇게 살지는 못할지라도 귀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비는 것은 저주와 죄에 찌든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충격과 부활의 충격과 승천의 충격으로 인해서 지구 안에서 마음이 머묾에 대해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심리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10~12절을 보면 같은 맥락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넘기지만 사도 베드로는 실제로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세 종류의 극한적 충격을 받은 뒤에야 할 수 있는 말이고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눈에 띄는 구절이 12절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신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의인이 끊임없이 주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며, 주의 얼굴이 의인에게 비추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주의 얼굴이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요?

먼저,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며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생각이 성령을 통해 들어온 간구를 하기에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신다고 했습니다. 악행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식 자체가 꺼져 있기 때문에 악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고 의식에서 꺼진 상태에서 살던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과 연관하여 사도 베드로는 선행을 행하려는 우리가 악행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가르쳐줍니다. 그 방식은 끝까지 선행을 행함으로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궁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행을 할 때는 우리가 두려워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곧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우리에게 행한다는 뜻이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 예수를 믿는다고 매를 맞는 일은 흔했습니다. 매를 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매 맞는 일을 두려워하기에 믿는 자들에게도 두려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재산이 몰수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몰수됨을 두려워하기에 믿는 자들에게서 재산을 몰수하면 두려워하리라 여긴 것입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믿는 자들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는 마음의 숨통이 막혀서라도 세상에 있지 못합니다. 그 대신 계속해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직면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내가 두려워하기를 바라서 고난을 안겨주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고난을 안겨주는데 너는 왜 두려워하지 않느냐? 무슨 믿는 구석이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5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슬픔의 충격과 부활이라는 기쁨의 충격과 승천을 통한 그리움의 충격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공간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빠져나가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육체로는 거하시지 않는 곳입니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내 마음이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숨을 못 쉴 정도로 폐소공포증을 느낄만한 곳입니다. 마음이 잠시도 세상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박차고 나가 하늘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내 몸과 관련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세상이 보기에 이러한 모습은 정신 장애입니다. 우리를 정상적인 심리상태의 사람들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이상 심리상태로 사는 사람들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죄와 저주에 찌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정상적인 심리상태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같이 두려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같이 원합니다. 감옥처럼 밀폐된 세상에 갇혀 있으면서도 좋아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슬픈 극한의 충격, 가장 기쁜 극한의 충격, 가장 그리운 극한의 충격을 통하여 더 이상 예수님이 몸으로 계시지 않는 이 세상에서 마음이 조금도 머물 수 없어 폐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베드로가 경험한 세 가지 외상적 충격이 우리의 경험이 되게 해주셔서 우리도 사도 베드로처럼 이 세상 폐소공포증 환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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