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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로 세상 이겨 먹는 재미에 산다>의 줄거리 :
믿음의 승리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믿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시작점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이 내 마음을 천국 보좌 우편까지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너'로 상대하는 '나'로서 다시 태어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유일한 너로 삼아 나로 태어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십자가로 이 세상을 이겨 먹는 재미로 사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로 세상 이겨 먹는 재미에 산다
(요한1서 5:1~12)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십자가로 이 세상을 이겨 먹는 재미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예수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의 삶의 성격입니다. 세상을 이기느냐, 세상에 지느냐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든지, 세상에 지든지 모든 인간은 타락 이전이나 타락 이후나 공통적인 존재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있음을 의식하는 작용과 좋음을 욕구하는 두 가지 작용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무엇인가 있음을 의식하고, 무엇인가 좋은 것을 욕구하여 채우려고 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가진 인간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반대로 세상에 져서 무릎 꿇고 정복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의 마지막 장에서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기며, 세상을 이긴 자만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진 자이며, 세상에 졌다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서 있어야 합니다. 막연히 ‘그럼 하나님께로부터 났지 누구에게서 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제대로 된 믿음 상태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부모로부터 태어납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서 부모를 통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있음을 의식해야 하고 좋음을 욕구해야 하는 존재 구조를 갖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이런 인간의 인격이란 마음 안에서 살아있는 ‘나’라는 의식입니다.
이 ‘나’라는 의식은 ‘너’라는 대상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버지인 이유는 너의 위치에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인 이유는 너의 위치에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너’라는 위치를 염두에 둘 때 아버지는 자녀로부터 태어나고, 목사는 성도들로부터 태어나고, 남편은 아내로부터 태어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너’라는 대상으로 삼아서 ‘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너’에 해당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으면 됩니다. 의식하고 욕구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구조에서 첫 번째로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이 누구이고, 첫 번째로 좋음을 욕구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내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는 아들이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아들로부터 태어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로부터 태어납니다. 연애를 할 때 로미오는 줄리엣으로부터 태어났고, 줄리엣은 로미오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장님은 ‘너’라는 자리에 사업체를 둔 상태이기에 사업체로부터 나로 태어납니다. 목사님은 ‘너’라는 자리에 목회나 성도를 둔 상태이기에 이로부터 나로 태어납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첫 번째 ‘너’의 자리에 둡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자 유일한 좋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이고 궁극적인 ‘너’가 되실 때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의 자리에 두는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나’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믿어야 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연쇄 과정의 시작점입니다. 이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이 없는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만 따로 떼거나, 부활만 따로 떼는 것은 이단이고 무조건 적그리스도입니다. 몰라서 그렇게 하든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든지 오류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십자가에서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세상 바깥으로 나가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까지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면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이 상대하시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너’로 대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감을 최우선으로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궁극적인 좋음으로 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너’로 삼아 태어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너’로 해서 태어난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피조물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계명을 사랑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너’로 삼아 태어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이 전혀 어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겁고 부담스럽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라는 인격이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고 궁극적인 최초의 ‘너’로 상대하여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로 상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시작점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을 최초이자 유일한 궁극적인 ‘너’로 마주 보며 ‘나’로 태어난 인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을 가진 자는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앞서 세상을 이기든지 세상에 지든지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의 구조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이 구조를 가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기댈만한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란 기댈만한 대상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면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마음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에 좋음을 욕구하여 채우지 않으면 그 공허함으로 인해서 우울함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과 채움을 욕구함에 있어서 더 이상 이 세상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대상들이 없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4,000년 전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보다 더 귀한 삶의 울타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없어도 의식과 욕구에 아무런 지장이 생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근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를 떠나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너’의 자리에서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있음을 의식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마음에서 가나안 복지를 붙잡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두 번씩이나 이방 왕들에게 들여보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먼저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의 있음과 좋음을 가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까지도 바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걸려있는 아브라함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이삭을 제단에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이고 세상을 이기는 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욥 또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세상에 대한 승리를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하박국 선지자는 선민의 나라가 바벨론에 침략당해 망하리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 예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하박국 3장 16절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더욱 놀랍습니다. 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이김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의 삶에 어떤 추수가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가득하며, 감람나무 소출이 많고, 밭에 먹을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감사하고자 한다면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추수감사절은 일 년 동안 내가 얼마나 세상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얼마나 추수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벌고, 하나님을 얼마나 먹고, 하나님으로 얼마나 배불렀는가를 확인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이 세상 것을 많이 추수하고 얻었음을 감사하고자 추수감사절을 보낼 것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너’의 자리에서 상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시고 유일한 좋음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일은 이 세상 것을 많이 얻음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의 유일한 ‘너’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범사에 임하고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진정한 기쁨을 주는 추수는 무화과나무의 무성함일 수 없고, 포도나무의 열매일 수 없고, 감람나무의 소출일 수 없고, 밭에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것으로 기쁘다면 세상에 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는 실천적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건강 문제, 재정 문제, 가정 문제, 인간관계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이러한 문제들의 발생이나 해결이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는 무관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라도 내 내부의 구조를 좌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은 세상에 지게 됩니다. 문제가 없어지거나 해결되지 않으면 기쁠 수도 없고, 내 존재의 토대를 마련할 수 없어서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다면 이미 세상에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까요?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문제가 발생하는 세상 전체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문제가 문제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은 그 문제의 위력을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결국 세상에 지는 것입니다.
