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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생이 거세된 자의 걸신들린 열등감>의 줄거리 :
영생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사귐을 가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 의식에서 일등하고 좋음을 욕구하는 소망에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대상이 되신 상태이지요. 이런 영생을 지금 당장 얻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이 채워지지 않음으로 발생하는 열등감입니다. 이 열등감은 이 세상을 향해서 걸신들리게 합니다.
영생이 거세된 자의 걸신들린 열등감
(요한3서 1:1~15)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요한3서는 가이오 개인에게 보내는 지극히 사적인 편지입니다. 전체 내용은 당시 존재하던 순회전도자들의 접대와 후원에 관한 지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으나 이방인들로부터 숙식이나 편의를 제공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의식주 문제와 그 외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접대와 후원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순회전도자들의 복음 사역은 맥이 끊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순회전도자는 결코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 혹은 바나바와 빌립 같은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순회전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순회교사라는 직업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순회교사들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전했고 그 대가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소중하고 고귀한 지식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회전도자들은 순회교사들과는 다르게 자기가 알고 있는 복음의 지식을 돈을 받고 파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받는 사람의 후원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본문에서의 가이오는 바로 이러한 순회전도자들을 후원하며 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순회전도자들은 가이오가 충심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도왔음을 증언하였고 당시 교회 안에서는 가이오의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가이오가 속한 지역 교회에 디오드레베가 등장합니다. 디오드레베는 당시 교회에서 지도자급의 장로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가 스스로 교회에서 으뜸임을 주장하며 교회를 자기의 조직처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칭찬하며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지금 당장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내려주시는 명령과 지시를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한편 이렇게 진리 안에서 행함과 반대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으뜸이 되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는 실시간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자기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행동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 예로 디오드레베가 언급됩니다. 디오드레베는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교회라는 조직을 이용하여 자기의 권세를 행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는 참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대한민국의 개신교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모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주창하여 1980년에서 2010년 정도까지 크게 유행했던 소위 삼박자 축복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정말로 삼박자 축복을 정의하는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한 구절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가르침 전체를 떠받칠 바탕으로 삼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씀은 지금 영생을 얻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생의 상태에서는 몸이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지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무엇보다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사장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며, 배우자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며, 갑자기 발생한 돈 문제나 건강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더 먼저 느끼며 더 강하게 느낍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 상황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더욱 소망하고 더욱 친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상태이며 영생이 내 안에서 활발하게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영생의 상태를 전제로 삼아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에 취하여 사귐을 가질 때 이 땅에서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 섭리와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버지의 주권적 뜻이 아무런 방해받음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범사에 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범사에 잘됨을 이 세상을 기준으로 번영하거나 형통하는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하는 범사에 잘됨이란 모든 일이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이 이러한 편지를 쓴 시점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 탄압이 기승을 부릴 때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우리가 갖는 식의 ‘범사에 잘됨’이라는 생각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무게감을 더해가는 상황에서 ‘나는 출세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 것이다, 고속 승진을 할 것이다, 명품을 두르고 살 것이다.’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과제는 탄압 속에서 어떻게 복음 신앙을 지켜내느냐는 것뿐이었습니다. 범사에 잘됨이란 바로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탄압과 핍박이 기승을 부리는 환경 속에서 오직 이 땅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막힘없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강건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강건함’이라는 단어에는 육체의 건강함이나 교훈이나 이론의 건전함이 포함됩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장로인 디오드레베가 전혀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스스로 으뜸이 되고자하여 자기 생각을 교인들에게 강요하였고, 자기의 원칙을 교회 조직의 강령으로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하여 순회전도자 데메드리오가 디오드레베가 있는 지역을 방문할 때 횡포를 당하고 전도가 막힐 것을 우려합니다.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가이오가 이제까지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요청이 담겨있습니다.
가이오가 처한 상황은 쉽지 않았습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지도자급의 사람이 자기 멋대로 강령을 만들고, 순회전도자들을 돕는 이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등의 강압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는 영생을 유지함과 이 땅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름이 유지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따라왔기에 앞으로도 순회전도자들을 잘 접대했던 삶의 패턴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세상적인 방해나 장애가 생기더라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사귀는 영생을 굳건히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에서 누가 반대하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청하는 강건함의 내용입니다.
물론 강건함에는 육체의 건강 또한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가이오가 건강해야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 속에서 전도자들을 돕는 일도 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육체의 건강과 아예 무관한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과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름에 있습니다.
