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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맨날 나만 고난을 기뻐하라는 이유>의 줄거리 :
불시험 같은 고난을 겪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김으로써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겪으신 십자가 고난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셨다는 증거가 없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너무너무 싫어하셨고 다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정말 억지로 받아들이셨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왜 맨날 우리에게만 고난을 즐겁게 여기며 받아들이라고 하실까요?
맨날 나만 고난을 기뻐하라는 이유
(베드로전서 4:12~19)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읽은 12~13절을 보면 불 시험으로 여겨지는 어려운 일들이 임하게 되면 ‘아니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주어졌지?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계기로 삼고 즐거워하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그런 사람에게 영광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특히 신약성경에서 계시가 완성됩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위한 준비 단계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적 가치와 영적 진리는 구약에서 준비되었다가 신약에서 완성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너희가 성공할 것임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너희가 형통할 것임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식의 표현은 없고 맨날 우리에게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요청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고난이라는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늘 의식 속에서 켜놓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의식을 켜놓기 때문에 죽었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은 십자가 사건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와 고난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그 연관성에 관해 이야기해 줍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몸에 병이 걸려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돈이 안 벌려서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모욕을 받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일이 생기면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내가 생활 속에서 겪는 고난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기에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고난이 도대체 무엇이며 고난을 바라보며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할까요?
말씀드린 대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십자가 고난의 과정이 시작되기 직전입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를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을 눈 씻고 찾아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즐거워하면서 맞이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7~38절을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고민하셨다는 말씀의 원문을 보면 창자가 끊어지는 괴로움을 느끼셨다는 표현입니다.
또 같은 사건에 대해 누가복음 22장 42~44절에서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장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상황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두고 계십니다. 그런데 너무나 괴로워하신 나머지 천사가 힘을 보태야 할 정도였고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진을 짜내는 괴로움을 겪고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자면 베드로의 요청이 참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억지로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도 즐거움이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괴로워하면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가 되는지 놀라울 지경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에게 불 시험 같은 고난이 임할지라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며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기가 막히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것임을 생각한다면 지금 생활 속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며, 십자가를 늘 마음속에 품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고난에 즐겁게 참여하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못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알고 계셨으며, 실제로 부활하셔서 사십 일 동안 머무신 뒤에는 승천하셔서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보좌 우편의 아버지 집에 등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심에도 사흘을 참지 못하셔서 그렇게 괴로워하셨는데, 우리는 언제일지도 모를 예수님의 재림을 마음에 품고 생활 속 고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앞서 살펴본 베드로전서 2장 20~21절에서도 등장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서 고난을 받는다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지독하게 싫어해야 할 것입니다. 싫어하지만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땀에서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싫어하신 고난을 우리에게는 즐거워하며 받아들이라고 하니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난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합니다. 고난이 고통이 되는 이유는 고난이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을 가져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내게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이란 내 마음에 살이 되어버린 것들입니다. 고난은 그렇게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을 뜯어냅니다. 마음에 살처럼 붙어있던 것들이 뜯기니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을 가져다주는 고난은 내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 때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소망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그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징그럽게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고난을 겪게 됩니다. 소망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내 마음에 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살이 되어버린 소망을 떼어내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소망하는 상태를 내게서 완전히 빼앗아 가는 것이고 고난의 이유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왜 이런 고난이 올 때 즐거워하라고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조차 십자가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인 적이 없는데 왜 우리는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단장의 고통을 가져다준 고난의 내용을 생각해 봅니다. 대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상실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괴로워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셔서 마음으로 붙잡고 있었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비롯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힘과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뜻과 힘과 마음은 전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붙잡는 일에만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뜻과 힘과 마음이신 성령께서 오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아버지의 뜻과 힘과 마음을 드러내시는 공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붙잡고 계시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처해있던 저주의 자리로 떨어져 내려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저주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내려오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인간이 처해있는 저주받은 상태는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에도 하나님이 없고,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 속에도 하나님이 없습니다. 인간의 주체성으로 향해야 되는 과녁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이 과녁이 아니었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저주란 하나님과 삼중으로 철저하게 분리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바로 이러한 저주의 자리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의 자리에 처하시지 않았다면 저주의 자리에 있는 인간과 진정으로 만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공생애 기간까지는 저주 바깥에 계셨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저주 안쪽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연합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저주 속에 던져짐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직전까지 영원 전부터 일체이셨던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어야만 했습니다. 죽음과 부활 직전까지의 기간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올라탐으로써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하게 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은 사흘에 불과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기대하며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고작 사흘을 하나님과 분리되어 계신 것을 그렇게 괴로워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에서 최고로 괴로웠던 순간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웠을지라도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괴로웠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작 사흘을 아버지와 분리됨으로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평생을 아버지와 분리되는 일을 괴로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내 마음이 붙잡고 있는 세상 가치들과 분리되는 일을 괴로워했을 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욥입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고, 아내도 잃고, 사회적 지위도 잃고, 친구들도 잃었습니다. 욥은 이러한 상실을 통해 지독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대상들이 마음에서 상실될 때 찢어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내 속에 온전히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고통을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떨어지는 사흘을 그토록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육체적 고통이 너무나 극심할 것을 아셨기에 괴로워하셨다고 오해합니다. 바늘에 손톱 밑을 찔려도 너무 아파서 화가 날 지경인데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며 겪으신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한 사람은 예수님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덜할지라도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저 멀리서 돌을 휙휙 던졌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머리만한 돌을 들고 와서 줄을 서서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까지 순서대로 내려쳤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겪은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만큼은 아니더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죽어가면서도 마음의 평강을 유지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봅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스데반 집사님을 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보다 못하셨기에 괴로워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고난으로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육체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늘로 들어가게 해주는 즐거움의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이 육체를 돌로 치는 순간은 스데반 집사님이 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갖게 해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 사흘 동안 분리됨을 생각하시고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상실감을 느끼셨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 속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하나님과 분리됨을 고난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저주 바깥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단 사흘 분리됨을 힘들어하셨는데, 하나님과 평생 분리되어 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갑니다. 마음에서는 하나님 대신 이 세상 것들만 잔뜩 붙잡고 있습니다. 내 몸을 붙잡고 아까워합니다. 자녀를 붙잡고 있습니다. 가족을 붙잡고 있습니다. 재산을 붙잡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예수님처럼 붙잡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붙잡고 아까워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본래 이 모든 일들은 내가 붙잡을 일이 아니라 조물주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는 일들입니다. 내가 붙잡지 않는다고 우주 밖으로 방출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세상일들은 아버지의 손안에 있고 아버지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내가 붙잡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붙잡고 계신 편이 훨씬 유익하고 안전합니다.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붙잡고 계신 편이 훨씬 더 이득입니다.
