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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위원칙 아닌 실시간 명령 따른 사랑>의 줄거리 :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진리란 실시간으로 나의 지정의 기능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입니다. 사랑은 구제 봉사 헌신 희생과 같은 몇몇 기억할 수 있는 행위원칙을 따라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실제로 사귐이 있을 때만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사람을 관계하는 것입니다.
행위원칙 아닌 실시간 명령 따른 사랑
(요한2서 1:1~13)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랑은 행위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뿐만 아닙니다. 보다 폭 넓은 의미에서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자기계발서 등에서 소개하는 것과 같은 행위원칙을 따라 행동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요한2서는 요한1서와 같은 수신자를 대상으로 기록된 편지입니다. 요한1서에서 이미 다 이야기된 내용의 요약적인 반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말해 사도 요한이 ‘이 부분은 좀 더 강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부분은 좀 더 두드러지게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요한2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요한1서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로부터 사도 요한이 특별히 두드러지게 만들고 싶었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3절을 보면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진리와 사랑이 연결되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거짓 교사들과 적그리스도의 교훈을 단절하기 위해 10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요청이 제시됩니다. 이 말은 그들의 교훈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만치 거짓 교사와 적그리스도의 교훈이 위험하기에 끊어야만 한다는 내용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에서는 진리와 사랑이 묶여서 언급됩니다. 그리고 사랑과는 너무나 반대되는 거짓 교사들과 적그리스도의 잘못된 교훈을 경계하기 위해 단절 요청이 이어집니다. 잘못된 교훈을 붙잡는 것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몇십 년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적그리스도가 주장하듯이 예수님의 승천 부분을 잘라버리는 교훈을 붙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이 승천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소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함을 꼭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염두에 두고 적그리스도나 거짓 교사들을 경계합니다. 이들은 부활 이후의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과정을 잘라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서 하나님과의 사귐은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하늘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요한2서를 기록하였습니다.
한편 1절을 보면 편지의 수신자를 두고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녀(lady)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여성으로 표현하고 교인들을 그 자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를 부녀로 표현한 것에는 하나님과의 사귐과 앎에 대해 관련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마귀도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지식적 앎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사귐을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귐이란 남녀가 결혼하여 동침해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앎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사귐이란 체험적으로 연합하여 깨닫는 앎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귐으로써 알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를 여성을 의미하는 부녀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인 사이가 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삼은 아내가 되는 것처럼 사귐을 염두에 두고 교회를 부녀라 하고 교인들을 그 자녀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귐을 원천적으로 막는 요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승천과 보좌 우편의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귀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진리의 기준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과는 단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사귐이 우리를 영적인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사랑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특혜이자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사랑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이든 재벌이든 대학 총장이든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구걸하는 거지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빈부귀천의 차이도 없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는 모든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지식이나 행위원칙을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과 사귐이 진행되는 동안 내 지정의 안에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빈부귀천, 지식의 유무, 남녀노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와 사귀는 중이라면 극빈자일지라도 상대하는 부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행위원칙을 따르는 구제나 헌신이나 봉사나 희생이 아닌, 하나님과 사귈 때 주어지는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실시간 명령과 지시가 없다면 아무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기억하고 있고 구제와 헌신과 봉사와 희생에 내 행동을 맞추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행하는 것이 아닌 율법을 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희생 등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행동이라면 사랑은 율법이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랑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는 중에 내 지정의에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귐에 의해 결정됩니다.
본문에서는 ‘진리’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진리라는 말에는 다양한 쓰임이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을 가리킬 때 쓰일 수 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과정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직접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진리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선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진리라는 표현에 담기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통점은 바로 연합입니다. 내가 진리 안에 거하고, 진리가 내 안에 거해야 하는 연합입니다.
