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언행은 중립 없이 사랑 아니면 죄다>의 줄거리 :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십니다. 많은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말씀입니다. 마치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내 죄를 덮는다는 뜻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아니면 내가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의 죄가 덮인다는 의미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타인을 향한 내 모든 언행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거나 죄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 언행은 중립 없이 사랑 아니면 죄다
(베드로전서 4:1~11)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언행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사랑이냐 죄냐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됩니다. 사랑도 아니고 죄도 아닌 중립적 말과 행동은 나올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인격적 구조입니다. 인간의 인격적 구조 자체가 중립적 말과 행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요약하면 1~6절까지의 말씀은 죄를 그치라는 내용이고, 7~11절까지의 말씀은 사랑하라는 내용입니다. 죄를 그치고 사랑하라는 것이 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죄를 그칠 것을 요청하며 그 유일한 길을 1절에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체의 고난’이란 우리가 받는 육체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당하신 육체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또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입장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동일시의 진리를 사도 베드로는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의 입장을 갑옷처럼 입으면,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언행에서 죄가 그칠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육체의 남은 기간은 죄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본문 전반부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의 말씀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7~11절에서는 ‘사랑하라’는 요지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사랑하라는 요청에 나오기 전에 7절을 보면 특이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그치고 사랑이 나오기 위해서는 만물에 끝이 있다는 생각이 내 안에 고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입니다. 영이신 삼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지음 받은 곳이 바로 공백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영은 천국으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영원합니다. 그런데 사망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천국에 있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되는 상황, 다시 말해 천국에서 존재가 없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영 자체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렇듯 영원한 속성을 가진 마음에 비해 이 세상 만물에는 다 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끝이 있는 것들에 영원한 속성을 가진 마음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끝이 있는 만물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앞서 언급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입장을 갑옷처럼 입은 사람이 생활 현장에서 보이는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같은 입장을 갑옷처럼 입으면 사람을 포함하여 끝이 있는 이 세상 만물에 대해서 마음의 시선을 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끝이 있는 만물에 대해 끝이 없는 마음이 시선을 닫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만물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 하나님에 의해 조성된 영적 환경에 시선을 둡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사닥다리는 땅에서 하늘로 이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그 사닥다리를 따라 올라갈 때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으로 나의 보물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유일한 주체가 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하나님을 직면하면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내 몸을 움직여 가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눈을 감고 하지만 새롭게 허락받은 영적 환경을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기도란 마음이 새로운 영적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일어나는 일이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은 나로부터 죄가 나오지 않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치고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8절 말씀을 중심으로 본문을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이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는 죄가 나오는 상태이거나 사랑이 나오는 상태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중립의 마음 상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행은 죄가 아니면 사랑이고 사랑이 아니면 죄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라는 말씀은 죄가 나오지 않게 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또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 됩니다.
죄는 곧 빗나감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소망하지 않고 세상에 머물 때 공백의 마음은 세상 것을 소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것을 소망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죄의 상태에서의 모든 언행은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소망하는 상태가 유지되면 사람을 만날 때 나타나는 모든 언행은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끝이 있는 만물에 마음이 휘둘리지 말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죽으신 예수님의 입장을 갑옷처럼 입고 세상을 대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만 타인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통해 허락된 영적 환경을 켜놓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죄를 덮는다는 표현은 많이 오해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유명한 교부들조차도 죄를 덮는다는 표현을 크게 오해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함을 통해서 나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가려진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서 가려질 수 있습니다. 죗값이 사해지는 역사는 십자가 예수님의 입장을 내 입장으로 갑옷처럼 입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은 사랑을 받는 사람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없어지는 것이라 오해되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권세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내가 사랑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없어지게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와 자격이 없습니다.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은 내가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이 자기의 죄를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줄어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런 보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하는데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는 사랑받기 때문에 더욱더 기분 나빠하고, 더욱더 자존심 상해하고, 더욱더 분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경우가 왕왕 등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의 언행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받은 유대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거부하며 십자가에서 죽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했을 때 상대방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죄의 가능성을 완화하거나 줄여준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내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할 때 죄를 덮는다는 것은 내게서 죄가 나오는 일이 중단된다는 뜻입니다. 본문 전체의 주제는 ‘죄를 그치고 사랑하라’입니다. 변증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그치면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한다면 죄가 그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언행은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내가 타인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때 나와야 했던 모든 죄가 그치고 제어되고 중단됩니다. 이처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에는 내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죄가 사랑하는 동안에만 중단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언행은 마음 상태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상태는 두 가지뿐입니다. 무조건 사랑으로 나오게 되는 상태와 무조건 죄로 나오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랑하지 않고 죄가 발생하는 마음의 상태란 공백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망하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사람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우리의 언행은 사랑이 아닌 전부 죄가 되고 사냥이 됩니다.