저주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이 세상 것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붙잡고 계신 대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어야만 했기에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괴로워하신 만큼 우리는 거꾸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아까워하시고 소중히 여기셔서 단 사흘 동안 분리되는 것조차 못 견뎌 하시며 괴로워하셨던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붙잡고 있는 것들을 마음에서 떼어내시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십자가 사건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곧 고난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고난이 십자가를 붙잡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특성대로 하나님 대신 이 세상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까워하고, 소망하는 체질은 단번에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삶에 고난이 생깁니다. 몸이 병들고, 가지고 있는 것에 문제가 생깁니다.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나를 저주에서 빼내시려고 허락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 사흘만 떨어져 있어도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괴로울 만큼 좋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과 만나게 하시려고, 내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것을 붙잡고 있는 저주의 상태를 근절시키려고 고난은 주어집니다. 내가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아깝게 여기고, 상처 입거나 해를 받으면 괴로워할 모든 것들을 끊어내는 작업이 고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난이 주어진다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드렸듯이 저주의 상태입니다. 저주받은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이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언어가 저주에 찌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일이란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집착한다면 저주받았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자녀이고 정말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나 따위가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갖고 계시는 아버지께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상태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주권을 다 끊어내고 스스로 자녀를 붙잡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괴로움을 준다면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부모의 마음에서 자녀를 떼어낼 수 있는 계기가 제공되고 있기에 즐겁고 기뻐할 일입니다. 마음이 자녀를 놓고 하나님을 붙잡게 되기에, 나는 아버지를 갖게 되니 유익이고 자녀 또한 하나님께 맡겨짐으로써 유익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삶의 방향 전체가 십자가를 향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아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방향으로 내 삶이 진행될 때 이보다 더 기뻐할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붙잡고 소중하게 여기고 잃어버리면 아깝게 여기는 것들은 내가 원하는 소망대로 다 되어도 저주의 부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주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저주의 성공은 더 깊은 저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 사흘 동안 헤어져 계심을 그토록 괴로워하셨다는 것은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고 타락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 속에 던져지셨습니다. 죄가 없고 타락도 없으셨기에 예수님의 가치관은 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느끼시는 좋음은 우리처럼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느끼는 좋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에 찌들지 않은 생생한 마음으로 좋음을 느끼시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과 단 사흘을 헤어지는 것조차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으로부터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십자가의 의미가 생깁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하신 만큼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흘 동안 하나님을 잃으실 것이기에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로 감으로써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을 붙들고 있던 나는 죽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 사흘을 헤어져 계심에도 그토록 괴로워하셨던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좋은 하나님을 가지게 하는 자리가 십자가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놓치는 자리가 십자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엄청난 고난을 겪으시며 이루신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는 엄청난 즐거움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고난이 주어진다는 것은 십자가가 갖고 있는 취지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당함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형통할 때 슬퍼하고 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형통하게 이끌어 가시고, 세상 기준으로 모든 일이 잘되게 하신다면,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라서 죄의 체질이 있는데 잘 되게만 하신다면 그만큼 마음이 취하고 빠져들어서 정복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형통할 때 걱정하고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마음이 소중해서 붙잡고 있는 대상, 그것이 상실되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살이 되어버린 대상, 하나님을 갖지 못하게 하는 대상을 찢어냅니다. 그러므로 생활 속 고난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주에 빠진 우리들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대상을 떼어내는 것이 고난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고난은 십자가의 취지가 이루어지기에 즐거운 일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십자가 예수님과의 연합은 더욱 강력해지고 돈독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은 십자가 예수님께 나를 밀어붙이는 기회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서 이미 있는 것을 상실하든지, 간절히 소망해서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 예수님과의 연합은 강력해지고 돈독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즐거움입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빼앗기는 고통이든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이든지 십자가 취지에 맞춰진 것들이기에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고난이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사흘을 하나님과 헤어짐으로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갖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러한 십자가의 취지에 맞춰진 고난과 어려움이 생활 속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우리에게 세상적인 기준의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전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기 위하여, 온전히 저주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저주 속에서 마음의 살이 되어버린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을 끊임없이 끊어내실 것이라는 점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 약속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기고 그렇게 좋은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소망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엇보다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고난의 인생,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뜻하지 않게 빼앗기는 인생, 이 고난의 인생이 얼마나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을 깊이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인가를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