4절을 보면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한다.’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계명을 행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닌 사랑하라는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특권이자 특혜인 사랑을 할 때 거지로서의 삶은 중단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하는 삶을 위해서는 진리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라는 계명을 듣고 이행하려 함에 있어서 습관적으로 문자로 기록된 율법의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기에 그 문자대로 사랑하는 행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절대로 우리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계명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상황과 처지가 다릅니다. 그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 다양한 사람을 만날 때 사랑으로만 관계하기에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기억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희생이라는 몇 개의 단어를 떠올리며 그것에 맞추어 행동한다고 해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습니다. 구제와 봉사와 헌신과 희생이 사랑이라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예수님은 무엇을 가지고 사랑하실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랑이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마주할 때 내 안에 실시간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명령과 지시가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지금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무엇으로 헌신하는가? 무엇으로 구제하는가? 무엇으로 봉사하는가?’를 찾기 전에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은 그저 계명을 지키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삶 전체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살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의 정의는 구제나 봉사나 헌신이나 희생이 아닙니다. 지금 상대방을 향한 가장 적절한 최선의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최선의 말과 행동은 내게 있는 것을 주는 구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헌신과 희생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제나 봉사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며 행동을 하는 것은 율법을 기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죽은 문자를 이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실시간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가 내 지정의에 받아들여져서 조금의 저항과 거부감 없이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상태가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1서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지만 꼭 기억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이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율법적으로 받아들여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율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지킬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 우리는 으레 ‘내가 어떻게 사랑을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서 사람을 상대할 때 나타나는 일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또렷하게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한 최선의 말과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그의 겉모습과 말과 행동만으로는 그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 사람을 실시간으로 보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알고 계십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나를 실시간으로 보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둘의 만남을 주관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귀는 내게 명령과 지시를 넣어주실 것입니다. 이로부터 상대를 향한 최선의 말과 행동으로서의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호흡이 맞고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했다면 하나님을 한 번 더 버는 것입니다.
최근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데리고 강릉을 방문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의 친정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친구분도 함께 오셔서 강릉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바닷가를 산책하게 되었는데 친정어머니의 친구분이 아이에게 ‘너는 하나님을 많이 벌고 있니?’라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보통 하루에 하나님을 30개 정도 벌어야 되는데 요즘은 열 몇 개 정도밖에 못 벌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예수님 믿으면 아버지 하나님을 벌어 하나님 부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늘 하니까 아이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 벌기를 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한 개 더 버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가 깊어지고 하나님과 사귐이 돈독해집니다. 하나님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짧은 순간에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다 사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지금 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 사람과 만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죽었는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이자 유일한 좋음으로 의식과 욕구 안으로 흡입하며 사귀고 있는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일등인 상태, 하나님의 좋음이 일등인 상태가 분명하다면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가 내 지정의 안에서 들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리는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라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를 하고 행동 하나를 할 때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더 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한 개 더 벌게 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말처럼 우리도 하루에 하나님을 30개씩 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통하여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라 사람 앞에서 행동할 때마다 하나님을 한 개씩 버는 것입니다. 한 번 벌고, 두 번 벌고, 세 번 벌면서 그렇게 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초등학생 아이가 했던 하나님을 번다는 말이 이러한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30개씩 벌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큽니다. 이 아이처럼 하루에 하나님을 30개씩 벌도록 합시다.
하루에 30명을 만나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 대여섯 번씩 하나님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30개씩 하나님을 번다면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고 모레가 다를 것입니다. 이 달라짐은 점점 더 사랑이 원숙해지고 사랑의 달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벌어 하나님 부자가 되어갈수록 이 세상으로부터 온전한 자유가 나타날 것이고, 마음은 온전히 천국에 영주권을 가지고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랑을 반복함을 통하여 바로 이러한 일들은 점점 크게 확장되고 굳게 고정되어 갈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유익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나에게도 특혜이고 특권입니다. 아무쪼록 거짓 교사들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사도 요한의 염려를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주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진리임을 알면서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생활화하지 못한다면 적그리스도나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리 말로 인정하더라도 실제로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좋으심만을 소망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없어서 하나님과 사귈 수 없다면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따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 그러한 모습이 나타난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분명히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생활화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과 사귀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이 중대한 문제이기에 사도 요한은 10절에서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라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요한의 염려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과 같은 식의 계명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시간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행동하게 되는 연합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기에 사랑을 방해하는 거짓 교사나 적그리스도를 주의하고 끊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가 점점 더 또렷하게 의식되도록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활화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귐이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귐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하루에 30개씩 버는 하나님 부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사귐으로 마음의 부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땅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받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아버지를 30개씩 벌어가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