사냥은 짐승을 잡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통해 허락받은 영적 환경에 적응하여 주님의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이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 안에서 마음 채움을 위한 빗나감의 죄가 발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죄가 발동될 때는 타인을 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사냥감으로 삼아 잡아먹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에 사람을 통해 채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같이 산 부부도 단 하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냥감으로 삼고, 아내는 남편을 사냥감으로 삼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세상을 소망하고 있는 한 삼위 하나님에 의해 조성된 새로운 영적 환경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 하루도 사냥꾼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름뿐인 부부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잡아먹고 배부르고자 하는 사냥감으로 여기는 것은 부모 자녀의 관계에도 해당됩니다. 빗나감의 죄 속에 있을 때는 부모 입장에서 자녀를 볼 때 단 한 순간도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삼위 하나님에 의해 조성된 새로운 영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음가짐의 부모는 자녀를 기르는 동안에 자녀를 사냥감으로 삼아 잡아먹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사냥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땅에서 채움을 얻으려고 하는 동안에 모든 인간관계는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가 됩니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언행은 빗나감의 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사냥감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먹으라고 당신 자신을 제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 채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물이자 양식입니다. 사냥감은 단 하나도 나를 잡아먹으라고 제 발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공백을 보시며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나를 가지고, 나를 먹고, 나를 벌고, 나와 친해짐으로써 너의 마음의 공백을 채우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소망하는 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날 때 사냥이 아닌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사랑 아니면 죄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면서 24시간을 살았다면 사랑을 하지 않았을 때 24시간 동안 나올 모든 죄를 그치게 한 것입니다. 죄를 그치고 사랑하라는 본문의 주제와 일치합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가 하는 언행은 모조리 죄입니다. 주님을 믿고 새로운 영적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사랑하게 되었다면 내 속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허다한 언행의 죄는 다 그치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사랑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에는 두 번째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랑하더라도 내가 하는 사랑이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사랑을 해도 사랑을 받는 상대방은 더욱더 화를 내고, 더욱더 분노하고, 더욱더 자존심 상해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죽이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반응이 나타날 때라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은 유효합니다. 상대방 속에서 죄가 나온다는 것은 상대방이 마음 채움을 위하여 나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랑이 없다면 내 속에서 죄가 자극되고 선동됩니다. 죄가 죄를 불러오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적 환경에 적응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죽으신 예수님의 입장을 마음으로 갑옷처럼 입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뿐입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이 아무리 죄를 쏟아붓더라도 내 속에서 죄가 자극되거나 선동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타나는 죄는 내가 사랑함으로써 그만큼 덮이게 되고, 중단되고, 제어됩니다. 또한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죄에 의해서 자극되고 선동되는 죄의 상태 또한 제어되고 그치게 됩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할 것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으로서 죄가 나오는 일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하자고 호소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공백 때문에 생기게 된 채움의 욕구가 생기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정욕이 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정욕이란 하나님 이외의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면 이러한 정욕을 따라 사는 세월을 그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정욕의 구체적 사례가 언급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런 것만 정욕인 것은 아닙니다. 내가 건실하고 근면하게 사업을 잘해서 만족하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정욕입니다. 영원한 속성을 가진 마음을 끝이 있는 이 세상 만물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속성의 마음 수준을 끝이 있는 만물의 수준으로 강등시키려 하는 것이 바로 그릇된 욕구로써의 정욕입니다. 3절의 말씀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제발 이러한 정욕을 그쳐야 한다는 베드로 사도의 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1절을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우리는 말과 행동이 모두 사랑이어야 한다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행위의 사랑을 봉사로 언급합니다. 이 봉사는 단순히 예배당 내에서 직분을 받아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나 내막을 들여다보자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말씀으로 말을 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봉사하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나타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을 거쳐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한껏 힘주어 이야기한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변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도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매를 쳤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기탄없이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13절을 보면 이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에 관한 언어가 곧 학문이자 교양이었습니다. 지식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에 관한 수준 높은 말들을 기탄없이 쏟아내는 것을 보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이전에 거듭남이란 언어체계가 바뀌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또한 말이 참 어렵고 고급스럽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말씀이 너무나 수려한 표현들로 이루어진 것을 지적하며 과연 베드로가 기록한 서신이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헬라어에 정통한 학자들이 하는 소리이니 그만큼 본문이 수준 높은 표현들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를 그치고 사랑하라’는 변증법적인 표현에는 중립성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고, 죄가 나오면 사랑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죄를 드러낼 수는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죄를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사고로 사랑과 죄를 언급하며 사랑할 것을 요청합니다. 다만 이러한 표현 자체는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힘을 받아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내리고 있는 사랑의 정의입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이토록 중요한 주제가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는 양상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사도 베드로가 거듭나고 성령에 장악되어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과 같은 입장이라는 생각을 갑옷처럼 입는다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만을 소망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사람을 만나서 하게 되는 모든 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말하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게 되는데 그때 필요한 모든 힘은 하나님이 주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장에 나가서 사장님을 만나든,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 혹은 형제자매를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내가 하는 말과 내가 그들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게 되는 에너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살며 죄를 생산해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살며 사랑만 하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랑은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나올 허다한 죄의 언행을 그치게 하고, 중단하게 하고, 제어합니다. 6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랑을 통해 영원한 삶을 지금부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언행이 사랑 아니면 죄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언행이 사랑만으로 나오게 하여 주심으로 끊임없이 쏟아질 허다한 죄가 중단되고, 제어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