디오드레베가 교회의 권세를 휘두르는 상황에서 순회전도자 데메드리오를 위한 후원 문제가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영생을 붙잡음에 강건하고, 하나님의 실시간 명령과 지시를 따름에 있어서 강건할 것을 요청합니다. 앞으로도 이제까지 보였던 모범대로 행함으로써 순회전도자 데메드리오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함께 참여하는 동역자가 되고 차질이 없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요한3서는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이지만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장로인 디오드레베입니다. 디오드레베가 없었다면 순회전도자 데메드리오에 대한 일은 가이오가 문제없이 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따로 편지를 쓰지 않았어도 가이오는 강건하여 디오드레베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회전도자 데메드리오를 후원했을 것입니다. 다만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이 어려움을 넘어서야 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았기에 격려하고 돕기 위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요한3서를 마지막으로 요한의 서신은 끝이 납니다. 요한1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떠올려 봅니다. 1장 1절을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있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도들에게 목격되었고,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영생이란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면 이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욕구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고 있든지 하나님의 존재감을 이길 수 없게 되고,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을 더 가지고 싶어 소망하며, 하나님과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지되는 상태가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영생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영생과 시간과 공간이 배제된 태초의 영원함을 이야기한 후에 디오드레베가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요한의 서신 전체를 볼 때 하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태초로 돌아가서 영생을 누려야 한다는 요청으로 시작된 요한의 서신은 교회에서 악한 전횡을 부리는 지도자에 대한 경계로 이어집니다.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디오드레베에 대해 정의하기를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영생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여 하나님과 친해짐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디오드레베와 같은 모습은 절대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은 9절을 보면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라고 하였습니다. 디오드레베는 하나님을 뵙지 못하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였으며,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지 못하고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였습니다. 이 디오드레베가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함이란 결국 주변 사람들이 내 말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위치에 서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뵙지 못한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발견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뵙지 못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와 대화하는 지점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의 중요함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내가 말한 만큼 듣는 것입니다. 말하기만 하는 자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이며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노예입니다. 민주주의의 평등함은 내가 말한 만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음으로부터 성립됩니다. 그런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이 자기의 말만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의 사귐을 통해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는 사귐이 없으면 마음은 채워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채워지지 않음이야말로 죄와 저주 속에 빠져있는 모든 인간이 드러내는 열등감의 근원입니다. 사람들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많이 가지면 마음이 채워지리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채워지지 않고 있는 하나님 크기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하는 열등감의 표현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것을 자꾸 가지고 싶어 합니다. 세상일이 이렇게 되면 좋겠고,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크고 작은 소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열등감으로 인해 걸신들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세상에서 좋다는 가치가 아무것도 없어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나,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과 같이 되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도움이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만이 나를 채워주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돈도 없습니다. 건강도 없습니다. 지식도 없습니다. 명예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느낌이 몸이 아프다는 사실보다 앞서 느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설령 거지 나사로와 같은 상황일지라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동창이 재벌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서 나타나도, 형제가 로또에 당첨되었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한편 세상에 대해서 아직도 부족하게 느끼고, 하는 일들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어디에 가면 좋겠고, 무엇을 이루었으면 좋겠고, 누가 나에게 뭘 좀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어떤 형태로든 생겨납니다. 그러한 상태라면 마음이 걸신들린 상태이고 영생이 거세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채워지지 않음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인격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거지 귀신이 들어와서 세상에 대해 자꾸만 바라는 마음을 생기게 합니다. 열등감은 반드시 걸신을 부릅니다. 걸신이 들어오면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이 나옵니다. 이 열등감은 내 속이 비어있음에서부터 나옵니다.
요한의 서신은 우리 마음이 태초로 진입하여 하나님과 사귀는 영생을 이야기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오드레베가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경고하며 마무리됩니다. 요한1서에서 언급된 영원함 속에 들어가 사는 생명으로써의 영생이 제거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단적으로 디오드레베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고, 더 많이 갖고자 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쁨 거리를 찾아 나서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에 거지 귀신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걸신들렸기에 세상을 향해 침 흘리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침 흘리는 동안 실시간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막히게 되고 깨달아질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영생을 누리는 입장에서, 누림과 하나님과의 사귐과 영생과 생명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이것들이 제거될 때 마음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졸개들인 거지 귀신이 들어옵니다. 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침 흘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기쁘고 만족하려 하고, 심심함과 무료함을 제거하려는 걸신들린 상태가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언제 어디서든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에서 강건함이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함에 있어서 강건하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영생을 누림에 있어서 강건해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현장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주권적 뜻만이 임하기를 바랄 수 있고, 오직 아버지의 명령과 지시를 실시간으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말하는 강건함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영생을 누려 영혼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몸으로 하는 모든 관계에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뜻이 막힘없이 내려옴으로 범사에 잘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하며, 마음에 천국을 켜놓음으로써 아버지와의 사귐을 유지해 나가고, 오직 아버지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방해나 흐트러뜨림도 없이 강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걸신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인격 상태와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채워짐이 없는 공간으로 인해 느끼는 열등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도록 오늘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