삶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법은 문제를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문제를 문제로 취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문제를 포함한 세상 전체에 대해 죽는 것뿐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일어난 문제를 세상 전체에 대한 죽음의 계기로 써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면 마음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우리의 유언은 ‘저는 주님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하늘로 올라갑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문제의 존재감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떠나는 대신 남겨진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나라와 주권이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리되든, 저리되든,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그것은 아버지가 하실 일입니다. 나는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십자가에서 죽고 아버지 만나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면 됩니다.
그 문제의 존재감이 내 마음에서 제로 되게 만들고, 그 문제가 해결됨을 좋게 여김을 제로 되게 만듭니다. 오직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감만으로 의식을 채우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여 욕구를 가득 채웁니다. 문제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사는 또 하나의 재미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특권이고 특혜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타이밍에 우리의 몸은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몸을 아끼고 보존하려 애쓴다면 죽음은 몸을 뺏기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때가 정해져 있는 몸을 아버지의 뜻대로 쓰시도록 내어드림으로써 형제 사랑에 전념하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형제 사랑이 나타나기 전에 나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세상을 이겨야만 합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체질이 아니면 형제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존재감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채우려는 욕구에 이 세상 것들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세상을 이김입니다. 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통째로 버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오직 하늘에 계신 친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하나님만을 ‘너’의 위치에서 상대하는 나일 때, 내 마음의 구조인 의식과 욕구에는 이 세상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상태가 됨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4~5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을 보면 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이 언급됩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엔 둔 내용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영이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의 몸에 임해서 공생애를 살다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을 때 그리스도의 영은 몸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신 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나사렛 목수 출신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성령이 증언하신다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은 내가 연합해야 할 사건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 나의 마음은 육체를 벗고 예수님의 육체를 입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곧 나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성령이 증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증언을 듣지 못한다면 아무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나를 위한 사건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증언을 곧 하나님의 증언이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방송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내용이 전혀 살아있는 의미로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날마다 마음으로 붙잡아야 될 의미로 와닿습니다. 내가 죽은 것이고, 내가 부활한 것이고, 내가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은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여러분 마음의 귀에 대고 하나님께서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내 아들이다.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네가 죽은 것이다. 내 아들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너도 부활해야 한다. 내 아들 예수가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앉았듯이 네 마음도 그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와야 한다.’라고 성령을 통하여 속삭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은 사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해서 들을 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6장 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신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또 이어서 45절에서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너’로 삼아 ‘나’로 태어난 자들은 세상을 이긴 자로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 한 사람 인격의 부분 부분을 맡아서 당신의 사역으로 삼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굉장한 사건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나’라는 인격체를 삼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전적으로 풀가동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장에서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 되지 않는 재미로 살 수 있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몸이 돌에 맞아 죽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나를 확인해 가는 재미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내부에서 하나님의 속삭임을 크게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으며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볼 때 이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유언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 문제, 돈 문제, 자녀 문제를 비롯한 어떤 문제가 생겨도 문제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이기는 재미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 기적 속에서 아버지를 유일한 ‘너’로 하여 태어난 ‘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세상을 이겨 먹는 재미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특권을 만끽하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